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깔 도시
지금 내가 존재하는 도시의 색은 무엇일까. 쉽사리 답변이 떠오르지 않는다. 사계절 변화가 주는 자연의 색으로 표현해야 할지 아니면 건물의 색이나 사람들의 옷차림에서 찾아야 할지 선뜻 답변이 어려운 질문이다. 어디를 둘러봐도 높은 빌딩 숲, 마천루에 쌓인 겨울의 풍경이라는 단서를 붙인다면 조금은 쉽게 색이 떠오를지 모른다. 한겨울의 뉴욕은 옐로 캡의 노란색도 매디슨 스퀘어 가든 뮤지컬 티켓 부스의 빨간색도 아니었다. 흑백이었다. 어둡고 밝음, 하얗고 검은 빛깔의 도시가 두 눈을 거쳐 뇌리에 박히고 가슴에 자리했다.
뉴욕을 걸으며 고층 빌딩을 바라보는 일은 흥미롭다. 뉴욕 거리의 혼돈스러움은 많은 여행자의 혀를 내두르게 하지만 고개를 들어 시선을 위로 고정하면 각각의 개성 있는 건물들이 보여주는 위용에 감탄하게 된다. 뉴욕에 오기 전부터 익숙하게 봤던 뉴욕을 대표하는 사진들은 대게 스카이라인을 뽐내는 것들이다. 특히 대공황 이후 신축되는 건설현장 속 작업자의 흑백사진이 인상적이다. 커피와 도넛으로 식사를 해결하고 핫도그와 조각 피자를 먹으며 허기를 달래는 그 시절 노동자의 모습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유난히도 좋아했던 빌딩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과 플랫아이언 빌딩이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너무 좋아해 오히려 록펠러 빌딩의 전망대에 올라 그 모습으로 바라보곤 했다.
사진으로 전해진 익숙함 만으로 뉴욕이 흑백으로 느껴지는 건 아니다. 하얀 눈이 도시를 감싸는 순간이면 내리는 눈과 빠르게 치워지는 거리의 대비가 더 강한 요인이 된다. 이것은 겨울의 뉴욕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느껴지자 다른 삼계절의 색깔은 어떠할지 궁금증이 생겼다. 기필코 기회를 만들어 봄의 색, 여름의 색, 가을의 색을 경험하기 위해 뉴욕을 꼭 다시 찾을 것을 다짐하기도 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마음속에 그러한 바람을 품는 것만으로 충분히 설레는 뉴욕이다.
뉴욕에 도착해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에 지인의 초대로 MoMA(뉴욕 현대 미술관)에서 열리는 프라이빗 파티에 참석했다. 바텐더만 내주는 칵테일을 들고 MoMA에서 준비한 다양한 공연과 특별 전시를 관람하며 가장 흥미롭고 관심 있었던 것은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패션과 태도 그리고 표정에서 다양한 색깔이 느껴졌다. 역시 세상의 용광로라 불리는 뉴욕은 뉴욕 다웠다. 하얀 공간을 채우는 검정 의상의 사람들, 시크하지만 상냥한 사람들, 그 안의 일부로 자리한다는 묘한 쾌감이 있었다. ‘뉴욕에 머무는 동안 예술적 감성을 키워보겠어’ 그렇게 결심한 순간이다.
그리고는 곧장 우리의 문화센터 같은 곳을 수소문했다. 마침 새로 열리는 크로키 그림 과정이 있어 신청을 마치고 1층에 있는 화방에서 스케치북과 크로키용 콘테를 구입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수업에 처음 참가했던 날이 생생하다. 모델이 있었다. 누드모델이었다. 모델이 5분마다 포즈를 바꾸면 학생들은 빠르게 하얀 스케치북을 콘테의 흑빛으로 채워간다. 그렇게 몇 차례의 포즈와 크로키 작업이 마무리되면 강사가 학생 각자의 그림을 보면서 의견을 들려준다.”그림은 그려본 적 있니?” “처음인데 이 정도면 대단한 거야” “대상을 형태로서 이해하고 해부학적인 인체의 구조를 공부하면 도움이 될 거야. 그래서 모델은 누드인 거야” 형형색색으로 채워진 공간에서 예술적 무지, 그러니까 어둠에서 조금씩 이해라는 빛을 향해 내딛고 있었다. 손가락이 시커멓게 흑칠이 될수록 예술을 바라보는 시야는 밝아지고 있었다.
막연했지만 뉴욕에서 해보고 싶었던 것들을 이뤄간다. 커피를 마시고, 이곳저곳을 구경하고, 생소한 분야를 공부한다. 세상에서 가장 바쁘다는 곳에서 누구보다 여유롭고 한가한 시간을 보낸다. 다양성이 존중받는 곳에서 새로운 나를 발견한다. 이 여행의 첫 번째 여행지로 뉴욕에 온 것은 최선의 선택이고 축복이다. 미술시간에 색에 대해 배우면서 모든 색을 섞으면 검정이 된다고 배웠다. 내가 바라본 뉴욕이 흑백이었던 이유는 너무나 다양한 색깔이 한 데 모여 살아가면서 섞이고 엮여 그렇게 보였던 것은 아닐까. 비로소 그런 생각을 가졌을 때 뉴욕의 휘황찬란한 색깔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