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일본 오사카 | 서서 마시는 저녁의 조용한 위로

오사카 덴가차야 <야나야 立呑み処 やなや>











숙소가 있는 덴가차야 역에 도착했다. 시간은 오후 네 시였다. 조금 이른 시간이지만, 가볍게 혼술이라도 해야 했다. 덴가차야 역 주변은 작은 선술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동네다. 우리나라로 치면 2호선 신대방역 앞 풍경과도 비슷하다. 늘 그랬듯, 나는 역과 가장 가까운, 골목 초입의 가게는 그냥 지나친다. 시장에서도 게이트 바로 앞 가게는 왠지 모르게 그냥 흘려보내게 되듯이, 너무 ‘정면’에 있는 집은 어쩐지 피하게 된다.


어제도 눈여겨보았던 한 가게 앞을 지나며 잠시 멈췄다. 어제는 내부가 사람들로 가득해 시끄럽고, 담배연기마저 자욱해 선뜻 들어가지 못했는데, 오늘은 오후 네 시라 그런지 안에 손님이 많지 않았다. 전부 비어 있으면 직원들의 시선이 나에게만 꽂힐까 봐 들어가기 망설여지는데, 지금 보니 두 명 손님이 서서 마시고 있었다. 이 정도라면 나 혼자 술잔을 기울이기에 딱 좋을 것 같았다. 작은 용기를 내어 비닐 차양 아래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이 바로 <야나야 立呑み処 やなや>였다. 덴가차야 역 개찰구를 나와 골목으로 한 발 비틀면, 붉은 초롱이 주르르 달린 작은 비닐 차양이 먼저 시선을 낚아챈다. 간판의 검은 글씨는 오래된 필름 영화의 자막처럼 허공에 걸려, 이곳이 꽤 오랜 시간 동네 술꾼들의 저녁을 받아주어 왔음을 조용히 암시한다. 이곳은 전형적인 ‘타치노미’, 서서 마시는 입식 선술집이다. 의자는 없다. 발바닥에 전해지는 피로를 대신해, 사람들의 목소리와 잔 부딪히는 소리가 자리를 채운다. 직원 말로는 오후 두 시쯤 문을 열어, 밤 열두 시, 길면 새벽 한 시까지 영업을 한다고 했다. 자리에 앉을 일이 없으니 자리비도, 서비스료도 없다. 벽에는 손글씨 메뉴가 빼곡히 붙어 있고, 하루의 추천 안주는 하얀 보드 위에 단정히 적혀 있다. 대부분의 안주는 200엔에서 비싸야 500엔 언저리. 병맥주 한 병과 안주 서너 접시를 시켜도 천 엔 한 장으로 ‘센베로’를 즐길 수 있다. 철판구이나 대병 맥주 같은 비교적 비싼 메뉴도 400~500엔대에 머무른다. 누구나 부담 없이 들어와 한 잔 걸치고, 가볍게 취한 채로 다시 각자의 밤으로 돌아갈 수 있는 구조다.


바 앞에 선 나에게 직원분은 한국어가 병기된 메뉴판을 내밀었다. 관광객의 서툰 일본어를 굳이 시험하지 않게 해주는, 작은 배려였다. 메뉴판 한쪽에는 ‘한국 일품’이라는 카테고리가 따로 있었다. 천엽, 김치, 창란젓, 콩나물, 족발 같은 이름들이 줄줄이 적혀 있었다. 낯익은 단어들 사이로 오사카의 공기가 흘러 들어와 묘한 조합을 이루고 있었다. 나는 늘 그렇듯 생맥주부터 먼저 주문했다. 잔에 부어지는 맥주의 거품 소리는 낮게 일렁이는 위로 같았다. 야키토리 몇 점과 소고기 철판구이도 함께 부탁했다. 어제 이 앞을 지날 때만 해도 가게 안은 담배 연기로 자욱했는데, 오늘은 손님이 많지 않아 공기가 맑았다. 여전히 재떨이가 테이블에 비치되어 있는 모습이 낯설다. 그 덕분에 술맛도 조금 더 온전히 느껴지는 듯했다.


안주가 하나씩 눈앞에 놓였다. 옆 자리 손님이 접시 위에 빨간 이치미를 ‘톡’ 뿌리는 모습이 보이자, 나도 무심히 따라 했다. 붉은 가루가 안주 위에 가볍게 내려앉는 순간, 하루 동안 마음에 쌓였던 사소한 실수 혹은 아쉬움이 해소되었다. 어쩌면 여행지의 술이 주는 가장 큰 위안은 바로 그런 종류의 가벼움일 것이다.

문득, 이 작은 선술집에서 일본의 타치노미 문화를 떠올린다. 타치노미는 의자 하나 없는 좁은 공간에서 피어오르는, 아주 작은 온기의 형식이다. 서서 마신다는 단순한 행위 뒤에는, 바쁜 일상에서 잠시 어깨의 무게를 내려놓고 서로의 숨결을 가까이 나누고자 하는 욕구가 숨어 있다. 사람들은 작은 잔을 맞부딪히며 하루의 먼지를 털어내고, 기름 냄새와 된장 향이 뒤섞인 공기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마음의 주름을 펴 내려간다. 카운터에 팔꿈치를 올리는 순간, 세상은 내 눈높이로 조용히 내려앉는다. 타치노미는 그렇게 오래 머물지 않는 정류장 같다. 잠깐 서 있었다가는 금세 떠나야 하지만, 그곳에서 머물렀던 밤만은 묘하게 오래 가슴속에 남는다. 서서 마신 술 한 잔이 허기진 마음을 채우는 방식은, 어쩌면 의자보다 사람을 더 믿는 이 작은 문화의 마법인지도 모른다.





20251018_160738.jpg
20251018_160741.jpg
20251018_160828.jpg
20251018_160935.jpg
20251018_161020.jpg
20251018_161121.jpg
20251018_161153.jpg
20251018_161354.jpg
20251018_161724.jpg
20251018_161902.jpg
20251018_162034.jpg
20251018_162250.jpg
20251018_162358.jpg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경북 칠곡 | 왜관역 앞 카페와 수도원 수제소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