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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희 Jun 26. 2022

2. 인스타툰은 처음이라

그림 문외한이 인스타툰 도전하기

  


  

  녹음해 놓은 음성 파일을 가지고 첫 영상을 만들 생각에 가슴이 웅장해졌다. 하지만 내 수중에 있는 것이 녹음 파일뿐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금세 가슴이 옹졸해졌다. 영상에 넣을 소리는 있는데 화면으로 쓸 영상 소스가 없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화면이 없는 영상은 영상이라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이대로 만들기를 포기하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화면에 맞는 영상을 촬영을 해보았는데 내 심리적 상태를 묘사하는 영상을 촬영으로 표현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내린 결론은 아이패드에 그림 그리는 것을 녹화해 영상 소스로 쓰는 방법이었다.

프로크리에이터로 그린 그림을 타입랩스로 녹화해 영상 소스로 사용했다.

  이 영상을 보면 누구나 알 수 있겠지만 나는 그림에는 조금의 관계도 없는 사람이다. 간신히 졸라맨을 벗어난 형태의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정도이고 초등학생 때 이후로 자의로 그림을 그려본 기억이 없다. 미술 시간에만 그림을 좀 끄적였던 것 같은데, 그 와중에도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는 미술 시간에 주로 만들기를 했었다. 덕분에 내 생각을 그려 내기가 처음에는 막막했다. 내가 그리고 싶은 것을 구체화시키는 것도 어려운데 종이가 아닌 아이패드에 그리려니 생소해서 더 헤맸다. 아이패드의 대표 그림 그리기 앱인 '프로크리에이트'를 써본 것도 처음이었다. 그렇다 보니 영상 소스로 그림 영상을 쓴다는 것은 지금의 나에게 터무니없는 방법이긴 했다. 그래도 지금은 이 방법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못 그린 그림이어도 내 심리상태를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건 내가 삐뚤빼뚤하게나마 그린 그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정말 간절하면 평소엔 고려하지도 않을 방법을 선택하게 되나 보다.


  막상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이후로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렸다. 시행착오가 많다 보니 오랜 시간이 걸렸고 미리 녹음해 놓은 음성의 페이스에 맞춰 그림을 그려야 했기 때문에 그림을 그리는 속도도 조절해야 했다. 얼레벌레, 하지만 정성을 다해서 그림을 그렸고 결국 영상을 완성할 수 있었다. 뿌듯함이 밀려왔다. 시험을 포기하고 첫날, 엉성한 영상이지만 어쨌든 하나의 결과물을 만들었다는 것이 기뻤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른 일들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내 손에서 뭔가가 탄생한다는 것이 너무 재미있었다. 허접한 그림 실력이지만 뭐라도 더 그려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막무가내 정신으로 해봐야겠다고 다짐한 것이 바로 인스타툰이다.


  고민은 실행을 늦춘다는 것을 뼈 아프게 배웠던 나는 바로 프로크리에이트를 켰다. 잘 그리든, 못 그리든 일상을 이루는 특별한 조각들을 인스타그램에 남겨놓고 나중에 꺼내 볼 수 있도록 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소재를 정했다. 그런데 참 어이없게도 생각나는 에피소드가 연애 초기에 방귀를 잘 뀌어서 남자 친구한테 칭찬받았던 일이었다. 내 무의식은 방귀 칭찬에 대한 기억 조각이 많이 소중했나 보다. 과연 내가 25살인지, 5살인지 내 사고 수준에 회의감이 들었지만 오히려 내 그림체에는 이런 유치뽕짝 한 이야기가 더 잘 어울릴 것 같긴 했다.


방렐루야... 아멘.

  지금 옆에 보이는 그림이 내 첫 인스타툰 에피소드의 일부다. 엉성하디 엉성한 그림이지만 내 실력으로는 이 정도 그림을 그리는데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처음에는 프로크리에이트로 텍스트를 넣는 방법도 몰라서 그림을 컴퓨터로 옮기고 텍스트 넣고, 다시 아이패드로 옮겨서 수정 작업을 하는 비효율의 아이콘이 될만한 작업방식으로 작업을 했다.


  새벽 4시. 10장의 그림으로 이루어진 만화 한 편을 완성했다. 하지만 도저히 인스타그램 계정을 만들 힘까지는 없어서 결국 아이패드를 옆에 두고 쓰러지듯 잠들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인스타그램 계정을 만들어 바로 만화를 올렸다. 아무에게도 말 하지 않은 상태로 올린 만화였고 방금 전 만든 계정이라 아무 기대 안한 상태에서 만화를 올렸다. 그리고 역시나 큰 반전은 없었다. 인스타 생태계에 대한 이해도 없는 내가 거의 처음으로 올린 인스타그램 게시물이 큰 반응을 얻는건 말도 안된다는 걸 이미 잘 알고 있었기에 처음부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리고 올린지 8시간 째인 현재 팔로워 6명에 좋아요 14개. 앙증맞은 숫자다. 그런데 솔직하게, 나는 이 숫자도 감개무량했다. 내 그림을 최소 14명 이상의 사람들이 보고 그 중에서 14명은 손가락 두 번 움직여서 '좋다'고 해준거 아닌가!

  이 기분 좋은 소식을 누군가에게 알리고 싶어 동생에게 연락을 했다. 독립적이고 굳건한 동생이 "웬 인스타툰? 언니 그림도 못 그리잖아. 차라리 1차 시험도 붙었는데, 공부나 열심히 하지 그랬어."라고 말할 줄 알았건만, 오히려 더 신나하는 동생을 보니 행복했다. 동생이 한참 카톡 답장을 미루더니 카카오톡으로 20줄 정도를 써낸 글을 보냈다. 그 글은 바로 소재들이었다. 나조차도 과거 저편에 묻어두었던 내 오랜 기억들을 내 동생이 파내주었다. 게다가 본인을 만화의 소재로 얼마든지 활용해도 좋다며 부끄러울 만한 소재도 실컷 말해주는 동생의 모습에 주책맞게도 눈물이 핑 돌았다. 그와중에도 동생은 내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못할 속도로 인스타그램이 처음인 나에게 온갖 꿀팁을 떠먹였다. 업로드 시간은 퇴근 시간에 맞춰서 올려라, 해시태그는 댓글에 달아라, 표지를 꼭 만들어라, 세이브 원고 미리 만들어둬라... 이런 말을 듣고 있자니 새삼 내가 지금 하는 일들에 지금보다 더 진지하게 임해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주변인들도 내가 하는 일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주고 조언해주고 신경써주는데 내가 진지하지 못하면 주변 사람들에게도 실례가 되는 행동일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무작정 시작해 본 인스타툰이지만 내 한계를 느낄 때까지는 꾸준히 그려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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