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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님 Apr 11. 2024

사랑니를 뽑다

더는 방치하지 않기로 했다

 사랑니 4개 중 3개가 남아있다. 그중 왼쪽 아래에 있는 사랑니가 매복 상태인데 피곤하거나 면역이 떨어질 때마다 자꾸 붓고 아프다. 문제가 있는 걸 알지만 치과에 가는 게 너무 무섭고 싫어서 방치하고 있었다. 문제가 있는 사랑니를 방치한다는 건 문제가 있는 내 삶을 방치하는 것과 같았다. 그만큼 어떤 문제나 아픔에서 나는 무조건 숨고 외면하고 회피만 하고 있었다.


육아휴직을 하고 나를 돌보기 시작하면서 방치하고 있던 문제들을 조금씩 해결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가 사랑니 뽑기다. 숙제 같았던 사랑니를 뽑기 위해 떨리는 마음으로 치과에 갔다. 사진을 찍어보니 남은 사랑니 3개는 뿌리가 징그럽게 내려앉아 기존 내 치아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의사 선생님은 다 뽑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가장 문제가 있는 사랑니와 그 위에 있는 사랑니 두 개를 한 번에 발치하기로 했다. 발치하는 날짜를 미리 예약하고 남은 시간 동안 휴직의 여유를 즐기면서도 누군가를 만나면 사랑니를 뽑았냐면서 묻고 다녔다. 그리고 결국 두려운 발치 날짜는 다가왔다. 무서워서 덜덜 떨고 있는 나에게 의사는 사랑니는 마취할 때가 가장 아프다며 안심시켜 주시고 마취를 했다. 뻐근하고 따끔한 게 아프긴 했지만 참을만했다. 마취 후 힘을 몇 번 주더니 한쪽 위아래 사랑니가 뽑혔다. 의사 선생님은 발치 후에 고름도 고 뽑길 정말 잘했다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나는 큰 숙제를 하나 해결했다. 이날 사랑니 뽑는 것보다 스케일링이 더 아팠다. 그렇게 앓던 사랑니가 빠지니 어찌나 속이 시원하던지.... 물론 한 달간 뚫린 곳에 음식물이 끼기도 해서 불편하긴 했지만 더 이상 그쪽이 붓고 아픈 일은 없으니 너무 홀가분했다.


그리고 반대쪽에 남은 사랑니 하나.. 이건 애초에 아프지도 않았기에 더 이상 치과에 가기 싫어 따로 예약을 잡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왜 인지 아무렇지 않았던 남은 사랑니 하나가 또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마지막 숙제처럼.... 다시 일하기 전에 꼭 뽑아버려야 할 것 같았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더는 문제 있는 무언가를 방치하고 싶지 않았다. 마침 사랑니를 발치한 지 6개월이 흘러 치과에서 정기 검진 문자가 왔다. 마지막 사랑니를 뽑아야 할 때가 왔다. 그렇게 치과에 갔는데 의사 선생님이 오늘 바로 뽑아줄 수 있다고 하신다.


역시 쫄보인 나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되었다고 핑계를 대며 한 달 후에 발치 날짜를 예약했다. 한 달 후라니.. 내가 봐도 진짜 겁쟁이에 못났다. 역시나 한 달이란 시간은 금방 다가왔다. 그냥 한 달 전에 뽑았을걸.... 후회가 들었다. 그리고 당일이 되어 마지막 사랑니를 발치하기 위해 다시 치과에 갔다. 역시나 마취를 하고 이번에는 마취 주사는 안 아팠는데... 뿌리가 깊고 신경과 닿아있어서 뽑는데 시간이 꽤 걸렸다. 갈고 쪼개고 흔들고... 턱이 뽑히는 것 같은 느낌인데 시간이 흘러도 뽑히지는 않고 무서워서 혼났다. 속으로 간절히 기도를 하면서 제발 이 시간이 끝나길 바라고 바랬다. 그렇게 나의 마지막 사랑니도 무사히 뽑았다.




나는 이제 사랑니가 없는 사람이 되었다. 두려움을 피하고만 싶어서 문제가 있는 걸 알지만 방치하고 있던 내가 용기를 내서 방치하던 걸 뽑아버렸다. 사랑니 발치.... 이게 뭐라고 어쩜 이렇게 속이 시원하고 자존감이 올라가는지.. 치과에서 두려움에 속으로 벌벌 떨면서 사랑니가 빨리 뽑히기만 간절히 바라던 시간...  이 시간만 지나면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그 감정을 오래도록 기억해야겠다. 이제 내 앞에 점점 다가오는 취업을 위한 시간.. 그리고 이직하는 회사에서 또 마주하게 될 어색함과 적응의 시간 역시 두렵고 겁이 나지만 그 시간은 곧 내 앞에 다가올 테고 나는 해내야만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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