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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구미 | 구미의 확실한 색깔들

구미 <박정희기념관><삼일문고>








구미에서 직장을 다니는 한 동생이 말했다. "구미엔 공단밖에 없어요." 그 말이 귓가에 오래 남았다. 반신반의하며 도착한 구미의 첫인상은, 예상과 다르지 않았다. 도시를 감싼 건 온통 회색빛 공단지구. 탁한 연기와 묵직한 구조물들 사이로 사람과 시간의 그림자가 스며든다. 문득, 정말 구미는 그것뿐일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하지만 이 도시는 이내 또 다른 얼굴로 다가왔다. 구미는 마음을 다잡게 만드는 도시였다. 단순한 여행지가 아니라, 한국 현대사의 특정한 결이 굵고 선명하게 박힌 공간. 발걸음을 옮기기 전부터 나는 조심스러워졌다. 말의 무게를 고민하고, 시선의 방향을 다듬었다. 여긴 그저 지나치는 곳이 아니라, 하나의 역사와 이념 안으로 들어서는 입구 같았다.


도시에 들어서니 그 기운은 더 또렷해졌다. 박정희대로, 새마을로, 새마을운동기념관. 도로명 하나하나가 선언 같았다. 이 도시는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지 않았다. 과거의 기억을 ‘기념’이라 부르며, 그것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자부심은 생생했다. 누군가에겐 부흥의 기억, 누군가에겐 통제의 상처. 그 상반된 감정이 동시에 떠오르는 곳. 그래서 구미에서는 눈에 보이는 것만 보아서는 안 된다. 모든 표면 아래엔, 말 없는 문장이 하나씩 흐르고 있었다.


구미를 여행한다는 것은 곧 시대를 되짚는 일이다. 찬성과 반대, 영광과 그림자, 진보와 회귀. 단정할 수 없는 층위들이 교차하는 곳. 그 복잡한 결을 인정하는 순간, 비로소 구미는 하나의 살아 있는 텍스트가 된다.


나는 오래전부터 구미보다는, 이 서점을 만나기 위해 이 도시를 찾고 싶었다. <삼일문고>. 책을 파는 가게라기보다는, 이 지역을 일으키는 지식의 장, 삶의 숨결을 나누는 쉼터 같은 곳이다. 이 서점은 구미에서 사라졌던 ‘책 중심의 공간’을 되살린 일종의 문화 복원이었다. “서점 하나 없는 도시에 살고 싶지 않았다”는 삼일문고 대표의 다짐에서 시작된 이 공간은, 이제 구미 시민 누구에게나 하나의 마음의 거점이 되었다.

붉은 벽돌 외관과 참나무로 만든 서가, 구석에 숨듯 놓인 강연실과 향기로운 커피 향이 흐르는 북카페 ‘비블리오’. 책장 사이로 흐르는 공기는 따뜻했고, 그 온기는 사람을 감동시켰다. 대형 서점이지만, 이곳은 서울의 교보문고와는 달랐다. 이곳은 사람을 먼저 생각한 구조였다. 다정하게 말을 거는 공간, 조용히 사유를 권하는 공간이었다.


지하의 ‘종이약국’은 이 서점의 마음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사람들의 사연을 받아, 그에 어울리는 책을 봉투에 담아 ‘처방’해주는 이 작은 코너는, 말보다 책이 더 따뜻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500개가 넘는 사연과 그에 따라 쌓여온 책들. 때론 비슷한 아픔이 겹쳐지고, 때론 전혀 다른 이야기가 맞닿기도 한다. 책이 사람을 꿰매고 다독이는 방식. 삼일문고는 그 언어를 알고 있었다.

서점 곳곳은 ‘읽기의 발견’을 돕는 장치로 가득하다. ‘MBTI별 추천책’, ‘생일책’, ‘명사가 사랑한 200권’ 같은 큐레이션은 책이 단순한 물건이 아닌, 삶의 위안이자 동반자임을 일깨운다. 특히 ‘생일책’은 한 사람의 시간이, 한 권의 문학과 맞닿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생일과 책이 만나 탄생하는 작은 우연들. 그것은 어쩌면 축제보다 더 섬세한 감정의 교환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금리단길’로 향했다. 서울로 떠나기 전, 구미의 맛으로 마무리하고 싶었다. 낡은 골목에 젊은 감각이 깃든 거리. 경리단길을 닮은 이름 안에는 구미의 감성과 가능성이 얹혀 있었다.

<배키우동>은 마치 교토의 조용한 골목에 들어선 듯한 착각을 불러왔다. 목조건물 특유의 나뭇결 냄새와 다찌석, 조용히 흐르는 주방의 칼질 소리. 붓가케우동을 시켰다. 쫄깃한 족타면 위로 감칠맛 나는 소고기 토핑이 얹어지고, 작은 병에 담긴 차가운 쯔유를 조심스럽게 부었다. 맑고 진한 국물은 더운 날의 피로를 깔끔히 씻어냈고, 바삭한 새우튀김은 그날의 맛을 완성시켰다. 수줍지만 정성스러운 맛이었다. 이곳 또한, 음식이라는 언어로 공간을 기억하게 했다.


구미는 예상보다 단단했고, 예상 이상으로 다정했다. 공단의 회색 너머, 책 한 권과 한 그릇의 우동 안에 그 도시의 마음이 숨어 있었다. 구미는 여전히 무겁고, 조심스럽고, 복잡하다. 하지만 그 안에서 무언가를 계속 피워내고 있었다. 구미를 읽는다는 건, 결국 시간을 읽는 일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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