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 그 속에서 얻은 배움
대학교 4학년 1월, 첫 외주를 받았다. 4주짜리 프로젝트였고, 월급처럼 돈을 받기로 계약이 되어있었다. 지금은 외주 작업을 구하는 데 있어 다양한 플랫폼이 있지만, 이때는 아직 프리랜서 마켓 플랫폼이 크게 성장하기 전이었다. 첫 외주는 지인을 통하는 경우가 많지만, 당시 나는 외주 작업을 줄만한 위치의 사람들이 주위에 없었거니와 딱히 프리랜서 경력도 없어서 직접 찾아 나서기로 했다.
여러 구인구직 사이트들을 돌아다니면서 프로젝트 탐색을 시작했다. 사람인, 잡코리아, 알바몬 뭐 그런 사이트들. 생각보다 첫 프로젝트를 구하기까지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마도 전공과 이전 알바 경력들이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 내가 해냈다는 사실에 기뻤다.
내 첫 클라이언트는 소규모 스타트업이었다. 이제 막 사업을 시작하는 스타트업과 이제 막 첫 외주를 시작한 프리랜서의 조합이라니. 혼돈 그 자체인 조합이다. 회사 쪽에서는 제대로 된 요구를 할 줄 몰랐고, 작업자는 요청사항을 어디까지 수용하고,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경험이 부족했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 무리한 요구를 하는 클라이언트라는 카카오톡 이모티콘을 아시는 분들이 있을까? 클라이언트의 요구사항에 대한 밈을 모아 만든 것 같은 이모티콘인데 예를 들면 ‘화려하면서 심플하게’, ‘내일 아침까지 퀄리티 있게’와 같은 대사들이 있는 이모티콘이다. 농담인 줄 알았는데 첫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동안 해당 이모티콘에 있는 내용 중 2~3개를 제외한 모든 대사를 실제로 들어보았다.
지금 돌아보면 프로젝트 진행 과정에서의 사연들이 웃기기도, 슬프기도 하고 언젠가는 마주했어야 하는 일들인데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는 게 이럴 때 쓰는 말일까 싶다.
무엇이든 첫인상이 중요하다고 했던가, 첫 프로젝트의 기억이 이후 내가 작업을 하는 데 있어서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쳤다. 아래는 내가 첫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배운 것들이다.
1. 디자이너의 기획력이 프로젝트에 미치는 영향
담당자의 기획 능력에 상관없이 디자이너가 기획력을 갖추면 많은 장점이 있다. 기획력이 뛰어난 담당자를 만난 경우에 생산적인 토론을 할 수 있고, 기획력이 다소 부족한 담당자를 만난 다하더라도 본인의 기획력으로 프로젝트를 성공적, 주도적으로 끌고 갈 수 있다. 반대로 작업자의 기획력이 부족한 경우, 아트웍 자체는 뛰어날 수 있지만 목적에 맞는 디자인을 하기에는 어려울 수 있다.
외주 작업을 하다 보면 알게 되는 다소 충격적인 사실이 있는데, 생각보다 해당 매체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이 기획자인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대기업, 공공기관, 스타트업, 창작 프로젝트 등등 다양한 규모, 업종의 회사들과 여러 종류의 작업들을 진행했는데, 매체에 대해 이해도가 있는 기획자가 담당자였던 경우는 정말 이상하리만치 적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신이 기획력을 바탕으로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다면 몸값이 높아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2.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나의 임무
1번과 연결되는 내용이며 작업자의 마음가짐에 관한 문제이다. 외주 작업자의 가장 큰 임무는 아마 요청받은 일을 제대로 해내는 것일 것이다. 하지만 매체에 대한 이해도가 낮은 담당자들은 모순된 요청을 너무도 쉽게 한다. 모든 요구사항을 수용하다 보면 결과는 이도저도 아니게 된다. 열심히 일을 했는데도 결론적으로 나쁜 피드백을 받을 수도 있다. 그것만큼 억울한 경우도 없을 것이다.
모순된 요청을 반복하는 담당자들은 대체로 본인들에게 결정 권한이 없거나 본인도 뭘 원하는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모든 내용을 듣기만 하면서 욕하지 말고, 문제의 본질을 간파할 수 있는 질문을 해야 한다.
문제의 본질을 찾고 본인이 담당한 파트에서 그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당신의 임무다. 단, 이 과정에서 월권은 절대로 삼가야 한다. 담당자와 신뢰를 쌓아 커뮤니케이션을 원활하게 하는 것도 작업자의 능력이다.
3. 나를 지킬 수 있는 것은 나
프리랜서는 법적 책임에 굉장히 민감해야 한다. 특히나 저작권에 있어서는 매우 예민해야 한다. 어떤 애셋이나 폰트를 디자인에 사용했는 데 사용 범위에 어긋나 법적 분쟁이 생길 수 있다.
보통 계약서에 작업자가 작업을 하면서 사용한 애셋들에 의해 법적 분쟁이 생기면 작업자가 책임지도록 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따라서 모든 애셋이나 폰트 등을 사용할 때는 반드시 사용 범위를 확인해야 한다.
또한 내 작업에 대한 권리도 잘 찾아야 한다. 계약된 금액이 제대로 입금되었는지, 작업물이 이외의 용도로 사용되지 않는지, 작업을 하면서 약속되지 않은 무한 수정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등등 본인의 책임과 권리를 스스로 잘 챙겨야 하는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 프리랜싱의 핵심 내용들을 첫 프로젝트에서부터 배울 수 있었는지! 한숨과 눈물의 지난 날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