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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힘 Sep 27. 2022

무주 상보 시

기대 없이 사랑하는 것

 

 저녁 8시 장난감으로 발 디딜 틈 없는 거실. 이제 정리하고 자야 할 시간인데 아이들은 아직도 놀이에 빠져있다. 부드러운 말로 ‘이제 잘 시간이야. 정리하자.’ 했지만 듣는 둥 마는 둥 한다. 역시, 좋은 말로는 안 되겠다. “하나, 둘, 셋!”. 볼륨이 5에서 10이 되었다. 여덟 살이 된 첫째는 달라진 내 목소리로 직감했다. 앞으로 어떤 상황이 될지. 어질러진 장난감을 혼자서 열심히 치우는 첫째와 엄마 목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리고 붙이고 있는 여섯 살 둘째. 같은 상황에 이렇게 다른 반응을 보이다니. 그렇다면 칭찬 권법을 써야겠군. 둘을 동시에 보고 있던 나는 첫째를 칭찬하면 자연히 둘째도 같이 정리하겠지 했는데.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첫째를 칭찬하니 둘째가 멈칫하더니 눈빛이 바뀐다. 형아만 칭찬한다고 엄마에게 잔뜩 골이 났다. 이런 반응을 기대했던 건 아니었는데. 골이 난 둘째를 달래주지 않았다. 정리는 첫째와 내가 다 했으니까. 억지로 양치를 하자마자 둘째는 이렇게 선언했다. “나 오늘 할머니랑 잘 거야.” 바로 아래층이긴 하지만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엄마나 아빠가 엎어서 데려다주어야 했던 둘째다. 설마 혼자서는 할머니 집으로 내려가겠나 싶어서 “그래라.” 했는데 이 녀석 정말 망설임도 없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현관으로 간다. 애써 현관 쪽을 보지 않았다. 바스락바스락 신발을 신는 소리와 ‘띠로링’ 문 열림 버튼 누르는 소리에 이어 ‘쾅’. 무거운 철문이 닫혔다.   

   

 서운했다. 아니, 괘씸했다. 정리도 하나 안 했으면서 뭘 잘했다고. 이미 눈앞에서 사라진 둘째에게는 닿지 않을 소리들로 내 속은 시끄러웠다. 둘째에게 엄마란 뭘까. 엄마보다 할머니를 더 좋아하는 아들. 그러고 보니 엄마보다 할아버지를 더 좋아했던 아들도 있었다. 아이들은 아래윗집 살며 매일 만나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좋아한다. 둘째는 태어나면서부터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였으니 더 그렇다. 첫째는 할아버지를, 둘째는 할머니를 유난히 따르고 좋아했다. 늘 감사한 마음이면서도 아이들이 자라는 과정에서 이런 서운한 감정은 수차례 반복되었다. 우는 아이를 달래다 지칠 무렵 부모님이 올라와 안으면 울음을 딱 그친다거나. 그래도 그치지 않는 날엔 조용히 안고 내려가신다거나. 아, 그때의 허무함이란. 부모로서의 부족함, 나의 ‘쓸모없음’과 자책으로 밤을 지새운 날들. 스스로 도닥이고 추스르며 6년을 살았지만, 미처 다 돌보지 못한 감정들은 쌓여 갔다. 

     

 부모 자식 사이의 사랑은 흔히 아낌없이 주는 사랑이라지만. 나는 정말 아무 대가 없이, ‘아낌없이 아이들을 사랑하는가’라는 질문 앞에 머뭇거린다. 다 내어주고도 준 것을 잊어버리는 사랑. 아름답지만 그만큼 내겐 어려운 일. 사랑의 실천은 무릇 왼손이 한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는 것이고. 원래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마치 누군가에게 빌려 쓰고 돌려주는 것처럼 하는 것이라 했다. 내가 주는 그 사랑도 내 것이 아닌 것처럼. 아이들에게 돌려주는 것처럼. 나를 깨워준 진리의 말들은 그랬다. 부모에게 무상으로 받은 사랑을 자식에게 돌려주는 것이라고 말이다.     


 애증은 늘 함께 붙어있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사랑하지 않으면 굳이 미워하지도 않는다. 미워하는 대상은 대부분 사랑하는 이들이다. 결국 내가 한 그 사랑 때문에 미워진다. 내가 아이들을 사랑하지만 밉기도 한 것도 역시 그렇고. 사랑하면서 동시에 바라는 것이 많았다. 이렇게 자랐으면 하는 기대와 희망 같은 것들. 이런 모습이었으면 하는 마음과 그 기대에 못 미치면 속상하고 화가 나는 마음. 어렵다. 

    

 ‘아들이 남으로 다가온 순간, 집착이 사라지고 진실한 사랑을 할 수 있다.’ 

    

 가족이 밉고, 원망하게 되는 순간, ‘이 아이는 옆집 아이다.’ 혹은 ‘이 남자는 옆집 남편이다.’ 생각하면 미움이 사라진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다. 듣고 웃어넘겼던 말이 내 상황과 만났을 땐 웃을 수가 없었다. 남이라고 생각하면 집착이 사라진다는 말이다. 이 말이 내겐 조금 슬프게 다가왔다. 남이라고 생각한 것은, 가족이길 포기하는 것 같이 느껴졌다. 사랑하길 포기하고 그렇게 집착도 함께 사라지면 내 마음이 편해질까. 사랑하지 않는 남같이 대한다면 그게 무슨 가족이냐. 사랑하면 집착할 수도 있고, 가족이란 게 원래 그런 것 아닌가. 생각이 여기까지 흘러갔다. 그러다 문득 ‘나의 집착은 뭘까?’란 물음에 닿아 있었다. 내가 고정적으로 가진 생각은 뭐였나. 그러다 의식하지 못했던 뿌리 깊은 가족과 사랑에 대한 부분을 발견했다. 가족이라면 당연히 집착해야지. 써놓고 보니 ‘정말 그럴까?’ 의문이 들었다.

      

 아들은 엄마와 함께 자야 한다. 엄마가 있는데 할머니랑 잘 이유는 없다. 아들은 엄마 말을 잘 들어야 한다. 아들은 엄마를 가장 사랑해야 한다.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던 생각을 문장으로 만들고 나니 낯설다. 내 고정관념을 눈으로 확인하니, 마치 발가벗은 것처럼 부끄러워졌다. 써놓고 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들 아닌가. 아들은 엄마와도 잘 수 있고, 할머니와도 잘 수 있다. 엄마가 있어도 할머니와 잘 수 있고. 아들은 엄마 말을 안 들을 자유도 있다. 꼭 그래야만 하는 것은 없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 내가 하는 많은 생각 중에는 내가 옳다. 내가 하는 것이 좋다는 부분이 많다. 나도 모르게 ‘이렇게 해야만 해.’하는 생각이 깔려있고 거기서 벗어난 상황에 불편해지고 마는 반복이었구나.  

   

 ‘집착: 어떤 것에 늘 마음이 쏠려 잊지 못하고 매달림.’    

 

 흔히 사랑은 곧 집착이라고 착각하기 마련이다. 나도 다르지 않았다. 가족은 서로 집착하고 집착당하면서 그렇게 사는 사람들 아닌가 싶었다. 그런 게 가족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곧 집착해도 된다’는 내 생각을 인정하기 싫었다. 나도 ‘진실한 사랑’을 하고 싶었으므로. 집착하는 사랑을 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나. 마음과 말과 행동이 모두 각자의 주장을 펼치고 있었다. 마음의 불편함은 그 각각의 주장이 만들어 낸 불협화음이었다는 것을. ‘저놈의 자식 남이다. 남이다.’ 주문을 외우듯 가족 보기를 남같이 하라는 말이 슬프게 다가온 까닭을 보면 알겠다. 왜 사랑하는 가족은 미워하게 되고, 사랑하지 않는 남은 미워하지 않는 걸까. 결국 사랑하면 미워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걸까. 그런 생각에 슬퍼졌는데. 그 슬픔의 아래에는 이런 생각이 있었던 거다. ‘가족은 집착하는 것이 당연하다.’ 혹은 ‘사랑은 곧 집착’이라는 생각 말이다. 이렇게 죄다 까발리고 나니 물러설 곳이 없다. 내가 집착하고 있었구나. 인정.     

 이렇게 인정하고 나니 둘째를 생각하는 내 마음이 편해졌다. 내일 아침 올라오면 해줄 말이 떠올랐다.


 “할머니와 자는 날도, 엄마와 자는 날도 엄마는 괜찮아. 누구와 있던, 어디에 있던 엄마는 널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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