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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희 Jul 01. 2022

3. 장거리 연애 시작 전, 마지막 데이트

추억은 힘이 세다. 

  만 84세인 집주인 할아버지와 드디어 이사 일정 조율을 끝냈다. 월세를 선불로 내드렸기에, 돌려받아야 할 월세 금액을 요청하니 월세는 반틈만 돌려받고 나가면 안 되겠냐 물으셨다. 2/3 넘게 돌려받아야 할 돈을 어떻게 반만 돌려받고 나가겠는가. 돌려받아야 할 월세 일할계산 분은 내가 계산해서 따로 문자를 남겨드리겠다 하니 그제야 알겠다고 하시고는 전화를 끊으셨다. 부디, 이삿날 다른 말하시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한숨을 돌리고, 남자 친구에게 이사 일정 조율을 끝냈음을 알렸다. 장거리 연애가 코 앞으로 다가왔다는 신호이기도 했다. 내가 내려가 지낼 고향에서 서울까지는 고속버스로 3시간 40분 거리. 버스로 20분 거리에 살아오던 우리가 이제 곧 한 번 만나기 위해 3시간 20분이라는 시간을 더 써야 한다. 보고 싶으면 볼 수 있던 거리에서 미리 계획을 잡고 만나야 볼 수 있는 거리로, 우리의 물리적 거리가 벌어졌다. 

  애인을 기간제 베스트 프렌드라고 흔히 말한다. 나는 아직 연애 중이니 내게 있어 남자 친구는 현재 진행형 베스트 프렌드다. 몇 년간 대부분의 시간을 남자 친구와 함께 했다. 근거리에 살며 서로를 응원해주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다양한 음식을 먹고, 같은 콘텐츠를 보고, 많은 일을 함께 해왔다. 서로 성향이 다른 만큼, 내가 고민이 있거나 힘들어할 때면 남자 친구는 나로서는 생각도 못 할 해결책을 제시해주고 공감해주고 위로해줬다. 그만큼 의지도 많이 했지만 무엇보다 남자 친구와 함께 하는 시간은 편안했다. 배려와 경청을 베이스로 만들어진 것 같은 남자 친구는 내게 많은 힘이 되어줬고 이번 누수 사태 때도 실질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고 실행해줬다. 그만큼 남자 친구는 항상 고맙고 든든한 존재였다.  

  

  이런 존재와 멀어져야 한다니, 나로서는 참 슬펐다. 남자 친구 역시 나와 가까이 살기 위해 이 동네로 이사를 결심한 것이었기 때문에 내가 이 동네에서 떠나고 나면 당분간 혼자 지내야 하니, 나에게 직접적으로 말은 안 해도 답답할 것이 분명했다. 서로 담담한 척을 했지만 이삿날까지 미리 잡혀있는 스케줄을 생각하면 우리가 같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날은 딱 하루였다. 

  당장 내일, 우리는 장거리 연애 전 마지막 데이트를 가기로 했다. 

 


  마지막 데이트라고 특별할 건 없었다. 먼저 평소처럼 점심을 먹으러 나섰는데, 점심 식당으로 선택한 회전초밥 집이 어쩌나 맛없던지 먹으면서도 헛웃음이 나왔다. 함께 내 동생이 일하던 회전초밥집에 가 실컷 초밥을 먹었던 날과 처음으로 함께 오마카세에 갔던 날을 얘기하며 쿰쿰한 초밥을 먹었다. 디저트라도 맛있는 걸 먹자며 빙수를 먹으러 가 멜론 빙수를 먹었는데, 예전에 먹었던 블루베리 빙수가 더 맛있었다. 예매해 놓은 영화 시간이 다 되어 영화도 한 편 봤다. 오늘의 영화는 <탑건: 매버릭>. 만족스럽게 영화를 보고 몇 년 전부터 함께 기록을 남기고 있던 왓챠피디아에 나란히 4점을 기록해줬다. 그리고 잠깐 작업실에 들러, 둘이 함께 참여한 공모전 영상에서 오류를 바로 잡은 후 다시 공모전 주최 측에 전달했다. 저녁으론 마라샹궈를 시켜먹었다. 2년 전쯤, 마라샹궈에 빠져 식비를 탕진할 위기에 놓이자 마라샹궈 섭취 횟수를 제한하기 위해 집밥 리스트를 작성했던 일이 새삼 생각났다. 예전엔 그렇게 자주 먹었던 마라샹궈도 이제는 우리의 위와 다음 날에 아랫구멍이 버텨주지 못 하기에, 오랜만에 먹었다. 실컷 먹고는 소화를 시키기 위해 작년 겨울 한참 다녔던 플스방에 가 'It takes two'라는 게임을 했다. 

  습한 기운 잔뜩 머금었던 동네에서 비가 오다 말다 하던 날 했던 데이트. 꾸질꾸질한 날씨에 여름날에 한 데이트에도 우리에게는 4계절의 추억이 함께 했다. 초밥을 먹던 순간은 올해 봄날에 오마카세를 먹으러 갔던 건대를, 빙수를 먹던 순간은 재작년 여름에 갔던 홍대를, 영화를 보던 순간은 재작년 가을 처음으로 GV를 보러 갔던 롯데타워를, 플스를 하던 순간은 작년 겨울에 갔던 신촌을 떠오르게 했다. 추억은 힘이 셌다. 의도하지 않아도 불쑥 튀어나와 우리가 함께 한 시간을 증명이라도 하듯, 순간순간을 채웠다. 

  밤에 자기 전 누워, 이런 순간들을 생각하니 불안함이 조금은 덜어졌다. 우리가 다시 근처에 살게 될 그날에 뒤돌아보면 이 장거리 연애도 추억이 될 거라고 생각하니 오히려 조금은 설레기도 했다. 남자 친구 역시 이번 기회에 자기가 내 고향에 자주 놀러 오겠다며 설렘을 내비쳤다. 둘 다 바쁘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시기에 장거리를 하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한 사람이라도 여유로웠을 시기에 장거리를 한다고 생각했으면 지금보다 더 힘들었을 것 같다. 물론 이 장거리가 언제 끝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도 기약 없는 장거리에 불안해하기보다, 이 시기를 서로 발전할 수 있는 밑거름으로 삼기로 약속했다. 다시 근거리 연애로 돌아갈 때, 둘 다 더 나은 사람이 되어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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