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와 응급실
내 동생 J와 다시 동거를 시작한 지 이틀째 되던 날 자정이 가까운 시각 아직 귀가하지 않은 J의 문자가 도착했다. 녀석은 내 위치를 파악하더니 놀라지 말고 들으라는 말로 실로 나를 놀래켰다. 응급실이라고 했다.
J는 서울랜드에서 열린 한 음악 페스티벌에 참가 중이었다. 저녁으로 새우튀김의 꼬리를 먹고 난 후 얼굴이 붓고 온 몸이 가려워진 J는 급기야 눈앞이 캄캄해져 중심을 잃고 쓰러지다 돌에 머리를 부딪혔다. J의 친구가 신속히 앰뷸런스를 불렀다. J가 내게 연락했을 때는 이미 CT촬영까지 마친 상태였다.
나는 황급히 집을 나섰다. 네비에 병원 이름을 치니 해당 병원 장례식장이 뜬다. 애써 시선을 피하며 목적지를 응급센터로 지정했다. 자정이 가까운 일요일 밤 강변대로는 한산했지만 전력 질주하는 차들보다 더 전력질주를 하자니 그 보다 무서운 일이 없었다. 손에 스미는 땀 때문에 핸들은 금방 끈끈해졌다. 당장 동생 얼굴을 봐야 살 것만 같았다. 망원동에서 일원동은 심리적 거리만큼 멀었다. 그래 봐야 고작 30분이 그렇게 길게 느껴질 수 있다니. 병원에 도착했다. 로비에서 있는 동생 친구의 손을 덥썹 잡았다. 다소 격정적인 장면이 연출된 듯해 순간 머쓱했다.
동생 친구는 초면이었지만 익히 들어온 그녀에 관한 에피소드 탓에 친근하게 느껴졌다. 연신 고마움을 표하고 가지고 있던 유일한 현금 이만 원을 쥐어주며 얼른 택시 타고 집에 가라 등을 떠밀었다. 돈을 안 받겠다는 J의 친구와 실랑이를 하다 ‘이건 돈도 아니라며’ 본의 아니게 돈을 던지는 지경에 이르러서 그녀는 떨어진 돈을 주워 황급히 길을 떠났다. 나중에 J의 친구는 J에게 ‘네 언니 너무 구수해서 웃으면 안 되는 상황에 자꾸 웃음이 나와 곤란했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나 역시 그녀의 에피소드가 떠올라 콧구멍이 자꾸만 씰룩 거려 혼났다.. 는 말은 돌려주지 않았다.
종합병원 응급센터 안은 청결하고 고요했다. 병원 냄새도 나지 않았다. 침상에 피가 낭자한 환자의 모습도 고통스러운 비명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의사와 간호사로 보이는 사람들은 데스크에서 컴퓨터 화면을 보며 자정이 넘은 시간임에도 피곤한 기색 없이 차분하고도 바쁘게 움직였다. 한 명의 간호사가 병상이 열개 정도 되는 진료구역 하나씩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대부분은 젊은 여성이었고 프로페셔널해 보였다.
J는 태평한 얼굴로 손등에 링거 바늘 두 대를 꽂고 누워 있었다. 내가 나타나자 몸을 일으켰다. 아이라인이 살짝 번졌다뿐 얼굴은 멀쩡했다. 뒤통수 근육은 상당히 부어올라 있었고 목과 팔에는 여전히 붉은 기가 가시지 않았다. 손목에는 페스티벌 출입 팔찌와 응급센터에서 달아준 팔찌가 적절히 조화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 모습에 내가 비꼬우 듯 ‘팔찌 부자네’ 하자마자 우리는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다시 진지한 얼굴로 자초지종을 설명해달라는 요청에 J도 사뭇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차분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하지만 페스티벌 장소를 빠져나오기 위해 코끼리 열차에 몸을 싣고 친구에게 ‘나 이제 죽는 거냐?’고 물었다는 대목에서 어쩔 수 없이 폭소가 터졌다. 우린 마치 일부러 숨죽여 웃기 위해 응급실을 찾은 사람들처럼 계속 웃어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동생의 알러지 증상은 한층 가라앉았다. 문제는 넘어지면서 다친 머리였다. 예정된 시간이 훨씬 지났지만 CT 결과가 나오지 않아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환자의 보호자는 의료인들에게 얼마나 피곤한 사람일까. 그러나 환자의 보호자는 묻고 싶은 게 많은 법이다. 그러니 나는 이것저것 물을 때마다 그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늘 ‘죄송하지만’이라는 말을 붙이게 되었다. 세 번 묻고 싶은 건 한 번으로 줄였다. 그러나 CT 검사 결과가 병원에서 말한 두 시간을 훌쩍 넘기자 더는 못 참겠다 싶어 간호사에게 물었다. 간호사는 ‘검사 결과가 나오면 알려주겠다’는 말에 ‘천천히’라는 부사를 붙였다. 어금니를 물고 말하는 건 아닌가 싶을 만큼 천천히라는 말의 밀도가 높았다. ‘검사 결과 나오면 천천히 알려주겠다’ 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굳이 천천히? 이상한 말이라 생각했지만 야박하기보다는 ‘진정하라’는 말로 들렸다. 그들의 어감에 어느 누구에도 감정적으로 휘둘리지 않겠다는 일종의 단호함이 서려 있었다. 직업적으로 요구되는 혹은 강요되는 태도 같은 게 아닐까 싶었다. 저절로 환자와 의료인의 권력관계가 생성되자 동생도 ‘이래서 집안에 의사가 하나 있어야 하나보다’ 했고 나는 속으로 ‘그래 니가 되면 좋았겠지’라고 답했다. 의료인 사이의 권력관계 역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응급센터의 현장에서는 오더를 내리는 사람과 받는 사람으로 나뉘어 있었다. 또한 병원에서 가장 약자일 것 같은 환자가 최종 오더를 내리는 주치의와 그 주치의의 오더를 받는 간호사를 대하는 태도에도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목숨이 오가는 병원 특히 응급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 치료해야 하는 그 긴장된 공간에서 생기는 다양한 권력관계를 누가 감시하고 자정 할 수 있을까 같은 거대한 질문이 남았다. 그러나 저러나 한 서너 시간 응급실에서 시간을 보내며 나는 계속 생각했다. 나의 궁금증은 어디까지가 정당하며 어디까지가 과한 걸까. 진상이 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나는 질문과 요구를 검열해야 했다.
J침상 옆에는 거동이 불편한 남성이 엑스레이 촬영과 소변검사 등을 받는 중이었다. 부인으로 보이는 사람은 남편에게 몹시 피곤한 음성으로 높임말을 썼고 남편은 수발을 드는 부인에게 매우 당당하게 반말로 이것저것을 요구했다. 건너편 침상에도 사흘째 심한 두통을 동반하고 있다는 사내가 누워 있었고 한 여성이 자리를 지켰다. 환자를 돌보는 여성들은 침대 옆에 놓인 작은 의자에 앉아 휴대폰을 보거나 침대 철제 난간에 기대어 엎드려 있었다. 그 모습이 몹시 고단해 보여 아이러니하게도 통증을 느끼고 침대에 누워있는 환자들 사정이 더 나아 보였다. 또 다른 침상에는 수면제 없이 잠들지 못하는 노모 곁을 지키는 중년 남성이 불안하게 서성이며 끊임없이 간호사에게 질문을 던졌다. 노모는 당신 병간호로 고생하는 아들 걱정에 거의 울음을 터트리기 직전이었다. 새벽 두 시가 조금 넘어 특별히 응급상황 같지 않아 보이는 한 남성이 등장했다. 동행인 없이 혼자 걸어와 침대에 벌렁 드러누워 핸드폰을 조작하는 모양새가 꽤 자연스럽고 홀가분해 보였다. 가족의 돌봄을 받는 환자들과 대비되어 신선하기까지 했는데 나도 어지간히 모든 사람이 가족을 이루고 산다는 관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동생이 응급실에 있다는 말만 듣고도 머리가 하얘졌던 나를 떠올렸다. 앞뒤 재지 않고 병원으로 내달릴 수 있었던 이유는 내가 동생과 피를 나눈 가족이라는 사실 때문이었을까. 내가 그 밤에 혼을 빼고 달려갈 수 있는 사람이 가족 말고 또 누가 있을까. 애인 정도? 아니 더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반대로 피를 나눈 가족이 아닌 누가 나를 이렇게 당당하게 불러낼 수 있을까. 아쉬운 소리를 더럽게 못하는 내 동생이 나 말고 누구에게 응급실로 와달라는 부탁을 할 수 있을까. 그야말로 제도로서의 혈연적 가족의 존재가 얼마나 특권화 되어 있는지를 실감한 순간이었다. 이런 혈연 가족 중심적 특권을 해체하고 좀 더 많은 의존적인 관계망을 형성하는 게 삶의 과제겠다 싶다. 굳이 가족이라는 개념을 경유하지 않고도 가능한 그런 관계들 말이다.
세 번 정도 눈치 보며 질문을 던진 끝에 해사한 표정의 의사가 검사 결과를 들고 우리 앞에 나타났다. 별 탈이 없다 했다. 술 마시고 소리 지르고 뛰고 굴린 탓에 혈관이 넓어져 저혈압 증상에 머리로 피가 안 갔대나 어쨌다나. 이런 증상을 동반한 젊은 사람들이 한 주에도 20명은 된다나 어쨌다나. 나는 괜히 동생에게 금주 명령을 내렸고 동생은 듣는 시늉도 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정해진 시간에 렌터카를 반납하기 위해 페달을 마구 밟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다른 차들이 나를 추월했다. 제한속도가 80킬로인 대로였다. 혼잣말로 사람들이 속도를 안 지키네 하니 동생이 ‘언니가 늦게 가는 거 같은데?’ 한다. 60킬로였다. ㅍㅎ 결국 렌터카는 삼십 분 연장했다.. 아무튼 이번 주가 무척 힘든 이유는 월요일이 너무 이른 시간부터 시작된 탓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