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극작가가 말하는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
작가는 이야기꾼이고, 이야기꾼의 유일한 의무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야기란 무엇이며, 우리 삶에 무슨 의미를 갖는 것일까. 어쩌면 진부해 보이는 저 질문들을 위해서 이 희곡은 존재한다. 눈에 띄는 표지색만큼 결코 진부하지 않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야기를 위한,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1장부터 빨려 들어가는 이야기는, 우리가 기대했든 기대하지 않았든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니다. 일단 작가인 카투리안이 형사들에게 끌려와 심문을 당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전체주의 국가의 형사들은 고문도 불사하며 자신들이 듣고 싶은 대답을 이끌어 낸다. 그 과정에서 알게 되는 것은 카투리안이 만든 이야기이며, 그 이야기가 현실과 어떤 연관이 있는가가 문제다. 이야기를 이야기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체제 내에서 이야기는 현실의 반영이 아니라, 현실 그 자체가 되어버린다.
이야기를 현실과 혼동하는 사람은 형사들을 비롯해서 지능이 조금 떨어지는 카투리안의 형 마이클도 있다. 마이클도 형사들과 마찬가지로 이야기는 이야기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둘 사이의 다른 점은, 형사들은 이야기와 현실이 판박이라고 생각하지만, 마이클은 자기 세계 안에서 이야기를 현실로 만들어버렸다는 것이다.
어쨌든 마이클은 카투리안에게 없어선 안 될 존재였는데, 카투리안이 훌륭한 작가가 될 수 있게 한 동인이자 트라우마였기 때문이다. ‘작가와 작가의 형제’라는 이야기도 되는 –희곡 안의 이야기들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있다-마이클의 사연은, ‘작가에게는 상처와 어둠, 삶의 그늘과 같은 경험이 필수적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야기의 효용이란 과연 존재하는가에 대한 대답은 어떠한가. 투폴스키 형사가 낚시를 하다가 죽은 아들을 살리고 싶은 염원을 담은 ‘기찻길을 걷던 귀머거리 아이’의 이야기가 단순한 방식으로 보여주는 효용이라고 한다면, 필로우맨은 좀 더 승화된 방식을 보여준다. 사고로 일찍 죽어간 아이들의 삶을 생각할 때 그렇게 죽었어야 하는 이유를 도무지 찾을 수가 없는데, 필로우맨은 더 끔찍하게 살아갈 운명을 피하기 위해 먼저 죽기를 선택했다는 설명을 해준다. 이 이야기는 마치 한강의 『소년이 온다』에 나오는 동호처럼 아이들의 짧은 인생에 의미를 부여해 주는 방식이 된다.
현실은 잔혹하지만 사실 이야기가 더 무섭다. 이야기는 지금의 현실보다 더 오래 살아남기 때문이다. 카투리안이 죽고 난 뒤에도, 그리고 형사들이 죽고 난 뒤에도, 필멸하는 인간들의 세대가 몇 번씩 바뀌고 나더라도 이야기는 살아남는다. 그렇기 때문에 전체주의 국가에서 작가를 경계하는 것도, 결말에 나오는 마이클의 선택도 우리는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이렇게 전방위적으로 작가와 이야기의 의미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던지는 동시에, 이토록 자극적이고 선명한 방식으로 대답하는 글은 드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한 번 잡으면 손을 놓을 수 없을 만큼 흡입력 있게 이야기가 전개되는 동시에, 이야기들을 거부하고 싶은 강렬한 욕망이 생기는 신기한 경험을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