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느곰씨 오만가치 Jul 10. 2024

인간 노동에 대한 가치 변화

알쓸신잡 보고 생각하며

  인간에게 '일'이라는 것은 애증의 무언가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일은 고된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으로 존재를 확인하기 때문이다. 개인주의가 만연하더라도 공동체에 대한 기여와 그에 대한 영향력은 사회를 이루고 사는 인간에게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불로소득'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는 것 같다. 부에 대한 부러움은 있지만 노동을 하지 않고 얻는 것에 대해 비난하고 싶은 감정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자신에게 혜택이 돌아오는 '기본 소득'에 대해서도 거부감을 가지기도 한다.


  인류 문명은 인간의 노동에 의해 발전되어 왔다. 그 속에서 노동의 가치는 인간의 머릿속에 본능처럼 박혀 버린 게 아닐까 싶다. '일하지 않은 자, 먹지도 말라'라는 말이 있듯 우리의 DNA는 일에 대한 그런 기재가 존재하는 듯하다.


  문제는 앞으로도 노동의 가치는 신성할까?라는 질문을 할 수밖에 없다. 로봇과 AI가 급속도로 밀려드는 사회에 일의 의미는 분명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AI가 인간의 지식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될 때, 인간의 일자리가 점점 줄어들었을 때 마침내 수입이 사라졌을 때 인간에게는 어떤 선택지가 있나를 고민해야 한다. 그때도 기계들은 엄청난 양의 물건들을 생산해 내고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를 대체할 뭔가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분명 그럴 것이다. 돈의 흐름은 자본주의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가 되면 누가 소비하게 될까? 기계에게 소비라는 개념은 없을 것이다. 소비가 사라지면 자본주의는 무너지게 될 것이다. 인간이 생산에 더 이상 기여할 수 없을 때도 우리는 노동의 신성함을 내려놓아야 할 것이다. 일하지 않은 자는 먹지도 말라는 것이 아니라, 생산된 것을 소비하는 소비자로서의 역할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소비를 위해 그저 주어지는 소득 그것은 또 다른 의미의 '기본 소득'이 될 것이다.


  정치, 사회학적으로 말하는 기본 소득은 많이 들어 봤지만 과학자가 말하는 기본 소득의 신선함에 놀랐다. 앞으로의 세상은 더 심한 양극화로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많은 마트와 편의점은 사라지고 Amazon CEO와 캐셔만 남을 거라는 우스갯소리가 농담처럼 들리지 않는다. 기계나 AI의 세상까지 갈 필요도 없다. 양극화가 심해지면 소비해 줄 주체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 돈이 돌기 위해 소비가 필요하다. 그래서 많은 유럽 국가들이 기본 소득을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복지를 넘어 자본주의의 수명을 늘리기 위한 개선된 자본주의라고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노동의 종말>을 읽고 나면 내 생각이 바뀔까? 궁금해진다.

매거진의 이전글 자기 계발서는 잘 읽지 않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