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컵쟁이다. 겁쟁이가 아니라 컵쟁이. 컵을 너무 좋아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그렇다. 나는 컵이 좋다. 너무 너무 좋다. 살면서 물욕은 없다고 자부할 수 있었는데 컵만큼은 예외다. 내가 생각했을 때 컵은 거의 완벽에 가까운 물건이다.
컵은 실용적이다. 우리의 삶을 들여다 보면 컵 없이 우리가 하루를 살 수 있는가? 나는 '없다'고 생각한다. 물을 마실 때 차나 커피를 마실 때 꼭 필요한 용기이다. 집안에서 뿐만 아니라 특히 밖에서 일회용품 사용을 줄이기 위해서도 개인컵 지참은 하나의 사회적 매너로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관리만 잘한다면 오래 사용할 수 있다.
컵은 아름답다. 미의 기준은 모두 다르겠지만 나는 컵이 아름답다. 다양한 컵이 있지만 특히, 머그라고 불리는 컵을 좋아한다. 원통형으로 약간 무심한 듯 생긴 머그가 좋다. 그리고 머그는 그 자체로 컵이라는 뜻을 포함해서 굳이 머그컵이라고 부르지 않아도 되지만 족발이라는 단어처럼 굳이 머그+컵이라고 부르는 것도 귀엽다. 머그컵에 커피를 마실 때면 나의 공간은 카페가 된다.
나는 언제부터 컵에 빠지게 되었을까? 나는 언제부터 컵쟁이가 되었는가? 그 역사는 유튜브와 카페라는 두 가지 단어로 정리될 수 있다. 나는 중학생 때부터 유튜브를 시청했다. 내가 즐겨봤던 채널의 영상은 일상을 담은 영상이나 어떤 주제에 대해 차를 한 잔 하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이었다. 그때 그 유튜버가 매일 차를 마시던 컵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차 한 잔의 여유가 매우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래서일까, 그것과 똑같은 컵이 갖고 싶었다. 그 컵은 하얀 바탕에 초록색 로고가 중간에 새겨져 있었다. 돌아보면 엄청 매력적인 컵은 아닌 것 같다. 그 당시 컵에 차를 타 마시던 유튜버의 모습이 너무 멋져보였다. 팬심은 구매로 이어졌다.
그 컵을 구매하려면 스타벅스에 가야 했다. 하지만 중학생이었던 나는 카페에 혼자 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사실 주문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다. 그리고 카페라는 공간은 내게 어른의 세계처럼 다가왔다. 이것은 문구점에서 학용품을 구매하거나, 슬러시를 사먹거나 맥도날드에서 햄버거를 주문하는 것과는 다른 느낌이다.
그러던 어느 날 용기가 생겼다. 내가 선택한 카페는 학교를 오가며 한번씩 마주치는 곳이었다. 카페는 약간 언덕진 곳에 있었다. 그 언덕을 오르며 나는 생각했다. 그런데 뭐라고 주문하지? 어떻게 뭐라고 주문해야 하는지 전혀 감이 오질 않았다. 그리고 얼마지? 가격도 알 수 없었다. 음 커피니까 좀 비싸겠지? 적어도 만 원은 할 거야. 아니 이 만원? 그래서 다짐했다. 앞사람이 하는대로 해야지. 그대로 주문해야지. 그래서 귀를 쫑긋 세우고 들었다. 경청의 대가는 참혹했다. 아이스 라테 더블샷!!!
그날 밤 뜬 눈으로 밤을 보냈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 나 컵 사러 갔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