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인간을 벌할 수 있는가
톨스토이가 <부활>을 쓰면서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던 질문은, ‘인간이 인간을 벌할 수 있는가’였다고 생각한다. 신이 보기에도 물론 그렇지만 같은 인간이 보기에도 크고 작은 죄악을 저지르고 있는 인간이 인간을 벌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도대체 어떤 기준으로 벌할 수 있는가. 소설의 시작이 카튜샤를 재판하는 장면인 것은 그 이유 때문이다. 배심원들의 어처구니없는 실수와 재판관들의 무심함이 무고한 인간을 죄수로 만들어버리는 것을 보여주면서 ‘인간이 인간을 벌할 수 있는가’에 대한 작가의 답을 예비하고 있다.
스스로도 죄에 대해서 자유롭지 못한 인간들이 제멋대로 법률을 만들어서 크고 작은 일들로 죄인을 만들어내고 단죄하는 모습을 보면서, 네흘류도프는 계급적 환멸감은 물론이고 인간적인 모순을 느낀다. 게다가 카튜샤를 만나러 교도소로 가서 그곳의 현실을 체험하면서, 당대의 법률적 단죄는 교화의 개념은 전혀 존재하지 않고 극단적 환경에 몰아넣고 더 큰 범죄자를 양산할 뿐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당시 교도소의 열악한 환경에 대한 묘사는 너무나 생생해서 충격적으로 다가오는데, 특이한 점은 죄수의 가족들도 함께 수감되어 있다는 것이다.
카튜샤를 비롯해서 600명이 넘는 죄수들이 시베리아로 이송되는 과정이 2권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 그 과정 또한 네흘류도프가 ‘인간이 인간을 단죄하는 것’에 대한 모순을 철저히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된다. 열악한 환경에 갇혀 지내던 죄수들이 갑자기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오랜 시간 걸으면서 열사병으로 죽어 나가는 것을 보면서, 불합리한 판결뿐 아니라 이송 과정 또한 살인 행위나 마찬가지라고 본 것이다. 이렇게 그동안 어둠 속에 있던 자신의 무지했던 상태에서 깨어나는 네흘류도프의 심리를 톨스토이는 아래와 같이 묘사하고 있다.
“네흘류도프는 그것을 잊고 싶고, 보고 싶지 않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페테르부르크를 감싼 어스름의 원천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이 모든 것을 그에게 열어준 빛의 원천도 보이지 않았으나, 또한 이 빛은 어스름하고 불쾌하고 부자연스러웠으나, 그는 이 빛이 열어준 것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기쁘면서도 불안했다.”(119)
인간이 어떤 깨달음을 얻었을 때 광적인 상태에 도달하면 오히려 위험한 법이다. 과도한 자기 확신은 아무리 선한 의도를 갖더라도 노보드로로피와 같은 인물들을 만들어낸다. 톨스토이는 네흘류도프가 마리에트의 유혹에 잠시 마음이 흔들리는 대목이나 지방관인 장군의 집에 초대되어 가서 편안함을 느끼는 대목에서 정말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어스름한 빛을 보면서 그 빛이 옳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 빛을 향한 길이 결코 편안한 길은 아니라는 것도 알기 때문이다.
그런 인간적인 흔들림이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네흘류도프가 자기희생의 가치에서 벗어나서 카튜샤와 동등한 위치에 설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자기희생의 개념은 숭고하게 보일 수는 있지만 시혜의 개념과 맞닿아 있을 수 있어서 모든 인간이 동등하다는 가치를 피력하는데 한계가 있다. 네흘류도프는 카튜샤를 위해서 희생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그녀의 마음과 만나게 되는데, 카튜샤 또한 감옥에서 만난 정치범들 덕분에 새로운 삶의 가치를 갖고 새로 태어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러므로 그 모든 과정을 겪고 나서 네흘류도프가 아래와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인간은 인간을 교정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하기 때문에 유일한 합리적 해결책은 무익하고 해롭고 비도덕적이며 잔혹한 짓을 멈추는 것이다.”(335)
이런 결론까지 도달한 것은 타당했으며 결국 인간을 벌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신의 영역에 속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까지는 좋았다. 그리고 그 깨달음으로부터 좀 더 다른 미래를 꿈꾸게 되는 것까지도 공감할 수 있다. 그런데 역시나 톨스토이는 독자들을 믿지 못해서 설명이 조금 과한 측면이 있다. 마지막에 신약성경의 구절을 너무 많이 인용한 대목은 매우 톨스토이적이라고 생각이 드는 동시에 그 이유 때문에 그의 문학적 성취가 반감되는 효과가 있다는 생각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