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주 여행
이번 여행에서 무진장 향기를 많이 맡았다. 지천에 흐드러진 천리향과 아카시아꽃 향이 대기에 녹아있었다. 꽃내음으로 뒤덮인 도시로의 여행이라니, 그저 호강에 겨운, 몹시 드문 행운이 깃든 오월이 아닐 수 없었다.
느리게 그리고 많이 걸었다. 언제든 볕 좋은 카페 야외 테라스에 앉아 카페인 또는 알콜을 섭취했다. 11시를 넘기지 않고 잠자리에 들었고 한번 잠에 들면 깨지 않고 아침에 눈을 떴다. 만성적인 눈의 피로와 두통도 일시 정지됐다. 오로지 좋은 음식을 먹고 쉬기 위해 지갑을 열었고 불필요한 소비에 대한 욕망이 현저히 줄었다. 인스타 광고에 눈길이 멈춰 서지 않아서 알게 되었다. (약발이 얼마나 갈지 벌써 걱정이다)
몬테네그로 작은 도시 코토로 사람들은 특별히 친절하지도 그렇다고 불친절하지도 않았다. 불쾌감을 주는 차별적 언행 예컨대 동양인을 보고 무조건 ‘니하오’를 연발하는 자를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실로 놀라운 경험이었다. ‘어디 한번 해봐라, 단단히 혼쭐을 내주겠다’ 던 내 각오는 무안해졌다. 온전한 타인으로 존중받고 있다는 기분을 느꼈고 그로써 더 자유로울 수 있었다. 나를 특정 정체성으로만 인식하지 않는 사람들 틈에 남의눈을 의식하는 일이 없었고 (이것이 왜 이렇게 연결되는지 모르겠지만) 급기야 가랑이가 너덜너덜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다니기에 이르렀다. 평소 브라를 하지도 않지만 한국에선 B.P점이 드러나지 않게 신경 쓰는 편이나, 이번 여행에선 동생에게 언니 찌찌는 자기주장이 강하니 어쩌니 하는 소리를 들을 만큼 시선으로부터 정신과 신체가 자유로웠다. 평등해야 자유롭다는 말, 차별받지 않아 자유롭다는 지당한 말의 의미가 의외의 장소에서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고양이들은 길고양이든 집고양이든 실외와 실내의 경계를 자유롭게 오가는 듯했다. 사람들은 고양이에게 말을 많이 걸진 않지만, 손길은 다정하고 고양이들은 돌봄에 응답했다. 쪼그리고 앉아 손을 내밀면 의심 없이 다가와 무릎에 머리를 쿵 하고 부딪히거나 부비적 거리며 벌러덩 배를 까고 누워 뒤집 뒤집 했다. 그 모습 덕분에 충분히 환대받은 기분이 들었고, 이 나라가 궁금해졌다.
구/신 유고 연방 결성에 모두 참여하며 사회주의 노선을 여느 구 사회주의 국가들보다 비교적 오래 지속한 덕분일지. 이 나라에서는 특별히 누가 더 잘 살고 누가 더 가난한지 한눈에 파악하기 힘들었다. 집은 형태나 연식의 차이가 있을 뿐,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 ‘세상에.. 이런 데서 사람이 산다고?’ 할만한 집은 없었다. 도로 위 자동차는 부를 과시하기엔 너무 작고 앙증맞아 이동수단이라는 그 순수한 용도를 다시금 일깨웠다. 웬만한 대도시에서 흔히 보는 프랜차이즈를 찾기 어려웠고 물가는 싸고 음식은 푸짐했다. 한편 슈퍼에서 파는 식자재는 다듬어져있지 않아 음식 준비에 여간 인내심이 필요한 게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극도의 시장 경쟁체제만을 살아낸 자로, 그 체제가 만든 편리함에 익숙할 대로 익숙해진, 말하자면 진열대에 깨끗하게 까놓은 마늘이나 진공팩에 든 다진 마늘 따위가 없다는 사실 앞에 살짝 불안을 느끼고 좌절하고 마는 인간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몬테네그로에서의 시간은 ‘왜 나는 마늘 까는 시간을 견디지 못했을까’와 같은 질문을 이끌어냈고 종종 내 안에 자연화된 자본주의적 관념들을 비트는 순간을 맞이하기도 했다. 유형의 자산인 집, 차, 명품백 혹은 학벌, 학력, 연고, 장애가 없는 몸, 성별이라는 상태가 인간을 등급 매겨 차별하는 동인이 되고 그 차별은 ‘능력’에 따른 결과로 정당화되는, 그러므로 이를 과시하는 건 가진 자가 당연히 누릴 특권이자 자격으로 인정되는 한국 사회는 진정 다수의 인간이 살기에 너무 척박한 땅이 되어버렸다는 절망이 새삼스레 찾아왔다. 아.. 돌아가기 싫다, 조금이라도 숨통이 트이는 곳에서 살고 싶다, 암만 전 세계가 글로벌 자본이 지배한다고 한들, 어디든 한국보단 나을 거라는 신앙이 급속도록 깊어졌다.
그러나 돌아가야지. (단념이나 포기 아님 ) 국회 앞에서 한 달 넘게 #차별금지법 제정을 요구하며 단식을 하고 있는 동료들 곁으로 가야지. 탄소다배출 장거리 해외여행을 하고 돌아온 탕자의 마음으로 다시 기후 운동을 해야지. 분수집으로 친구들을 초대해 크로아티아에서만 나는 와인과 오일을 함께 나눌 설렘을 안고 가야지. 휴가가 끝나 무쟈게 아쉽지만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재충전 또한 무쟈게 잘한 것에 감사하며. 이만 총총.
*한국을 향해 삼십 시간 진격 중인 바르샤바 쇼팽 공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