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까지 그리고 뉴욕에서
2012년 12월 19일 인천을 떠난 대한항공은 14시간이라는 시간을 거슬러 뉴욕의 관문 JFK 공항에 나를 내려놓았다. 얼마가 걸릴지 모르는 세계여행이지만 일단은 뉴욕에서 그것도 맨해튼에서 3개월을 살아보기로 결심했으니, 양손에는 커다란 트렁크 가방이 각각 들려있었다. L.A.로 출장을 다녀올 때 아웃렛 매장에서 세트로 구성된 아메리칸 투어리스트의 30인치 가방과 27인치 가방을 구매했다. 두꺼운 겨울 옷들로 가방 모두를 가득 채웠다. 그중 한 가방에는 뉴욕에서의 살아보기를 마치고 떠나게 될 배낭여행을 대비해 42리터 용량의 도이터 등산가방이 담겨있다. 바퀴가 두 개만 달린 커다란 가방을 끄는 것은 불편했지만 마음은 편안하다. 편안하기보다는 두근거려 미칠 것 같다. '내가 뉴욕에 왔다니’.
뉴욕에 사는 친구를 통해 공항에서 시내로 향하는 교통을 예약했다. 이후로는 다시는 이용할 일 없는 공항 픽업 서비스다. 공항에서 차량을 마주하고 흥분이 증폭됐다. 스타크래프트 밴이 나왔다. 한국에서 연예인이나 타던 차량이 공항에서 나를 기다린다. 드라이버는 여행사를 운영하는 교민이다. 보통은 다른 사람을 보내는 데 친구의 부탁으로 특별히 본인이 나왔다고 한다.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며 이번 여행의 조짐을 좋게 점친다. 내가 특별해지는 순간이고 내 여행이 환영받는 순간이다. 길게 뻗은 하이웨이를 달리며 멀리 브루클린 다리가 보인다. 그 너머로 높게 솟은 마천루가 위용을 자랑한다. 한층 뉴욕의 심장부에 가까워진다.
첫 사흘은 한인 민박의 1인실에서 지낸다. 민박에 지내면서 앞으로 살 곳을 찾아야 한다. (이후로 3개월 동안 총 다섯 번의 이사를 한다.) 하지만 지금 당장에 중요한 건 밖으로 나가는 일이다. 허드슨 강의 습기를 가득 머금은 한기가 옷깃을 여미게 하는 날씨지만 첫날은 코트를 입고 외출해야 한다는 일종의 의식을 진행하듯 깔끔하게 차려입고 밖으로 나간다. 먼저 어디를 가야 할지 답은 너무도 쉬웠다. 스타벅스. 뉴욕에서 꼭 하고 싶은 몇 가지중 하나가 출근시간의 바쁜 뉴요커들의 모습을 한가롭게 카페 창가에 앉아 바라보는 일이었다. 첫 숙소는 메디스 스퀘어 가든과 센트롤 파크의 중간쯤 위치했다. 어디를 둘러봐도 여행자와 뉴요커가 한데 뒤섞이고 정말로 다양한 느낌의 사람들이 가득하다. 뉴욕에서 두리번거리며 걷는 사람은 십중팔구 여행자라던데 지금의 내 모습은 누가 봐도 오늘 처음 온 사람일 것이다.
크리스마스와 연말을 앞둔 뉴욕의 거리는 화려했다. 쇼핑타운을 가득 채운 사람들과 그들의 밝은 표정이 나 홀로 집에 2로 상상하던 뉴욕의 모습을 보여 준다. 거리의 수많은 공사 구간을 지나치면서, 공원에 앉아 비둘기에게 모이를 주는 노숙인의 모습에서 다시 한번 영화의 장면이 아른거린다. 최대한 뉴욕 곳곳을 눈에 담고자 열심히도 걸었다. 며칠을 지내며 느낀 뉴욕에 대한 인상 한 가지는 ‘라이더의 천국’이다. 뉴욕의 또 다른 상징이라는 Yellow Cab, 노란 택시는 말할 것도 없고 픽시 (기어가 고정된 자전거)를 타는 사람 스케이트 보드를 타는 사람 마차를 타는 사람 등 탈 것도 다양하다. 한국에서 이곳으로 직항 편을 타고 왔고 공항에서 시내까지는 스타크래프트 밴을 타고 왔다. 여기에 오기까지 나의 이동은 편안함의 극치였으니, 이곳 뉴욕에서의 이동도 좀 더 특별하길 바라던 때에 친구가 필요 없는 물건이라며 스쿠터 (일명 씽씽카)를 줬다. 특별 아이템 스쿠터를 손에 넣은 나의 뉴욕 여행은 더 멀리까지 더 빠르게 도달할 수 있었고 이후 미국에서의 모든 일정을 함께 하는 절친이 됐다. (필라델피아 여행에서 영화 <록키>의 록키가 달리던 그 길을 스쿠터로 달린 기억을 잊을 수 없다.)
이동이 편해진다는 건 그만큼 다른 것들에 집중할 여력이 커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온전히 계획했던 여행에 집중할 수 있을 것이고, 시간이나 체력 같은 불필요한 자원의 낭비를 줄일 수 있다. 적어도 여행 초반의 내 모습은 철저하게 이동을 편히 함으로써 불확실에 대한 수고를 줄이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차차 시간이 지나면서 여행자로서 내 모습은 변했다. 불편한 이동은 나름의 경험이 되고, 애초에 그 자체로 여행이라는 커다란 카테고리의 한 축이 된다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장기 여행자들이 그러하듯 가장 저렴한 이동 수단이란 곧 시간과 고생의 값으로 치환되기 때문에 ‘이것도 여행이지’라고 생각하는 자기만족이 필요하다. 몇 년이라는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나라는 여행자는 의자가 젖혀지지도 않는 직각의자에 앉아 20시간 정도는 가뿐하게 흙먼지를 맡아가며 달려도 웃음을 잃지 않는 여행자가 된다. 여행에서 이동이란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이지만 충분히 그 자체로 여행이라고 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