우연한 기회에 고고학을 업으로 하는 사람을 소개받은 적 있다. 만나고 몇 분 지나지 않아 단호한 어투로 그가 말했다. 눈에는 약간 힘이 들어가 있었다.
"대개 고고학을 하는 사람들은 말 그대로 무덤을 파고 조상들의 유해를 가지고 놀기 때문에 기가 엄청 센 편이죠... 저는 여태 저보다 기가 센 사람을 만난 적이 없습니다."
나는 속으로 이죽거리면서도 연신 고개는 끄덕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뒤에 이어진 그의 말에 나는 그만 빵 터져버렸다.
"근데.. 이 아무개 씨는 저보다 기가 더 센 거 같아요.." 그의 눈은 확신에 차있었다.
나는 '기가 세다'는 수식이 어울릴 만큼 자기주장이 강하지도 않을뿐더러 외적으로도 역시 매우 온화하여 조금 억울한 측면이 있다. (믿거나 말거나)
만약 호불호가 분명하고 추진력과 자기주장 확실한 사람을 '기가 세다'라고 한다면 나는 골백번 '기센 여자'이고 싶다. 더 정확하게는 기센 '사람'이고 싶다.
불행히도 매사에 갈등을 두려워하는 탓에 늘 인생이 타협이고 눈치보기인데 나보고 기가 세다고?! 당최 뭘 보고..
나는 이 단어가 유독 여성을 특징짓는 단어로 유통되는 한국적 맥락을 고려할 때 불쾌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래도.. 수줍게 한번 웃었어야 했다는 뒤늦은 후회가..
결론; 마흔해 가까이 살면서 자기보다 기센 사람을 한 번도 못 만난 고고학자는 내게 기가 빨렸다. 거 땅 좀 더 파셔야겠어요.
2013.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