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와 세계와 나의 관계란.
시력이 점점 떨어져서 조만간 완전히 실명하게 될 희랍어 강사가 있다. 청소년기에 가족 모두가 독일로 이민을 가게 된 후, 그곳에서 희랍 철학을 공부하다 성인이 되어 모국으로 돌아와 희랍어를 강의하며 혼자 살아가고 있다. 독일에서는 이방인으로서의 고독을 겪다가 이제는 빛으로부터 멀어져서 보이는 세계로부터 고립되어 사는 중이다.
이 강의를 듣는 한 여자가 있다. 시를 쓰고 문학을 강의하는 여자는 어느 날 말을 잃어서 모든 것을 중단하고 희랍어 강의만 듣고 있다. 다시 말을 찾는데 도움이 될까 해서 무작위로 선택한 언어다. 심리치료사는 여자의 어머니가 반년 전에 돌아가시고, 이혼 후 양육권 소송 중이었다가 이제 막 아홉 살 난 아들의 양육권을 잃은 것이 여자가 말을 잃은 이유라고 생각하지만, 여자는 그 원인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고 말한다.
여자에게 언어의 발견은 격렬한 기쁨이었던 동시에 세계와의 간극을 벌리는 절망이기도 했다. 한 문장 안에도 “완전함과 불완전함, 진실과 거짓, 아름다움과 추함”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감각 때문에 여자는 말을 할 수가 없다. 여자가 언어에 대해 감각하는 것은 마치 어릴 때 트럭에 치인 개가 죽어가면서 여자를 물어뜯는 것과 같다. 죽어가는 개는 삶을 붙잡기 위해 여자를 물고, 살아있는 여자는 죽음을 향해 가는 것을 막기 위해 개를 붙잡고 있다. 그러나 그 동시성은 결코 화해할 수 없는 것이다.
희랍어 강사인 남자는 말을 하지 않는 여자를 주시한다. 남자는 이미 독일에서 말을 하지 않는 한 여자를 사랑했던 적이 있다. 여자는 어릴 때 청력을 잃어서 수화로 대화를 한다. 그런 여자에게 남자는 자신이 시력을 잃게 되었을 때를 대비해 말을 해보라고 한다. 마치 요하임이 남자에게 시력을 잃고 난 뒤를 대비해서 미리 점자책 읽는 법을 배우거나 리트리버를 키우라고 했던 것처럼. 여자는 분노해서 남자와 헤어지는데, 요하임을 만나기 전까지 남자는 여자의 분노를 이해하지 못한다.
선천적 병으로 병원에 오래 있다가 세상에 나온 요하임은 항상 죽음 앞에 있었던 사람이라서 주어진 삶 앞에서 남자에게 희망을 말한다. 남자가 향해 가는 시간이 절망적인 상황임을 상기시키는 말이 어떤 고통을 주는지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남자와 청력을 잃은 여자와 요하임은 그렇게 어긋나서 다시는 만나지 못한다.
여자가 강의를 들으러 갔던 어느 날, 건물 안으로 잘못 날아든 새를 구하려다 남자의 안경이 깨지고 손을 다친다. 여자는 남자에게 도움을 주다가 남자의 사연을 듣게 된다. 혼자 힘겹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남자를 보며 여자는 자신의 상황을 반추한다. 어쩌면 남자의 이야기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을지도 모를 여자는 마침내 입을 열기로 한다.
소설의 기본 이야기는 위와 같지만, 이것만으로 이 소설을 설명하기에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여자는 자신이 지금 배우고 있는 희랍어의 특징처럼, 지극히 자족적이고 돌이킬 수 없이 인과와 태도를 결정한 뒤에야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소설의 서두에서 언급된 “우리 사이에 칼이 있었네.”라는 보르헤스의 말처럼 여자와 언어 사이에는 칼이 놓여있다. 언어는 때로는 환영처럼 보이고 그 감각 속에서 삶의 실체는 잡히지 않는 것 같지만, 그 속에 있는 우리는 “피가 흐르고 눈물이 솟는다.” 그 커다란 간극 사이에서, 마치 플라톤이 현실과 이데아를 인식하는 것과 같은 그 광대한 거리 속에서 여자는 좀처럼 말을 내뱉을 수 없다.
앞을 보지 못하는 희랍어 강사의 독백을 들으며 어쩌면 여자도 그렇게 더듬거리며 불완전하게 말할 수밖에 없다는 걸 조금은 받아들였을지도 모르겠다. 언어를 통한 완전한 이해와 소통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약간은 체념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여자가 말을 하기로 결심하게 된 것은 어느 정도의 화해다. 언어와의 화해는 세계와의 화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희망으로만 보기에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은”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