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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체 Feb 05. 2023

영랑호를 달리다

곳곳에 쌓인 눈들, 그리움들 같은

  영랑호 앞 설악비치리조텔에 갔다. 지인의 오피스텔인데 편히 쓰라신다, 언제든. 지난 금요일 일 마치고 느지막이 아내랑 둘이 내려왔다. 둘째 입시결과도 일단은 좋게 나와 마음 저으기 가볍게 왔다. 토요일 아침 영랑호를 한 바퀴 달렸다. 7킬로 조금 넘는 거리다. 열흘도 전에 내린 폭설로 길 가 모서리마다 눈들이 얼어있다. 녹지 않은 건지, 못 녹은 건지 검은 먼지들 뒤집어쓴 가여운 눈들이 잔뜩이다. 조심스레 눈 녹은 자전거길을 달리고 일요일 아침 장거리훈련 답사를 마쳤다.


 일요일 아침 7시경 영랑호 둘레길 4회전을 시작했다. 작은 정자 기둥에 물과 몽쉘통통 몇 개를 놔두고 주머니엔 에너지젤 시스 sis 베리맛 세 개를 넣었다. 27킬로를 달리는 오늘의 프로그램. 속도는 평소보다 조금 느리게 잡고 여유롭게 장거리와 긴 시간을 채우고 버티는 훈련이다. 전과 다르게 후반 처지지 않도록 초반에 속도와 케이던스에 집중했다. 다행히 오버하지 않고 한 바퀴를 잘 해냈다.


 문득, 첫 바퀴 달리는 시야에 '한국화장품 속초대리점'  간판을 보았다. 고성으로 가는 방향의 4층건물 꼭대기에 간판은 낡고 바래고 있었다. 오랜 세월의 기록처럼, 유물처럼 어둡게 서 있었다. 사실 어제 토요일 한 바퀴 달릴 때부터 속초의료원을 보았다. 이태전 쯤인가 엄마와 고모들 모시고 속초의료원 큰고모를 뵈러 왔었다. 치매로 엄마나 우리들 잘 알아보지 못했다. 내 이름 석자를 들으시더니 '오메, 우리 장손이  왔당가' 하셨다. 그러곤 다시 멍한 눈빛으로 초점 없이 창가를 보셨다. 함께 간 자식들도 쉬 알아보지 못했다.  


 그 속초고모가 화장품 외판원을 하셨다. 억척으로 몇 남매를 키우셨다. 아버지의 유일한 친누나요 친혈육이었다. 고모는 일곱 살 아버진 네 살에 엄마를 보냈다. 계모와 이복동생들 속에서 둘은 각별했으리. 그 잔인한 성장기의 외로움과 현실의 고난들을 함께 이겨내고 버텼으리. 고모는 남녘 고향의 정반대 대각의 위치에 자리한 속초에 오셨다. 숱한 사연과 고난을 수없이 들었다. 엄마는 아버지 돌아가시고 속초고모에게 더 자주 전화하고 서로 위로했다. 애증의 시누와 올케가 그 애와 증의 비율이 점차 한편으로 기울어 서로를 위로했다, 늙어간다고, 인생 잘 살았다고, 나중에 동생 만나믄 자랑하자고, 그렇게 그렇게 서로 위했다.

 

 속초의료원 고모를 뵙고 올라가는 길에도 고모의 건강과 이별을 염려했다. 지나간 60여 년 전의 일들을 엊그제처럼 엄마는 오래 얘기했다. 그랬다. 엄마도 고모의 자식들도 나도 다른 고모들도 엄마보다 고모의 건강과 삶의 마지막과 꺼져가는 불꽃의 아스라함을 얘기했다. 엄마는, 엄마의 순서는 먼 미래에나 있을 일처럼 여겼다.


 속초의료원 푸른 창들을 오래 바라보았다. 달리다 보이던 장례식장 간판이 섬뜩했다. 맞닥뜨리기 싫은 공포나 시험으로 맘에 들어왔다. 고모는 지금 저 어딘가에  계실 텐데, 부디 건강하셨음 좋겠다, 빌었다. 비록 치매로 내가 누군가의 기억 없는 몸을 안고 살아가도 자식들은 나를 엄마를 보듬고 살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했다. 숱한 반감과 당해보지 않은 처지라고 손사래 치며 대꾸할지라도 그렇다. 지금도 그렇다. 엄마가 있었으면 좋겠다, 어떻게든, 어떻게든, 어떻게라도 말이다.


 27킬로를 달리고 쿨다운을 하다 속초의료원 정문에 섰다. 고모를 생각하고 생각했다. 오래 계시기를, 부디 오래 살아계시기를 간절히 빌었다. 고종사촌 누구에게 전화해 고모를 뵙고 갈까 고민만 했다. 바쁜 그들의 일정과 번잡을 들었기에 쉬이 통화버튼 누를 수 없었다. 다시 기도만 드렸다. 삶이 그렇듯 눈도 그리움도 모두 언젠가는 녹아 땅에 스미리. 나도 그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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