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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드의숲 Apr 08. 2019

인간 재난

우리는 내심 남들에게 호의를 기대하며 산다

                                                                                                                                                                                                                                                                                                                                                        벌건 대낮이었다. 


지하철 안의 사람들은 건성드뭇하게 서 있었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순 없지만 다들 자신이 정해 둔 목적지를 향해 이동하고 있었다.


종로3가역에 다다르니 제법 많은 사람들이 문밖으로 흩어졌고 내린 숫자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다시 열차에 올라탔다.


"출입문 닫겠습니다. 출입문 닫겠습니다."


열차 천장에 달린 스피커에서 방송이 송출되었다. 


언제 들어도 열차 안 스피커 소리는 저질이었다.




그때였다.


"야! 그래도 x발 내가 오늘 나가잤냐! 너네들 보러!"


목에 확성기를 심었는지 열차 안에서 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댔다.


출발 방송이 무색해질 정도였다. 


그뿐인가?


그의 입속에서 시작된 들큼한 술 냄새는 공기 중에 밀려와 내 코를 어지럽혔다. 


입에 착착 달라붙어 쏟아지던 욕설도 그 유명한 래퍼의 랩처럼 내 귀에 꽂혀 들어갔다. 


옷을 말끔히 차려입고 문 앞에 선 그 중년의 신사는 나와는 대각선으로 마주 보며 서 있었다.


그는 비틀대며 통화를 이어갔다.


"내가 인마 오늘 어려운 발걸음 한 거야 이 X끼야! 그것도 모르고 이 놈들이!"


신사가 진상이 되는 순간이었다.




이쯤 되니 지하철 같은 칸을 타고 있던 사람들은 얼굴을 찌푸리기 시작했고 그를 노려보기까지 했다.


그리고 어느새 승객들 사이로 '혐오'라는 역병이 번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속으로 침을 뱉고 혀를 끌끌 찼다


마치 길가에 버려진 배설물을 보는 것 마냥 그를 쳐다보며 지나갔다.


진작에 꽂혀있던 내 귀의 이어폰은 소음을 어떻게든 틀어막으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옆을 돌아봐도 열차의 다른 칸으로 움직일 여유의 공간이 없어 보였다.


독립문을 지나 무악재를 거쳐 녹번역에 다다라도 그는 문 앞의 자리를 지켰다.


모두가 눈으로 그를 밀어내고 있는데도 그는 꿋꿋이 서서 개인 방송을 했다.


그 중년은 한참을 그렇게 떠들다 전화기를 귀에서 내려놓았다.




이제 끝났나 싶었다. 하지만 기우였다. 그는 다시 한번 손에 쥐고 있던 스마트폰으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 오늘 동팔이 왜 안 나왔어? 그 X끼 지난번 모임 때 나한테는 꼭 나오라며 신신당부했었는데 오늘 지가 안 나왔네!"


"이 X새끼 어디 두고 보자!"


열차는 연신내역에 도착했고 많은 사람들을 문밖으로 쏟아냈다. 


여전히 비틀거리며 전화기를 붙잡고 떠드는 그만 어딘가에 걸려 빠져나가지 못하는 것 같았다.


구파발역에 다다를 즈음 그의 음성이 확연히 줄어든 걸 느꼈다. 


그는 내릴 채비를 하고 있었다. 


여전히 누군가와 대화가 오갔지만 어딘지 모르게 그의 목소리에서 슬픔이 솟구쳐 올라왔다.


그리고 그는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마누라가 아파.... 응.... 몰라.... 


야! 친구들하고 오랜만에 기분 좋게 만났는데 무슨 그런 얘길 하냐. 그런 말 할 분위기도 아니었잖냐...


응? 그렇데...


길어야 6개월이란다.... 어떡하겠냐... "




순간 손아귀의 힘이 풀려 잡고 있던 열차의 손잡이를 놓치고 말았다. 


세상에 발가벗겨진 기분이 들었다.


내 안에 움츠려 있던 한 움큼의 인간미 마저 떨어져 나간 듯했다.




고작 30분가량 겪었던 약간의 불편이 너무나 하찮게 느껴졌다.


난 가슴속에서 그에게 엎드리고 또 엎드렸다.


그 누가 당당할 수 있을까 


살아생전 하늘을 보며 부끄럽다 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 정도 즈음의 공공 규범 위반이야 누구나 다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지하철역 밖을 빠져나와 햇살 속에 주저앉아 한동안 가슴이 먹먹해 있었다.




우리는 내심 남들에게 호의를 기대하며 산다.


반면 남의 사정 따위는 잘 알지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언제나 내 처지와 이해관계에만 몰두하며 살아갈 뿐...


뼈가 시리도록 부끄러워 자리에서 쉽사리 일어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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