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아침밥과 아침빵

뒤늦게 깨달은 엄마의 마음

by 채채

어릴 적 이모와 친했다.

초등학교 시절, 방학만 되면 이모 집에 가서 1~2주일은 머물곤 했다.

바로 옆 동네라 네 살 어린 동생 손을 잡고 버스를 타고 이모네로 간 적도 있다.

엄마는 우리를 버스에 태우면서 버스 기사님께 'ㅇㅇ정류장에서 내려주세요'를 거듭 이야기했다.


그렇게 간 이모네 집에서 나는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나는 시간을 보냈다.

이제 막 세 살 정도 된 사촌동생과 놀기도 하고, 오전 내내 늦잠을 자며 TV 드라마를 보기도 하고.

이모부가 데려다주는 수영장에 가서 코에 물이 들어가 켁켁거리면서도 신나게 놀기도 했다.


여름방학의 이모 집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 건 그 중에서도 아침밥, 아니 아침빵이었다.

이모 집에서 먹는 아침은 흰 우유 한 잔과 빵집에서 사 온 갓 지은 따뜻한 빵.

버터의 향이 스며든 식빵이든, 달콤한 소보로든, 포장지를 열 때마다 설레던 기억이 있다.


그에 비해 우리 집 아침은 항상 밥이었다.

김치, 계란말이, 멸치, 국 같은 것들이 매일 밥상에 올랐다.

아침마다 부지런히 밥상을 차려내는 엄마의 손길은 당연한 풍경이었고, 나는 별 감흥 없이 받아들였다.


그래서였을까.

어린 나는 이모가 아침마다 사오는 빵이 멋져 보였다. 그리고 엄마의 '밥'상은 지루하게 느껴졌다.

‘힙하다’는 말을 몰랐던 시절이지만, 빵으로 시작하는 하루가 왠지 세련되고 근사해 보였다.

며칠 이모네서 놀다가 집에 돌아와서는 엄마에게

“이모는 빵 줬는데, 왜 우리 집은 맨날 밥이야?”라며 투정도 부렸다.

그럴 때마다 엄마 얼굴에는 잠시 서운한 기색이 스쳤다.

나는 그 표정을 알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흘려버렸다.


어른이 된 지금,

주말 아침 집 근처 빵집에서 사온 빵으로 아침을 먹으려다가 나의 초등학생 시절 방학을 돌이켜본다.


엄마가 해 준 밥상의 무게가 다르게 다가온다.

빵을 내어놓는 것보다 밥상을 차리는 게 훨씬 더 많은 품을 필요로 했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쌀을 씻고 물을 맞추고 국을 끓이고 반찬을 준비하는 일.

그건 하루 이틀의 정성이 아니라, 수십 년 동안 우리 가족의 아침을 책임지겠다는 엄마의 묵묵한 의지였다.


나는 그 긴 세월 동안 엄마의 밥을 당연하게 여겼다.

이모네 집의 빵을 부러워하면서, 내 앞에 차려진 밥상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사실은 그 밥이야말로 엄마가 나를 사랑하는 방식이었는데 말이다.


물론 이모의 빵이 잘못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이모는 이모대로 나를 사랑했고, 그 방식은 빵이었다.

다만 나는 빵을 멋있다 여기면서, 밥에 담긴 엄마의 마음을 보지 못했다.


이제는 안다.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 아빠와 자식들의 아침 밥을 지어내는 일이 얼마나 고단했을지.

그럼에도 변함없이 밥을 지어내던 엄마의 사랑이 얼마나 단단했는지.

버스를 타고 이모네로 가는 그 짧은 거리조차도 자식들이 걱정되어 기사 아저씨께 몇 번이고 우리가 내릴 정류장을 말하던, 젊은 날의 엄마의 마음은 어땠을지.

문득 문득 엄마에게 미안하다. 내가 너무 늦게 그 마음을 이해하게 된 것이.

keyword
작가의 이전글여행지에서 마주한 나의 편협한 시선과 부끄러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