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 없어요2
귀국을 딱 열흘 남겨 둔 주말. 타오 씨와 함께 봉사활동을 가기로 했다. 서른 명의 베트남 봉사자들과도 함께 한다. 파견 전 봉사활동 계획안에 ‘기관 사람들, 지역 주민들, 단원들과 함께 봉사활동하고 싶다’고 적었었는데 그 모든 게 이루어졌다. 다낭에 ‘효행’이라고 하는 베트남 민간 봉사 단체가 있어 정기적으로 봉사활동을 한다고 했다. 타오 씨 덕분에 처음 알았다.
이번에는 꽝응아이라는 베트남 산간 지역에 방문한다. 후원금을 전달하고 250인분의 학용품과 간식을 선물하고 돌아오는 일정이다. 타오 씨에게 무엇을 준비할까 물어보니 갈아입을 옷과 세면도구만 챙겨 오라고 한다. 회비도 없고 아이들 줄 물건도 안 산 게 이상하여 재차 물으니 이미 단체 사람들이 필요한 물품을 다 구비해두었단다. 반신반의하면서도 나는 이 활동의 주 멤버가 아니기 때문에 잠자코 따랐다.
봉사활동을 떠나는 당일. 타오 씨 집 앞에서 만나 택시를 타고 집합 장소로 모였다. 웬 식당에서 모였는데 여기 주인이 이 단체의 리더라고 했다. 열 명 남짓 들어갈 만한, 규모가 크지 않은 식당이었다. 부랴부랴 아침을 먹고 준비된 차에 올랐다. 승합차 두 대에 짐을 실은 트럭이 한 대. 나름 대규모 이동이었다. 내 앞자리에 앉은 분이 통기타를 잡고 그에 맞춰 목청 좋은 어느 분이 노래를 시작했다. 이십분 넘게 열창하는 어르신과 애써 환호하는 청년들. 귀여운 소란이 즐거웠다.
9시 반에 출발해서 점심 먹을 때 말곤 쉬지도 않았는데 오후 4시에 도착했다. 시골이라 그런지 도중에 길을 헤매기도 했고 엉뚱한 곳으로 갔다가 돌아 나오기도 했다. 마을 초등학교에 진을 치고 트럭에 실은 물품을 줄지어 날랐다. 티셔츠, 슬리퍼, 책가방, 모자, 라면, 우유, 구충제, 볼펜, 공책, 샴푸, 간식거리,…. 그 다음엔 아이들에게 줄 선물을 학년별로 포장했다. 치수를 확인하고 박스를 뜯고 봉지를 묶어 대는 일의 연속. 눈이며 손목이며 빠질 것 같고 사방에서 쏟아지는 베트남어에 어안이 벙벙하다.
평소 같으면 잔뜩 늘어져 있었을 저녁 시간에 땀을 줄줄 흘리며 움직이다 보니 언뜻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페루의 집짓기 봉사활동, 태국 비전 트립, 꽝찌 아이들과의 만남. 내 삶의 방향을 수정하고 가치관을 변화시킨 일련의 경험들. 각기 다른 나라에서 다른 시기에 경험한 것인데도 죽 연결되어 생각나는 것이 기이하다. 그리고 노동요 같은 수다를 떨어대는 베트남 사람들은 가히 존경할 만하다. 저렇게 말할 힘이 어디나 나오나 싶을 만큼 대화를 쉬지 않는다. 이들의 지치지 않는 힘은 웃음에서 나오는 걸까 아니면 그 웃음을 만들어 내는 대화 속에 있는 걸까. 덩달아 나도 기쁜 마음으로 일할 수 있었다.
‘베트남이 얼마나 성장할까’ 묻는 사람들에게 나는 누누이 베트남인의 저력에 대해 얘기해 왔다. ‘내 일, 내 책임’이다 싶을 땐 어떻게든 완수한다. 시간이 없으면 밤을 새워서라도 끝마치고 문제가 생기면 지연, 혈연을 총동원해 방법을 찾아내는 게 베트남 사람들이다. 그리고 협동심. 이 많은 인원이 착착 일을 진행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다시금 감탄했다. 타인을 위해 헌신할 줄 아는 사람들. 이렇게 멋진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감사하다.
선물 포장과 뒷정리까지 마치고 나니 어느덧 깜깜한 밤이 되었다. 젊은이들이 포장을 마무리하는 동안 어른들은 밖에 저녁상을 차리고 캠프파이어를 준비해 두셨다. 뜨끈한 쌀국수를 먹고 나서 저녁 잔치를 시작했다. 하나둘 동네 아이들이 모이더니 주민들도 여럿 나와서 구경했다. 캠프파이어용으로 세워 놓은 목재에 불이 붙자 모두들 환호성을 지른다.
통기타 반주로 춤판이 시작되었다. 꼬리잡기하듯 앞사람 허리를 붙잡고 줄지어 춤추는 모습이 어찌나 귀엽던지. 봉사자들이 한 명씩 나와 노래하기도 하고 구경 중인 아이들을 불러내 노래를 시킨 뒤 상품을 주기도 했다. 내게도 노래하라는 제의가 들어왔다. 지난 우기에 베트남을 강타했던 ‘엠 가이 므어(비 여동생)’를 선곡했다.
그런데 아뿔싸! 이 유명한 노래를 반주자가 모르는 것이었다. 주변에서 서둘러 악보를 보여 드리고 설명하니 쿵짝 쿵짝. 서정적인 발라드가 트롯트로 변주되어 나왔다. 어쩔 수 없이 그 박자에 맞춰 부르는데 엉성한 노래였음에도 불구하고 다들 환호해 주었다. 간주 중간 중간 ‘사랑해!’같은 응원구를 넣어 소리치는 통에 아이돌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순간의 용기가 선사한 선물 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한바탕 잔치가 끝난 뒤 마을 주민들은 남자 어른 몇몇만 남고 슬슬 돌아갔다. 그리고 거나한 2차가 시작되었다. 어른들은 자러 들어가고 낮에 힘 꽤나 썼던 남자 청년들 중심으로 자리가 만들어졌다. 오토바이로 맥주와 얼음 궤짝을 실어 나르고, 동네 주민들이 고기와 안주 몇 가지를 준비해주셨다. 그 바로 옆에서는 맥주 대신 통기타 운율에 취해 노래판이 벌어졌다.
기타 소리가 좋아 한참을 앉아 있다가 뒤늦게 씻으러 갔다. 얼음처럼 차가운 물로 몸을 벅벅 문지르고 얼른 수건으로 물기를 훔쳤다. 추워서 더는 못 하겠다. 이불 없이 맨 바닥에 돗자리만 깔고 잤다. 침낭이라도 챙겨올 걸 그랬나 싶었지만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자는 덕에 춥지는 않았다.
알람소리를 듣고 일어나 밖에 나갔다. 부지런한 사람들은 이미 활동이 한참이었다. 5시에 일어나자고 해서 5시에 일어난 건데 그 많은 샌드위치는 언제 준비한 건지 모르겠다. 일찌감치 구경 온 아이들에게 우유와 샌드위치를 주며 손톱을 깎아 주었다. 봉사자들 중에 미용사도 있었던 건지 머리를 잘라 주기도 했다. 아침밥을 미끼로 위생과 미용을 챙겨주는 아이디어가 좋다. 한쪽에서는 봉사자들 먹을 라면 물을 끓이고 있었다. 어제 새벽까지 놀던 청년들도 씻고 활동할 준비를 했다. 대체 누가 베트남 사람더러 게으르다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
어른들이 아이들을 챙기는 동안 우리는 옷 꾸러미를 날랐다. 어디선가 헌 옷도 엄청나게 모아왔다. 주민들이 필요한 것을 챙겨 갈 수 있도록 옷가지를 정리하고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누어주었다. 워낙 아침 일찍 시작한 활동이라 9시도 안 되어 끝났다. 뒷정리를 하고 떠나는데 승합차에서 돈을 걷기 시작했다. 뭔가 싶어 타오 씨를 바라보니 우리 몫은 이미 냈단다. 그러면 그렇지! 이렇게 규모가 큰 봉사활동에 회비가 없을 리 없었다. 억지로 쥐어 줘도 안 받을 것을 알기에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점심을 샀다.
마음이 가뿐하다. 이번 여정. 귀국 전 마지막 유람으로는 여행보다 더 적합했던 것 같다.
뒤늦은 고백이지만 나는 파견 한 달 만에 슬럼프가 왔다. 코이카 단원들의 주된 고민은 나름대로 잘 사는 것처럼 보이는 환경에서 우리의 역할이 무엇이냐 하는 것일 게다. 교육원에서부터 익히 들어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결국 인력이 아니라 돈이 필요했던 거구나 싶을 때도 있다.
코이카에 대해 잘 알지도 못 하면서 일단 신청하고 보는, 지원금만 바라고 단원을 요청하여 파견된 단원에게 일거리도 주지 않는, 자존심 강해 아쉬운 소리하기 싫어하면서도 바라는 건 많은, 지원금에 고마워하기는커녕 액수가 적다며 코웃음 치는, 뭐 하나 더 해주기만 바라고 스스로 투자할 생각은 개미 오줌만큼도 없는, 자력으로 충분히 운영 가능하면서도 ‘공짜’라는 이유로 계속 단원을 요청하는, 단원에게 강의와 온갖 잡무를 떠맡기곤 투잡 쓰리잡을 뛰는, …. 그런 기관, 그런 사람들.
열거하자면 끝이 없다. 거저 주니 습관처럼 거저 받으려고만 하는 사람들만 생겨난다. 오히려 우리 같은 사람들이 현지의 자생력을 약화시키는 것 아닌가 하는 회의감이 든다. 외국인이자 외부인인 우리가 애쓰는 동안 우리보다 더 부유한 현지 사람들은 이웃에게 요만큼의 관심도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지금 내가 여기서 뭐 하나 싶고 오지 말 걸 그랬다 하는 생각이 든다. 슬럼프의 원인이다.
우리나라에서 불우 이웃을 돕는 사람들 대다수는 서민이라고 한다. 이 단체의 일원 역시 부자가 아니라 주변에서 만나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누군가는 대학생, 누구는 택시 기사, 내일이면 아침부터 시장에 나가 일할 사람들. 돈 많고 시간 많아 이런 일 하는 게 아니라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일하다가 짬 내어 봉사하는 것이다.
이번 봉사활동의 회비는 30만동(15000원). 베트남 물가를 생각했을 때 적은 금액은 아니다. 제 돈 주고 봉사하는 기특한 사람들. 고맙고 뭉클했다. 어제 오늘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을 보며 베트남에 희망이 있다면 이 사람들이겠구나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