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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eadreads May 04. 2020

캐나다에서 선생님이 하고 싶어

해외 교사 도전기 | 나는 안 될 거라던 사람들에게



"캐나다 교원 자격증 전환에 관심 있는 학우들은 과사무실 방문 바랍니다."



'캐나다에서 선생님을 할 수 있다고? 이거 완전 나를 위한 공지 같은데?'

나는 그날 학교를 가는 날이 아니었음에도 부리나케 학과 사무실로 달려가 조교 선생님을 찾았다.

"조교님, 캐나다에서 선생님 하는 거.. 어떻게 하는 거예요?"


조교선생님은 내가 다니는 학과를 졸업하고 나서, 캐나다 토론토의 한 대학교에서 2년을 더 공부하면 캐나다에서 선생님을 할 수 있는 자격을 주는 프로그램을 개발 중이라는 얘기를 전해주었다. 조교선생님의 말을 듣자마자 '이거다'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내 모호하던 꿈이. 그리고 정해지지 않고 있던 미래가 그려지던 순간이었다.



 스물한 살의 여름, 네팔의 한 학교에서 교육 봉사를 시작한 이후 매년 여름 방학마다 외국의 학교들을 찾았다. 남들이 계절학기를 들을 동안 학점과 졸업을 뒤로하고 한 두 달씩 외국에 살면서 컴퓨터를 가르치는 봉사들을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경험이 많아지고 학년이 올라갈수록 한국에서 선생님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사라짐과 동시에 오히려 외국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은 마음이 샘솟았다.

 외국의 학교에서는 조금 더 자유로운 수업 방식과 수평적인 수업 분위기를 유지할 수 있는 데에 반해 한국의 결과 지향적 수업이나 그 방식들이 나와 맞지 않은 탓이었다. 청소년기부터 구조 자체에 문제를 제기하던 나는 도무지 한국 교육의 방향성에 적응하기 어려웠다. 그나마 비슷한 지향점을 가진 대안학교에 가는 것도 생각해보았지만 그런다고 내가 완전히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배우는 과정 속에서도 모두가 즐길 수 있다고 믿었고 배움 자체가 행복한 교육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한국의 고질적인 문제인 결과 중심의 교육과 대학 입시를 위한 교육들은 당분간 바뀌기 힘들 거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당장 혼자의 힘으로 고칠 수 없는 거라면 이미 완성된 곳을 찾아, 혹은 변화될 가능성이 있는 곳을 찾아가기로 했다. 내가 느끼기에도 나는 외국에 있을 때 더 행복하고 자유로워지는 사람이었다. 특히 개도국의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건 단순 보람을 넘어 적성에도 맞는 것 같았다.

 

 네팔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당시, 나는 코딩과 함께 영화 수업을 진행했다. 그중 '영화 수업'은 내가 오랫동안 준비하고 실현되길 바라 온 수업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한국에선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주제였다. 그러나 네팔에서는 학생과 선생님 할 것 없이 모두가 이 수업을 반겨주었다. 교육과정과 다르다고 제지를 당한다거나 항의가 들어온 적도 없었다.

 첫 영화 제작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엄청난 흥미를 보이면서 자발적으로 영화 촬영 위해 연습을 하고, 필요한 물품들을 준비하며 흔한 말다툼 한 번 없이 단편 영화들을 뚝딱 찍어낼 수 있었다. 다른 선생님들도 영화 수업에 대해 관심을 보이며 학생들을 응원했다. 어린 학생들이 가진 잠재력에 놀라면서도 이처럼 모두가 수업을 즐기면서 함께 성장할 수 있다는 사실이 가장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당시 같이 봉사활동을 하며 나의 수업을 지켜본 친오빠는, 한국에서 몇십 년을 봐왔지만 이렇게 행복한 표정을 짓는 모습은 처음 본다는 말을 할 정도였다. 나는 이에 동의했다. 내가 바라던 수업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기회는 둘도 없는 경험이었고 그 과정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었다.

 느낄 수 있는 최대치의 행복을 경험하고 나니 이른 나이었음에도 이 길에 대한 확신이 생겼다. 그리고 어떤 일을 할 때 가장 행복한 지 알면서도 굳이 불행이 뻔히 보이는 길에 뛰어드는 어리석은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영어도 완벽하지 않고 컴퓨터 실력도 출중하지 않은 나를 외국에서 아무런 이유 없이 컴퓨터 선생님으로 채용하기는 만무했다. 코이카 봉사활동이 아니고서야 외국에서 정식으로 교사로서 채용될 방법이 있을까. 영어를 무진장 잘하면서도 컴퓨터의 박사가 된다고 해도 가능성은 희박해보였지만 그래도 희망의 끈을 놓고 싶지는 않았다. '언젠가는 꼭 외국에서 선생님을 하고, 돈을 많이 벌어 도서관을 지어야지.' 이것이 내가 설정한 꿈과 목표였다.


 대학교 1학년 겨울, 캐나다에서 선생님을 할 수 있다는 단비 같은 소식을 듣게 된 날부터 내 꿈은 줄곧 캐나다에서 선생님을 하는 것이었지만 사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무엇부터 준비를 해야 할지도 몰랐다.

 꿈과 목표가 정해졌음에도 그 방법에 있어선 불확실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내가 다니던 대학교에서는 외국에서 선생님을 하는 사람은커녕, 외국에 나가는 사람조차 잘 없었기에 조언을 구할 사람도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걸 스스로 알아보고 부딪혀야 했다. 프로그램이 개발 중이라는 것외에 아무런 정보도 없었기에 나는 또 다른 기회가 찾아오기까지 묵묵히 기다리며 준비해야 했다.


 다짜고짜 캐나다에서 교사를 하겠다는 말에 당연히 처음에는 나를 믿는 사람도, 지지해주는 사람도 없었다. 심지어 내 가족과 부모님조차 헛된 꿈이라고 여기며 나의 이른 포기를 종용했다. 부모님은 내가 해외에서 자리 잡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들은 내가 빠른 시일 내에 임용고시를 합격하고 좋은 남자와 결혼해서 한국에 안정적으로 자리잡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말 같지도 않은 캐나다 교사라니. 그리고 심지어 외국에서의 수입 없는 대학원 생활이라니. 그들의 성에 찰리 없었다. 하지만 그 외에도 많은 지인들과 사람들은 내 꿈이 실현 가능하다고 생각하거나 지지해주지 않았다.


 토종 한국인인 내가 영어의 본토인 땅에서 교사를 한다는 말도 분명 말이 안 되게 들렸을 것 같기는 하다. 그래도 나를 조건 없이 응원해주어야 할 사람들에게까지 꿈이 외면받는다는 사실은 마음이 아팠다. 캐나다에서 선생님을 하겠다는 일이 그렇게 허무맹랑한 일인가? 내가 당장 연고도 없는 나라에서 사업을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내 전공을 살려서 그저 외국에서 정착하고 싶다는 것뿐이었다. 아니면 내가 그렇게 많이 부족한 것이었을까?

 어릴 땐 다들 멋지고 이상적인 꿈을 꾸길 원하더니, 막상 어른이 되니 그런 꿈들은 다 사치라고 여기는 사람들뿐이라는 게 조금 실망스러운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현실적인 꿈이 과연 꿈인 걸까. 꿈은 원래 달성하기 어려워야 꿈인 것이고, 꾸지 못 할 꿈이란 건 내게 없었다. 나는 한치의 의심도 없이 캐나다에서의 미래를 꿈꾸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날 믿어주지 않는다면 적어도 내 자신은 날 믿어주어야 했다. 그리고 내가 걷는 이 길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는 스스로 그 가능성을 증명해야 했다.


 일단은 영어가 시급했다. 10년을 넘게 공부를 한 영어였지만 읽고 쓰는 영어와 말하는 영어는 너무나도 달랐다. 게다가 선생님은 학생을 가르치는 주체로서 누구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설명할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한국어로도 수업하는 게 어려웠던 내게 당장 영어로 수업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건 아니었다. 영어가 깊은 대화로 이어지는 순간 말문이 턱 막히고 문법은 엉망진창이 되기 일쑤였던 내가 다른 나라도 아니고 캐나다를 선택했다. 이는 이미 많은 시련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렇지만 해외 생활과 수업에 기본이 되는 영어를 적어도 말하는 데에 있어서는 완벽해져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영어 실력을 올리기 위해서 내가 선택한 방법은 사람들과 부딪히는 것이었다. 비공개 SNS 계정의 팔로워 수가 20명이 채 안 될 정도로 내향적이던 나는 그 해 핀란드로 교환학생을 떠나며 교환학생들 중 가장 많은 친구들을 사귀고 오겠다고 다짐했다. 막무가내 정신을 장착한 나는 완벽하지 않은 영어로 낯선 사람들에게 먼저 말을 걸기 시작했고 갈 수 있는 사교 행사와 파티란 파티는 모두 참석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처음엔 술기운이 조금 필요했지만 수단이 술이라면 또 어떤가. 간은 조금 망가졌어도 학기가 끝날 때쯤엔 시작할 때의 다짐 그대로 누구보다 많은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고, 말하는 것이 제일 어렵던 나는 이제 영어로 대화를 시작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비단 술만 필요했던 건 아니었다. 타고난 성격과 성향을 바꾸기 위한 숱한 노력들도 있었다.


 꿈이 천성을 이기는지 나는 교환학생으로 간 핀란드에서 한 학기에 10개가 넘는 강의를 신청했다. 게다가 시내에 있는 다른 대학교까지 통학을 하며 교육학 강의를 들었으며, 교환학생들은 가입이 어려운 현지 동아리와 학부 길드까지 가입했다. 이를 통해 각양각색의 전공을 가진 외국인 친구들을 사귀며 자연스럽게 그 나라의 교육과 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친구들과 점심을 먹는 동안에도 프랑스의 바칼로레아, 독일의 무상교육 그리고 핀란드의 교육제도에 대한 경험과 가치관을 여과 없이 나누며 외국의 교육 문화와 제도에 대해서도 알아갈 수 있었다.

 또한 대학원을 통해 교사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는 다른 국가의 학생들은 오로지 교육만을 보고 핀란드 대학원에 진학하기도 했다. 영국 출신의 한 친구는 공과대학을 다니면서 수학 교사를 준비하고 있었고 그 외에도 전 세계의 예비 교사, 현직 교사들이 핀란드에서 교육을 공부하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웠던 외국 출신 교사들이 실존한다는 것을 직접 확인하고 나니 내 꿈 또한 전혀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해외에서 교사를 준비하는 스페인, 체코, 미국과 콜롬비아 출신의 친구들과 함께 공부한 경험은 내가 가진 외국인 교사라는 꿈에 대해 더 힘을 실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마냥 멀어 보이고 와 닿지 않는 꿈을 위해 누군가는 오늘도 도전하고 있다는 사실이 위안과 동시에 내게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이듬해 겨울, 캐나다 교사 자격증 전환을 위한 설명회가 서울 교대에서 진행된다는 소식에 참석을 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설명회가 진행되는 강당에는 최소 천 명은 되어 보이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이렇게나 다들 한국을 탈출하고 싶었던 걸까. 정말 많은 현직 교사들이 캐나다 교원 자격에 대해서 궁금해하며 굉장히 열정적으로 그 방법에 대해 문의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 같은 대학생들은 손에 꼽을 만큼 없었다. 이상했다. 꿈이 다양해야 하는 건, 그리고 무모해야 하는 건 언제나 진로를 바꿀 수 있는 대학생들이 아닌가? 한국에서 교사를 하던 사람들이 이제 와서 캐나다로 이직을 하고 싶어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라는 의아한 심정도 들었다.


 설명회에서는 캐나다 교사 자격 전환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과 답변이 이어졌다. 프로그램을 통해 비자 문제와 교생 실습을 해결할 수 있고, 1년 간은 구직활동을 서포트해준다는 내용이었다. 프로그램 안에는 전공 공부와 함께 영어 공부와 캐나다 교육 시스템에 대한 이해를 돕는 과목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말은 그럴듯하지만 쉽게 보이거나 쉽게 도전할 수 있는 프로그램은 결코 아니었다.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캐나다에서 뽑아 줄 이유도 없을지언정, 솔직히 말하자면 기초 회화조차 완벽하지 않은 사람들이 교사로 인정받기란 힘들었다. 당연히 어느 정도 이상의 영어 점수가 필요했고, 2년간의 철저한 실습과 교육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이어야 했다.


 가장 큰 문제는 한국의 학교 출신 교사가 캐나다로 이직하거나 처음부터 임용이 된 선례는 잘 없다는 것이었다. 보통 캐나다에서 근무하는 한인 교사들은 원래부터 영어를 잘하던 이민자 가정 출신 혹은 캐나다에서 대학을 나온 유학생 출신이 전부였다. 이런 프로그램의 시행도 처음인 관계로 한국에서 순전히 실력을 인정받아 이직하거나 취업에 성공한 사례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또한 한국의 교육과 캐나다의 교육 방식은 너무나 달랐다. 대학교마저 강의식 수업이 대부분인 우리나라와 달리, 캐나다에서는 모든 수업에 토론이 필수였다. 당연하지만 대학 수업에서 마저도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어야 했다. 희망을 갖고 온 많은 사람들이 좌절한 대목이었다.


 다시 집에 가서 설명회에서 들은 얘기들을 가족들에게 했다. 캐나다 교사의 연봉을 궁금해했던 친오빠를 제외하고는 가족의 그 누구도 내가 캐나다에 가겠다는 말을 들은 척마저 하지 않았다. 그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도 가보지 못 한 길을 무모하게 도전한다는 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 주체가 게으른 나라는 것도.

 나를 믿지 못할 이유는 충분했지만 그렇다고 나 자신부터 쉽게 이 꿈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도전도 하기 전에 지레 겁먹고 두려워하기보다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보기로 했다. 설명회를 통해 그래도 가닥을 잡은 나는 나는 목표를 세웠다. 영어 공부와 컴퓨터 공부를 열심히 할 것. 내 입에 내가 풀 칠을 할 수 있을 만큼 혹은 그 이상의 돈을 벌 것. 그렇게 오랜만의 복학과 올해 있을 교생 실습에 대한 계획들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3학년이 되면서 가장 큰 골칫거리는 교생실습이었다. 학교를 2년이나 다녔는데도 머릿속엔 남은 게 없는 것 같았다. 어느 학교를 가야 하는지, 어느 과목을 가르쳐야 하는지에 대한 감도 전혀 없었다. 봄이 새 학기의 시작을 알리던 3월에는 온갖 환영회와 모임, 동아리, 공모전과 과제가 날 기다리고 있었고, 빠듯한 일정에 치이는 삶을 살며 교생에 대한 계획도 흐려져 가고 있었다. 그렇게 정신없는 초봄 무렵의 어느 날, 나는 운명 같은 공지를 발견하게 된다.


 올해 국내에서 처음으로 캐나다에서의 교생 실습을 추진 중이며, 해외 교사를 지망하는 학생들을 선발한다는 소식이었다. 이건 하늘이 내린 계시 같았다. 내가 가지 않으면 누가 외국에 교사를 하러 간단 말인가. 곧바로 며칠 밤을 새워가며 자기소개서를 작성하고 면접을 준비했다. 밀린 시험공부와 과제 등은 더 이상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캐나다에서 교육 실습을 할 수 있는 이 기회를 꼭 잡아야만 했다.

 

그렇게 5월에 있을 캐나다 교생실습에 지원했고 서류전형과 최종 면접 끝에 선발되어 그해 나는 캐나다로 교생 실습을 떠났다.


 '캐나다에서 선생님이 하고 싶어.' 

 캐나다 행의 꿈을 키운 지 자그마치 2년 만에 나는 캐나다에서 정규 학기 중 교생 실습을 한 첫 교생 선생님이 될 수 있었다. 모든 게 우연이었지만 결코 우연 같지 않았다. 누구도 믿지 않았고 모두가 안 될 거라던 내 꿈을 나는 믿었기에 그 기회에 한 발짝 다가갈 수 있었다. 캐나다에서의 교생 실습은 내 간절한 바람이 현실이 되던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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