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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눈, 세기말 겨울을 기억하며

용인 <에버랜드 눈썰매장>






오늘, 2025년의 첫눈이 내렸다. 양조장 앞에서 잠시 눈발을 맞고 서 있었다. 그래도 감성이라는 것이 아직 내 안에 남아 있는 걸까. 물론 내일 아침 출근길의 혼잡과 미끄러운 도로가 머릿속을 스치긴 했지만, 이상하게도 현실의 걱정보다는 오래된 기억이 먼저 떠올랐다. 오늘 내린 눈은 1999년 겨울을 데려왔다. 며칠 전, 아는 형에게 전했던 옛날 이야기가 다시 떠오르면서, 나는 어느새 군입대를 앞둔 마지막 겨울 속의 나를 다시 만나고 있었다.


입대를 몇 달 앞두고 있었던 그해 겨울, 나는 이미 학교에서 마음이 떨어져 있었다. 공부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군대 가기 전에 무엇을 해봐야 할까’만 생각하던 시기였다. 그 당시 군대라는 단어는 삶의 큰 분기점처럼 느껴졌고, 복학한 선배들이 공부에 몰두하는 사례는 ‘지금 아니면 못 놀아’라는 기묘한 압박을 주었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지금 잘 놀고, 많이 보고, 많이 겪자고. 성인이 된 뒤 아르바이트를 거의 해본 적 없던 나는 ‘돈을 벌 수 있는 경험’ 자체가 하나의 매력처럼 보였다. 대부분 친구들은 호프집이나 식당, 편의점에 흩어져 갔지만, 나는 조금 더 특별한 체험을 원했다. 그래서 여름에는 에버랜드 캐리비안 베이에서 캐스트로 일했고, 그 기억이 좋아 겨울에는 눈썰매장 리프트 팀에 지원했다.


그 시절의 에버랜드는 단순한 놀이공원이 아니라, 작은 우주 같았다. 삼성 계열사 특유의 매뉴얼과 절차는 우리가 상상하던 '알바'의 범주를 넘어 있었다. 남성은 장신구 금지, 여성은 부착형 귀걸이만 허용, 머리 염색 금지. 지금 들으면 다소 엄격해 보이지만, 당시엔 염색한 가수가 TV에 나오지 못하던 시대였고, 우리는 그 제약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에버랜드는 시급과 복지 면에서 ‘3대 놀이공원’ 중 단연 최고였다. 서울랜드가 2천 원 초중반, 롯데월드가 2천 원 후반대일 때 에버랜드는 시급 3,300원. 전국에서 지원자가 몰렸고, 그 안에서 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특별했다.


두 달간의 캐스트 생활이 시작되자, 나는 매일 양재 정류장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출근했다. 겨울 새벽의 찬 공기 속에서 캐스트 점퍼를 입은 동년배들이 모여 있던 그 풍경은 지금도 또렷하다. 수도권 외 지역 친구들은 기숙사에 살았는데, 월세가 단돈 1만 원이었다. 그래서 퇴근 후엔 용인 전대리 앞 술집에서 놀다가 기숙사 사는 친구 방에 가서 자는 일이 잦았다. 매일같이 함께 먹고, 일하고, 술 마시고, 새벽을 견디다 보니 인간관계는 자연스럽게 서로의 삶 속으로 엉켜 들었다. 몇 년 전 ‘유퀴즈’에서 아마존 익스프레스 직원들이 나와 에버랜드 직종을 ‘동물의 왕국’이라 표현하던 걸 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그래, 그곳은 여전히 ‘야생’일 것이다. 그 말이 나로 하여금 20여 년 전, 눈썰매장 뒤 어두운 길목에서 들리던 웃음소리와 소곤거림까지 되살려 주었다.


내가 속했던 눈썰매장 리프트 팀은 전원이 남성이었고, 절반은 군필, 절반은 미필이었다. 자연스레 ‘포스트 군생활’ 같은 분위기가 형성됐다. 자질구레한 일은 주로 미필자 몫이었고, 대신 형들은 술을 많이 사줬다. 리프트 조종과 썰매 걸기, 비상 시 수동 운전 매뉴얼을 익히며 진짜 설산 구조대라도 된 듯한 기분으로 일했다. 출근하면 가장 먼저 코스를 직접 썰매로 내려오곤 했는데, 이유는 단순했다. 코스를 점검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꼴찌가 초코파이를 사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스피드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 꽤 자주 꼴찌였고, 그때마다 형들의 놀림 섞인 웃음이 따뜻하게 남아 있다. 어느 날은 예비역 형들로부터 “게이트 팀이랑 단체 미팅 좀 잡아봐라”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몇 번의 시도 끝에 단체 미팅이 성사되었다. 그날의 설레는 공기, 서툰 농담, 셔틀버스로 돌아오던 길의 들뜬 분위기는 그 겨울을 상징하는 장면처럼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에버랜드는 밥이 맛있기로도 유명했다. 매일 다른 메뉴가 나오는 직원 식당의 퀄러티는 시급으로 환산되지 않는 또 하나의 복지였다. 눈발이 세차게 부는 날에도 스피커에서 울려퍼지던 GOD의 노래들, 리프트 위에서 서로 손을 비비며 버티던 순간들, 좋아하는 감정이 있었던 여성 캐스트와 스쳤던 시간들, 술잔을 기울이며 “나 군대 가면 편지 쓰냐?” 하고 어설프게 진지해지던 밤들. 그 모든 것이, 입대를 앞둔 불안정한 나를 어느 방향으로든 떠밀어주던 작은 리프트 같았다. 인생이라는 긴 코스에서 잠시 올라타 쉬어가는, 목적지가 명확한 리프트. 손님이 아니라 그 리프트를 움직이는 자리에서 바라본 겨울은, 내 청춘의 한 페이지를 선명하게 만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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