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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eadreads Apr 01. 2020

나는 엄마를 사랑했을까

출국 전 날 엄마와의 마지막

#1 인도로 출국하기 전날, 나는 엄마를 데리고 한강이 보이는 강변의 카페에 갔다. 엄마는 언젠가 나와 러닝을 하다가 오른쪽에 보이는 그 건물을 가리키며 저기 보이는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면 좋겠다고 얘기한 적이 있었다. 후기를 찾아보니 그 레스토랑의 별점은 형편없었고, 대신 같은 건물에 카페가 자리하고 있었다. 출국이 얼마 안 남았지만 그때의 엄마가 했던 얘기가 떠올라 볼 일이 있는 엄마를 붙잡고 잠시만 커피를 마시고 가라고 했다. 우리는 집에서 빠른 걸음으로 걸어서 카페에 도착했다. 이미 오후 5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사실은 해 질 녘을 같이 보고 싶어 일부러 늦게 출발을 한 것이었다. 


 카페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 지나 모두가 바쁜 연초라서 그런가. 하지만 내게는 아직 연말과 크리스마스가 곧 다가올 것 같다는 느낌이 아직도 남아있었다. 엄마와 나는 서로 바빴지만 이게 올해 우리의 마지막 데이트가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랬기에 별 말없이 주문을 했다. 이제는 내가 산다고 말을 하지 않아도 꽤나 자연스럽게 엄마의 메뉴를 결제해주곤 했다. 나는 그럴 때마다 나 자신이 자랑스러웠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괜히 유세 떠는 자식이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리에 앉아서 이야기를 하다가 음료가 나왔다. 나는 딸기라떼를 엄마는 카페라떼를 시켰다. 나는 24살이나 되었는데도 여전히 커피가 싫었다. 나는 엄마와 카페를 갈 때마다 커피 맛이 괜찮은지 묻는 습관이 있었다. 엄마는 커피 맛이 괜찮다고 했다. 그럴 때마다 엄마의 커피를 한 모금씩 홀짝홀짝 뺏어마셨다. 여전히 이 커피가 도대체 뭐가 맛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이제는 커피를 끊어야 한다고 하루에 두 잔씩 커피를 마시는 엄마에게 어김없이 잔소리를 할 뿐이었다. 



 얼마 전 인도 여행을 다니며 필요할 것 같아서 구매한 카메라를 시험 삼아 사용해보려고 카페에도 가져왔다. 고요한 카페에 내 카메라의 셔터 소리가 들렸다. 나는 엄마에게 사진이 괜찮게 나온다고 얘기하며 서강대교와 밤섬을 찍어댔다. 그러다가 엄마는 나의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했다. 화보를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사진을 이렇게 못 찍어도 되나 할 정도로 각도는 엉망이었고, 뒤에서 비치는 햇살이 제대로 망쳐놓은 사진이었다. 그냥 웃어넘기면 될 것을 사진을 왜 이렇게 찍었냐고 엄마를 타박했다. 전문 사진가도 아니고, 디지털 기기에 익숙하지 않은 엄마라는 것을 잘 알았지만 그것을 온전히 이해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나였다. 나는 출국 전 한국에서의 마지막 날까지 엄마의 미운점을 찾아냈다. 내가 떠나야 하는 이유를 주변에서 찾아 그것의 당위를 부여하고 있었다. 


 2019년의 하반기는 아주 바쁜 시간이었다. 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한 것은 아니지만 열심히 책을 읽었고, 또 열심히 돈을 벌고 열심히 돌아다녔다. 하지만 몇 개월간 주중과 주말을 희생해가며 그렇게 일을 해본 적이 없던 나는 분명 학생 때의 나와는 달랐다. 나는 더 이상 부모님께 용돈을 바라지 않았다. 나의 용돈은 내가 벌 수 있었고 나는 이제 그들에게 용돈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큰돈은 아니었지만, 집에서 돈을 벌 수 있는 세대의 교체가 일어났다. 나뿐만 아니라 오빠도 일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직 졸업도 안 한 신세이지만, 이제는 내가 돈을 많이 버는 게 솔직히 빠르겠다고 생각했다. 아직 정말로 자리를 잡기에는 두려움이 있지만, 어서 돈을 벌어 그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표면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았겠지만 돈에서 나오는 여유로움이 있으니, 나의 소비 패턴과 생활 패턴도 달라졌다. 가족과 부모님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일도 줄어들었다. 이제는 내가 그들보다 잘하는 게 많아졌다. 힘든 일이 있어도 굳이 자세하게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 친구들에게 이야기하거나 혼자서 참아 넘겼다. 오빠와 내가 좋아하는 고기를 사 오고, 집에 필요한 물건들을 내 돈으로 배송을 시키는 일이 잦아졌다. 그리고 이제 그들이 나에게 맛있는 것을 사주지 않는다 해도 서운함이 줄어들었다. 대신 내가 돈을 벌고 쓰는 기쁨이 늘었고, 책임감 같은 것이 생겼다. 그러면서 이제야 조금씩 그들에게 진 빚을 갚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게 어른이 되는 건가, 조금씩 내가 혼자 할 수 있는 것들과 버티는 것이 늘어난 다는 것. 더 이상 누군가에게 말하지 않고 감정과 생각들을 혼자 삼켜내는 것들이 그랬다. 학교를 다니지 않으니 사람들과 약속을 잡지 않으면 만나는 것이 힘들어졌는데, 그래서 더욱 혼자가 익숙해지고 편해졌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출국을 앞두고는 엄청 많은 사람들을 만나야 했다. 매일매일 오래전부터 잡혀있던 약속에 나가느라 집에 붙어 있는 날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심지어 짐을 싸는 것도 미루면서 사람들을 만났다. 가족들이 모두 일하느라 바쁜 탓도 있었다. 그래서 출국 전 날 엄마와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내게 있어서는 의미 있는 활동이자 마지막 용기였다. 



 나는 자라오면서 내가 살고 있는 나라와 이 집을 떠나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다. 외국에 나가서 정착할 것이고, 외국에 나가서 일을 하고 싶다는 식의 이야기를 자주 했다. 물론 엄마는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서운해했고, 나는 엄마가 서운해할 거란 것을 알면서도 이야길 했다. 


 언젠가는 캐나다로 가서 선생님을 하면서 살 것이라고 얘기했더니, 엄마는 자기도 데려가라고 했다. 이전에는 외국에 간다면 무작정 말리더니, 집요하게 외국에 살겠다고 말해온 내게 드디어 깃발을 들어주는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엄마가 진정으로 캐나다에 가고 싶어서 그 말을 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엄마는 그저 언제나 나와 함께 있고 싶을 뿐이라는 것을 넌지시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당시에는 돈을 많이 벌어 당신의 집과 차를 사주겠다고 이야기했다. 엄마와 같은 집에서 살 생각은 전혀 없다는 것을 에둘러 말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결혼을 안 한다면 엄마와 평생 같이 살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나는 엄마와 함께 살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나, 엄마가 없으면 어떻게 살까라고 생각했다. 


 나는 엄마가 해주는 요리가 좋다. 세상에서 생선조림을 가장 맛있게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엄마가 만드는 김치찌개는 어떤가, 돼지고기를 넣고 할머니가 담근 김치로 만든 김치찌개는 일주일 내내 먹어도 질리지가 않는다. 고기를 별로 안 좋아하는 엄마지만, 나와 오빠를 위해 고기를 사 와서 먹을 때면 배가 가득 찼다고 말해도 엄마는 나에게 고기를 더 내민다. 우리는 맛있다고 식탁 앞에서 먹고 있으면 엄마는 조용히 일어나 남은 고기를 더 구워서 가져다준다. 그러면서 고기를 먹을 때는 채소를 꼭 먹어야 한다고 내가 싫어하는 쓴 채소에 쌈을 싸 먹으라고 강조한다. 나는 그러면 채소를 입안에 욱여넣으며 고기는 따로 먹고, 엄마는 그런 나를 보며 어이없다는 듯이 웃는다. 나는 엄마의 요리를 좋아하지만 엄마만이 요리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은 가끔 서글프게 한다. 명절 같은 때에는 왜 집안 남자들은 손에 물 하나 안 묻히는지 버럭버럭 따지다가 집을 나가버린 적도 있고, 할아버지와 싸우다가 눈물을 뚝뚝 흘린 적이 있다. 그러면 엄마는 그러지 말라며 나를 다그치지만, 그것이 내가 엄마를 위해 싸울 수 있는 전부라는 사실은 그녀는 모를 것이다. 나는 이제 지난한 결혼생활과 이런 고리타분한 유교 문화에서 벗어나야 한다며 엄마를 교육한다. 이름하여 신여성 교육이다. 지난 몇십 년을 아내와 엄마로 살았다면, 이제는 그 노릇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당신의 인생을 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우리에게 퍼주는 것을 그치지 않고 나는 아기새처럼 먹이를 받아먹는 것을 그치지 못했다. 예전에는 집이 싫어서 떠났다면, 이제는 엄마에게 미안해지지 않으려고 떠났다. 나는 더 이상 엄마에게 집안일을 시키기 싫어서, 엄마가 내게 엄마 노릇을 하는 게 싫어서. 그리고 싫은 것을 멀리하는 것이 우리 모두를 지키는 것이라고 믿어서, 그렇게 나 혼자 살아남으려고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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