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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콜릿책방지기 Aug 20. 2024

<안나 카레니나 1>

첫눈에 반한 사랑에 대한 탁월한 묘사

   사람이 어떤 깨달음을 얻고 자기를 둘러싼 세계를 벗어나거나 한 단계 뛰어넘는 계기는 무엇일까. 톨스토이가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는 이런 질문에서 시작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안나와 브론스키가 치명적인 사랑을 통해서 자기 세계로부터 뛰쳐나갔다고 한다면, 레빈과 키티는 사랑의 아픔을 통해서 더 높은 곳으로 도약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아직 더 읽어봐야겠지만 1권에서 보여주는 것을 토대로 짐작하면 그렇다. 


   물론 우리는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발견하기 위해 소설을 읽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다른 것을 말하는 게 낫겠다. 정말 커다란 차이가 느껴졌던 점을 먼저 말하자면 『전쟁과 평화』를 읽고 난 뒤에 만난 톨스토이는, 좀 더 미묘한 감정들을 수려하게 표현하는 작가가 되어 있었다. 


    첫눈에 반하는 감정을 그린다면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수많은 작가들이 그 충격적인 순간의 감정에 대해 많이 묘사해왔겠지만, 안나와 브론스키가 처음 만난 장면처럼 섬세하고 아름다운 묘사는 전래가 없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감동적이었다. 이 대목은 몇 번을 두고 읽어봐도 똑같이, 그 순간의 빛이, 그 찰나의 감정이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는 그녀에게 실례를 표하고 막 찻간 안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한번 더 그녀를 봐야만 할 듯한 충동이 들었다. 그녀가 굉장한 미인이어서도 아니고, 또 그녀의 자태에서 느껴지는 조촐하고 소박한 아름다움에 마음이 끌려서도 아니고, 다만 그녀가 그의 옆을 지나칠 때 그 귀염성 있는 얼굴에서 뭔가 유달리 정답고 부드러운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가 돌아다보았을 때 그녀 또한 고개를 돌렸다. … 마치 과잉된 뭔가가 그녀의 존재를 넘쳐흐르다가 그녀의 의지해 반해서 때론 그 눈의 반짝임 속에, 때론 그 미소 가운데 나타나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일부러 눈 속의 빛을 꺼뜨렸으나, 그 빛은 그녀의 의지를 거슬러 그 엷은 미소 속에서 반짝반짝 빛을 냈다.”(121)


   안나의 빛을 끌어낸 그 순간, 그 각성의 순간은 이렇게 찬란해서 그것에 매료된 독자에게는 그들의 사랑에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전방위로 일어나고 있는 안나의 각성은 모두 납득할 만하다. 남편인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뿐 아니라 아들인 세료자도, 그의 친구인 리디야 이바노브나라는 백작부인도 이제는 전과는 다른 사람으로 인식된다. 남편에게서는 불만과 위선의 감정을 느끼고, 아들에게서는 자신의 상상 속의 아들보다 볼품없음을 알아채고, 백작부인에게서는 크리스천이라고 하면서도 항상 화를 내고 적을 두는 모순을 발견하다. 


   안나로 인해서 어쩔 수 없이 카레닌에게 일어난 각성은 자기 아내도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질 수도 있다는 사실, 그 불가해하고 부조리한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인생이라서 그는 그저 몸을 떨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는 작가의 문장 앞에서 독자는 전율하게 된다. 완벽한 삶을 살고 있는 것 같던 카레닌에게 이 시련은 분명히 그의 인생을 쥐고 흔들만한 것이었는데, 다른 사람의 감정에 공감하지 못하고 가정사에 시간을 쓰는 것도 인색한 이 인물이 보일 수 있는 최대의 반응을 아주 적절하게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안나의 마음이 멀어진 것을 알면서도 카레닌은 자신의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눈과 신에 대한 의무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는데, 그것이야말로 안나의 마음을 더 멀어지게 한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한다. 카레닌이 사랑한다는 말을 했을 때 안나의 얼굴이 잠깐 부드러워졌다가 이내 그가 의미도 모른 채 하는 말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 말의 뜻을 다시 묻지만 그는 여지없이 또 한 번 어긋난다. 하지만 안나의 각성 이전에 본 카레닌은 나무랄 데 없는 삶을 살고 있던 사람이었다는 게 톨스토이를 읽다 보면 깨닫게 되는 난처한 점이다. 오블론스키가 대외적으로 보면 정말 매력적인 사람인데 반해, 톨리의 입장에서 보면 형편없는 배신자인 것처럼 말이다.


   안나와 브론스키를 마냥 응원하지 못하게 하는 것, 그 지점에서 매우 현대적인 인물들을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우리는 다시 톨스토이에게 박수를 칠 수밖에 없게 된다. 아마 1권의 마지막에서 변화하고 있던 키티와 함께 레빈의 모습 또한 앞으로 더 발견하게 되면서 그들의 다중적 면도 알게 되지 않을까 예상해 본다. 더불어 페테르부르크 사교계의 귀족들의 세계에서 빠져나온 안나를 통해서 변화하는 귀족들과 당대의 모습을 더 잘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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