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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eadreads Apr 29. 2020

집에 있는데도 집에 가고 싶은 인도

한국을, 내 집을 다시 사랑하다

우울한가요?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외롭냐고요? 그런 것 같아요.



 '한국이 싫어서'라는 장강명 작가의 책이 너무 재밌어 세 번이나 읽었다. 책의 제목을 봤을 때부터 너무 끌리던 책과 그의 제목은 내 생각과 정확히 일치했다. 한국이 싫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한국이라는 나라를, 내 조국을 나는 오랫동안 싫어했다.

한국이 좋다는 사람마저 싫었다. 한국을 싫어하는 사람들만이 나의 얘기를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이에는 여러 가지 이유를 꼽을 수 있었지만 우선 학교와 한국의 교육이 싫었다. 학창 시절은 내게 꽤 괴로운 시간들이었다. 이런 환경에서 살아가고 싶지 않았다. 대학에 와서도 별반 달라진 건 없었다. 수업은 더럽게 재미가 없었고 교수님의 강의법도 달라진 게 없었다. 원하는 수업을 들을 수 있다면서 정해진 과목들을 들어야 했고 지루한 암기식 강의에 교육학을 전공하면서도 공부에 대한 의욕과 동기 부여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내가 만약 가정이나 공동체를 꾸리게 된다면 좋은 교육을 다음 세대에 물려주고 싶었다.


 또한 여자라고 차별받는 환경이 싫었다. 나의 엄마는 명문대학의 석사까지 나오고 자식 두 명을 키우느라 그녀의 꿈을 포기해야 했다. 내가 태어남으로 인해 의도치 않게 그녀의 발목을 잡은 것이었다. 그렇다고 엄마가 일을 한다고 해서 좋은 근무환경에서 일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엄마는 나름의 구직활동을 하고 회사를 다녔지만 육아와 일을 병행하는 경력단절 출신 엄마의 회사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기업에는 유리천장이 존재했고, 결혼과 육아 등으로 고통받는 일은 흔하디 흔한 일이었다.

 일을 좋아하는 내가 그런 인생을 살아야 한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또한 명절에는 리모컨 채널을 돌리는 것 외에는 손을 까딱 않는 이들의 게으름도 싫었다. 물론 나는 일하는 남자들을 존중했지만, 일에 목을 매고 가정을 뒷전으로 두는 사람들이 못 미더웠다. 이외에도 정치나 사회면의 뉴스를 보고 있자면 화가 치밀어 올랐다. 세상에 정의롭지 못한 게 너무 많았고 반성하고 달라지지 않는 어른들이 미웠다. 그리고 내가 싫어하는 이 모든 걸 만들어준 우리나라, 우리 사회, 내가 처한 환경이 다 싫었다.


 그래서 나는 떠나야만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언제나 집을 탈출하던 꿈을 꾸던 사람이었다. 해외에 살고 해외에 정착하는 게 유일한 목표였다. 물론 내가 꿈꾸던 완벽한 나라가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한국보다 나은면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끊임없이 움직였다. 방학만 되면 봉사를 한다는 명목 하에 한 두 달씩 해외에 거주할 수 있었고, 대학교 2학년 때에는 핀란드 교환학생에, 3학년 때는 캐나다 교육실습을 통해 꾸역꾸역 외국에 나갔다. 틈만 나면 외국 여행은 필수였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숨을 쉴 수 없었다. 이 답답한 사회에서, 인터넷 뉴스만 봐도 신경질이 나고 화가 나는 세상에서 벗어나야만 했다. 그렇게 가끔씩 숨통을 틀 수 있는 게 내가 살아가는 이유였다. 해외에 가는 것은 내겐 너무 당연했다. 해외에서 취직을 하고 정착을 해야겠다고 굳게 다짐하며 살아왔고 그런 내게 해외 생활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그렇게 해외 취업을 찾아 인턴으로 취직했다. 인도란, 내가 일 년 혹은 그 이상을 꿈꿔왔던 나라였다. 대학교 1학년, 우연히 동기 오빠로부터 인도 여행 경험담을 들은 그 날부터, 인도의 판공초를 여행하겠다고 마음먹었던 작년까지. 나는 남들에게 개도국에서 사는 것이 내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이야기하고 다녔다. 운 좋게도 나는 꽤 이른 나이에 그 궁극적인 목표를 달성해나가고 있었다. 원하던 회사에 취업을 했고, 바라던 나라에서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주말엔 종종 여행을 떠날 수 있었고 퇴근 후에도 좋은 사람들을 만나며 시간을 보냈다. 나름대로 만족할만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내가 생각한 삶과는 조금 거리가 있었지만 풍족한 대로 행복했고, 바쁜 대로 재밌었다. 인도에 도착하고 첫 세 달 동안은 매일 일기를 쓰느라 친오빠가 선물해준 하늘색 스타벅스 다이어리는 작은 글자들로 빼곡히 채워졌다. 현실을 잠시 벗어나니 목표들이, 하고 싶은 것들이 계속 늘어났다. 골프를 배우고, 요가를 배우고, 수영과 드럼을 배워야지. 집에선 영어 공부를 하고 회사에선 자동차 공부를 해야지. 욕심으로 치부되기엔 나는 모든 것에 진심이었다. 당시엔 배우고 싶은 열망이 가득했다. 미숙하지만 낯선 곳에서 무언가를 배워나가는 과정이 그렇게 즐거울 수 없었다.


 출근을 준비하던 평범한 월요일 전날 밤, 갑자기 회사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내일 출근 안 하셔도 됩니다." 아니. 코로나로 상황이 심각해진 건 알겠는데, 그래도 그렇지 너무 갑작스러운 통보였다. 나는 당시 친구와 랜선 술자리를 가지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인도에서 공부를 하다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마지막 비행기를 탄 친구였다. 그가 공항 라운지에서 술을 마실 동안 나는 집에서 보드카와 맥주를 홀짝이며 내일도 출근을 해야 하는 내 신세를 한탄하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날라온 그 기분 좋은 통보로 인해 나는 기쁜 마음으로 밤새도록 술을 마셨고 거기에 늦잠까지 잘 수 있었다.  


 며칠간은 회사를 안 갈 수 있다는 사실이 짜릿했다. 잠이 많던 나에게는 조금 이른 출근 시간이라 항상 6시 반 내지는 7시에 일어나던 생활이 꽤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이제는 늦잠을 자도 나에게 뭐라 하는 사람이 없었고 마침 업무에 힘이 겨울 때라 휴식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도 다행이었다. 하지만 먹을 게 문제였다. 이사를 한지 일주일도 안 된 터라 집에는 먹을게 떨어져 가고 있었다. 인도는 차량을 통제했고, 우리가 탈 수 있는 유일한 교통수단인 우버 마저 운행을 중단했다.

 처음으로 걸어서 밖에 나갔다. 나는 내가 사는 이 도시에선 오분 거리도 결코 걸어본 적이 없었지만 살기 위해선 걸어야 했다. 마침 차와 사람들이 잘 안 다녔기에 길이 험하긴 했어도 걸어 다니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근처에 작은 슈퍼마켓이 다행히 영업을 하고 있었다. 수박과 우유 같은 음식들을 몇 개 사서 돌아왔다. 음식 조달을 걱정했지만 아파트 공동 구매를 통해 가끔 계란과 빵을 살 수 있었고 아파트에 있는 야채가게도 격일로 문을 열었다. 갑자기 안 하던 요리를 시작해 본의 아니게 집에서 삼시 세 끼를 찍고 있는 나였으나 이 또한 순탄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집에서 할 수 있는 일도 찾아보면 꽤나 많은 것 같았다. 컴퓨터로 못 보던 영화와 드라마를 볼 수 있었고, 바빠서 못 하고 있던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묵혀둔 영상들을 짜깁기해서 유튜브에 올리기도 했고, 공항에서 산 영어 원서를 드디어 꺼내 읽었다. 그렇게 내 할 일들을 하고 매 끼마다 밥을 열심히 해 먹으면 하루가 잘 갔다. 첫 이주일 정도는 말이다.


 인도는 락다운을 그로부터 3주를 더 연장했다. 슈퍼는 문을 닫았고, 배달은 되지 않았다. 중요 관공서와 병원, 약국 등을 제외하고 모든 시설과 회사들이 폐쇄되었다. 3월부터 모든 항공기의 이착륙을 금지했던 공항은 모두 폐쇄되어 국내선까지 중단되고 말았다. 더 이상 한국의 포털사이트에서 인도에 대한 뉴스를 찾는 게 어렵지 않았다. 뉴델리에서는 집으로 가기 위한 노동자들이 몰려들었다는 소식과 걸어서 고향으로 돌아가다가 열사병으로 사망한 사람의 소식도 들려왔다. 한국에 있는 지인들에게서 점점 인도의 상황을 걱정하는 연락이 많아졌다. 누군가는 인터넷에서 웃음거리로 넘기는 인도 경찰의 모습은 여기서는 현실이었다. 집 밖으로 나가면 머지않아 볼 수 있는 경찰들의 모습이었고, 차가 없고 수입을 잃은 가난한 사람들은 거리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한국에 다시 돌아갈 방법이 끊겼다는 것과 언제 이 공포가 끝날지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에 나는 점점 인도에서의 생활이 '인도에서 살아남기'처럼 느껴졌다. 3월 말이면 끝날 줄 알았던 락다운은 4월 말까지 연장되었고, 상황이 심해지자 인도의 모디 총리는 5월 초까지 락다운을 연장했다. 이제는 재택근무를 7월 말까지 연장한다는 소식도 들려오기 시작했다. '언젠간 끝나겠지', '다시 퇴근 후 자주 가던 펍에서 맥주 한 잔을 할 수 있겠지'라는 생각들이 이제는 현실과 괴리감 있게 들렸다.

 조금씩 집에 갇힌 나는 기약 없는 기다림이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칩거 생활은 답답함을 넘어 사람을 힘들게 했다. 아파트 내에서 산책을 할 수도 없었고, 당연히 아파트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이웃 주민들은 서로를 경계하며 엘리베이터의 버튼마저 열쇠 키로 눌러댔다. 모든 교통편이 폐쇄된 마당에 만날 수 있는 친구는 당연히 없었고, 그마저 친한 사람들도 공항이 폐쇄되기 직전 모두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고 없었다. 미국과 독일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간 친구들이 부러워졌다. 그로부터 얼마 안 되어 같은 아파트에 살던 한국인 주민들도 전세기를 타고 한국에 돌아갔다. 언젠간 상황이 진정될 거라고 생각한 안일했던 나 자신을 원망하고 있었다.


 나는 집에 박혀 있는 게 더 이상 휴식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차라리 아침에 일찍 일어나 피곤해도 회사에서 일을 하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밥을 먹고,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와서 배달음식을 시켜먹던 때로 돌아가고 싶었다. 꽤나 생산적인 일들을 이어가고는 있으나 사회성은 증발하고 없었으며 대화 상대가 없어 혼잣말도 많아진 상태였다. 차라리 밀린 업무에 짜증을 내는 게 이 무료함보다는 훨씬 나을 것 같았다.

 

 매일 똑같은 일상과 침대에서 22시간을 보내는 하루는 이제는 싫증이 났다. 침대와 하나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보다 나갈 수 없다는 것, 걸을 수 없다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웠다. 이대로 가면 우울증에 걸리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나마 말을 할 사람이 주로 한국에 있는 친구들이었기에 나는 자주 한국의 소식을 들었다. 그들은 몇 가지를 빼면 그런대로 괜찮은 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매일 기사를 확인하며 한국은 방역도 잘하고 확진자의 치료도 원활히 이루어지고 있으니 마음이 놓였지만, 이제는 내가. 내가 살고 있는 인도가 걱정이었다.


 빠르게 확진자가 늘고 있고 의료 인프라마저 부족한 인도는 가장 강력한 조치를 하고 있었다. 이 수많은 인구를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이 모든 락다운이라는 것에는 동의를 했지만 한국의 소식을 매일 듣고 보는 내가 견디기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외출을 하고, 마스크를 구매하고, 사람들과 접촉할 수 있다는 게 정말 다른 나라가 아니라, 다른 세상의 이야기 같았다. 말하자면 한국은 전 세계의 유토피아가 된 느낌이었다. 빠르게 안정화가 된 한국에서는 사람들이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물론 예전과 비교했을 때는 더 조심스러워졌을 테지만 인도나 여타 나라와 비교했을 때 한국은 천국이었다. 세상에, 이 시국에 저런 나라가 존재하다니. 그게 내 조국이라는 사실이 웃길 뿐이었다.


 인도에서 나는 외국인 근로자였다. 현지 방송을 볼 수 없고, 현지 사람들과 원활히 소통할 수 없었다. 커뮤니티에도 외국인인 나는 온전히 같은 인격체로서 끼기 힘들었고, 어딜 가나 그들의 사회에선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동양인(동북아시아) 여자였다. 특히 인도에서 20대의 동양 여자인을 찾기는 힘들었다. 공항을 여러 번 방문했어도 나와 같은 외국인을 찾아보는 건 쉽지 않았고, 매번 나를 신기하게 쳐다보는 시선도 낯설지 않았다. 하지만 여행을 다니는 것과 실제로 이 사회에서 생활한다는 것은 달랐다. 그들은 나를 이방인과 외국인 그 사이 어디쯤이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인도에서 정착을 해가고 있으며 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는 힌디어나 텔레구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외국인으로서, 당연히 여기엔 내가 맘 놓고 고민을 털어놓을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마저 친했던 친구들은 본국으로 귀국한 뒤라, 내게 남은 건 인도인 친구 한 명뿐이었는데 그마저 봉쇄가 되어 오래 못 본 탓에 서서히 사이가 소원해졌다. 그는 가끔 내게 락다운 연장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긴 했지만 그다지 생활에 도움이 된 것은 아니었다. 한국은 어떤 봉쇄도 이루어지지 않고 모두가 일상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에게 알려주니, 그는 믿지 않는 눈치였다.


 사람, 사람이 필요했다. 무료하고 지난한 한 달간 내게 필요했던 건 진실한 소통과 대화였다.


 머리 아픈 영어를 쓰지 않아도 내 감정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

 떡볶이를 같이 먹으러 가고 한강에서 느긋하게 산책을 할 수 있는 사람.

 내 푸념을 들어주고 웃어주는 친구들과 가족이 필요했다.

 나는 내가 그토록 싫어했던 내 조국이 처음으로 그립기 시작했다.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내 머리 속에 떠다니는 듯 했다. 사람들은 돌아갈 수 없는 내게 돌아오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나는 집이 그리웠다. 대학생활의 반절을 해외에서 보내고 한 번도 집을 돌아본 적 없던 내가, 한국에 있던 집과 가족을 처음으로 그리워하고 있었다.


 나는 외국을 동경했지만 혼자만의 외국 생활은 사람을 외롭게 만들었다. 인도를 아꼈지만 그리고 지금도 좋아하지만 인도는 어디까지나 내게 외국이었다. 내게 온전한 휴식이 될 수 없는 나만 홀로 남겨진 외국이었다.

인도에서 분명히 좋은 아파트와 안락한 집에 살고 있음에도 이는 내 영원한 거처가 아닐 것임을 알아서였을까. 나는 진한 향수병을 앓기 시작했다. 한국이 제일 좋은 나라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꼰대라고 생각하던 나는 그 꼰대가 되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한국에선 모두가 밖을 돌아다니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사람들은 말을 하지 않아도 예절과 규칙을 지키고 거리를 두며 생활하는 모습이 그저 신기했다. 인스타그램을 보면 항상 한국 친구들은 음식 사진이나 밖에서 마스크를 끼고 찍은 사진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사람들은 이전처럼 술을 마시고, 카페를 가고, 외식을 하고 있었다. '부럽다.' 나는 한국 사회를 어느덧 동경하고 있었다.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나라는 이제는 외국이 아니라 한국이었다.


 집이 그리웠다. 아주아주 집에 가고 싶었다. 나는 매일 집에 있으면서도 집을 가고 싶었다. 사람들이 그리웠다. 편하게 내 모국어를 쓸 수 있다는 사실. 내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웃고 떠들 수 있는 날들. 평범한 일상을 영위할 수 있는 사회. 이 모든 게 내겐 잡을 수 없는 꿈만 같았다.


 외국에서 마냥 개고생을 한 것도 아니고, 락다운에 은둔 생활을 하는 것도 내가 유일한 사람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나는 한국이라는 나라가 너무 보고 싶었다. 한 때, 한국을 싫어했지만 이토록 한국이 자랑스러운적이 없었다. 초창기에 내가 동양인이라고 차별을 당하던 때에도 나는 한국인이라서 부끄러운 적이 없었다. 한국 사회는 언젠가 이 위기를 누구보다 빠르게 극복해 낼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한창 시끄럽고 정신없는 와중에도 무사히 총선을 치러낼 수 있는 건강한 사회가 되었다는 것. 사람들을 알아서 배려하고 존중하며 조심할 줄 아는 사회가 되어간다는 것도. 모든 사람들의 눈물겨운 노력 덕에 위기를 함께 이겨내고 더 성숙한 사회로 나아가고 있음이 대견하고 뿌듯했다. 한국은 정말로 좋은 나라였음을, 우리 집이 행복한 집이었음을 깨닫고 또 깨닫는다.

 한국을 언제 다시 갈 수 있는지, 이제 누구도 알지 못하고 예측할 수 없게 되었다. 5-6월 달에 예정되었던 나의 휴가도 무기한 연기되었으며 그토록 보고 싶던 친구와 가족의 얼굴도 언제 볼 수 있을지 미지수다. 그럼에도 나는 인도에서 그들에 대한 사랑을 키워나간다. 더불어 조국에 대한 사랑까지도. 나는 이제, 이제와서야 애국자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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