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 다움' 강요하는 황당한 사법부... 딸이 바라본 집회 풍경
요즘 뉴스를 볼 때면 하루에도 몇 번씩 감정 기복이 생긴다. 평소처럼 잘 지내다가도 갑자기 울컥하며 슬프기도 하고 도저히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기도 하고. 허무하고 무기력한 나날의 연속이다.
서지은 검사의 용기 있는 미투를 시작으로 사회 각 분야의 성폭력이 드러나는 과정에서 유력 대선후보였던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비서 성폭력이 큰 이슈가 되었을 때, 나는 정말 우리 사회에 엄청난 변화가 있으리라는 기대감과 희망으로 부풀었다.
지난 3월 피해자 김지은 씨가 JTBC 뉴스룸에서 4차례 성폭행당한 사실을 알린 후 안희정 전 지사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모든 분들께 정말 죄송하다. 무엇보다 저로 인해 고통을 받았을 김지은 씨에게 정말 죄송하다. 저의 어리석은 행동에 대해 용서를 구한다. 합의에 의한 관계였다는 비서실의 입장은 잘못이다. 모두 다 제 잘못이다"라는 입장을 발표하며 도지사직을 사퇴했다. 이를 보며 이제 정말 피해자들이 숨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오는구나. 변화의 바람을 느끼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최근 안 전 지사의 모든 혐의에 무죄 판결이 났다. 판결 내용은 얼마나 황당한지. 피해자가 고학력 여성, 그러니까 배울 만큼 배워서 성적 자기결정권을 알만한 사람이고, 충분히 간음을 피할 수 있었을 텐데 적극적으로 저항하며 피해자답게 처신하지 않았기 때문에 진짜 피해자라고 보기 어렵다는 재판부. 갑을 관계에서 하고 싶은 말을 자유롭게 못 하는 을에게 방어의 책임을 묻다니. 관련 뉴스를 읽어보면 읽어볼수록 가해자 편에 유리한 해석에 울화가 치밀었다.
안 전 지사가 직급이 낮은 김씨에게 '감사합니다' '~가요' '~줘요' 등 존중하는 표현을 사용하거나, 건의사항 수용을 위한 '무기명 토론방'을 운영하는 등 참모진과 소통하는 정치인이었기에 위력은 있었으나 피해자의 자유의사를 억압할 만큼은 아니었다는 문장에서는 어이없는 실소가 나왔다.
사람이 사람에게 존중하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 아닌가. 나도 4살 6살 아이들에게 '감사합니다' '~가요' '~줘요' 사용하는데, 존댓말하고 소통하는 엄마라고 해서 그것만으로 폭력적이지 않은 엄마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내 눈빛 하나, 말투 변화 하나에도 위력이 있기에 나는 언제나 나의 절대적인 힘, '엄마 파워'를 발휘하며 내 입장에 유리하고 편안하게 관계를 이어갈 수 있음을 안다. 애나 어른이나 절대적인 위력 앞에는 눈치 볼 수밖에 없다.
피해자 김지은 씨가 했던 최후진술 내용 중에 "미투 이후 지난 4개월 중에서 가장 괴로웠던 기억은 그날(7월 6일) 재판정에서의 16시간이었다. 정조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제가 긴 시간 진술한 증언들까지 모두 한순간에 수치스럽게 만들어 정말로 그 자리에서 그대로 죽고만 싶었다"라는 내용을 읽으면서는 나의 눈을 의심했다. 재판 과정에서 피해자에게 정조라는 말을 했다는 사실은 믿을 수가 없었다. 2018년에 정조가 웬 말인가.
고은 시인이 자신의 성추행 의혹을 폭로한 최영미 시인 등을 상대로 10억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는 뉴스에 충격받고 뒷목 잡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안희정 무죄 판결 소식까지 더해져 그야말로 멘붕에 빠졌다.
피해자들이 지속적으로 2차 가해당하는 현실을 보면서 무섭기도 하고, 여성들이 아무리 목소리를 내봐야 소용없다고 비웃는 것 같아 자존심이 상했다.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구나 싶은 자포자기의 심정, 무기력함, 분노와 슬픔이 밀려왔다.
여성에게 국가는 없다
지난 18일. 350여 개 여성·노동·시민사회단체가 모여 결성한 '미투운동과 함께하는 시민행동'에서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성폭력 혐의 사건 1심 무죄를 규탄하기 위한 집회를 열었다. 피해자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정조라는 말로 수치심을 주는 재판부에 실망 수준이 아닌 절망감을 느꼈기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여섯 살 딸과 함께 집회에 갔다.
"엄마, 여기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인 거야?"
"어떤 아저씨가 큰 잘못을 했는데, 재판관이 괜찮다고 벌 안 받아도 된다고 잘못된 재판을 해서 다시 재판 제대로 하라고 말해주려고 모인 거야."
동화책에서 늘 지혜로운 재판관의 모습을 봐온 딸은 잘못된 재판을 했다는 말에 깜짝 놀랐다. 잘못한 사람은 벌을 받고, 상처받은 사람은 진정성 있는 사과를 받아야 한다는 것은 여섯 살 딸도 정확히 알고 있는 개념이다.
딸은 '안희정 유죄' 빨간색 피켓을 들었다가 보라색이 예쁘다고 '미투가 바꿀 세상 우리가 만들자' 피켓으로 바꿔 들었다. 안희정은 누구고, 미투는 뭐냐고 질문이 많아서 피곤했지만 하나씩 아이의 눈높이에 맞게 설명해주니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하게 들었다.
집회가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딸아이가 배가 고프다고 했다. 식당에 가자니 한 명이라도 자리를 지키는 것이 중요할 것 같아서 벤치에 자리를 잡고 간단히 빵을 먹이고 있었다. 그때 YTN 기자가 다가와 인터뷰 요청을 했다.
"집회에 참여해야겠다고 생각하신 이유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미투운동이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면서 당연히 사법부도 많이 바뀔 거라고 생각했는데, 무죄 판결이 나니까."
라며 말을 연 순간, 내가 왜 여기까지 와서 '안희정 유죄'라고 외치고 있어야 하는지 그동안 쌓인 울분이 몰려와 눈물이 나서 말을 잇지 못했다. 마음을 가다듬고 딸이 살아가는 세상은 달라지길 바란다는 이야기를 몇 마디 더 보탰다.
뉴스에는 천진난만하게 빵을 먹는 딸아이 옆에서 울컥하며 말을 잇지 못하는 내 모습이 그대로 나갔다. 아이는 자신이 빵을 먹는 모습이 뉴스에 나왔다고 재밌어했다.
딸은 많은 인파가 모여 계속 같은 구호를 외치는 생소한 모습에 어리둥절해하고, 심심해했지만 떼쓰지 않고 작은 발걸음으로 사람들과 속도를 맞춰 행진까지 함께 했다. 그런 딸의 모습을 보는 내 마음은 참 무거웠다.
아이가 자라는 속도는 참 빠른데, 우리 사회는 이렇게 변화가 느리구나.
연대의 힘
딸이 다니는 어린이집에는 월요일 아침마다 '주말 지낸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리고, 발표를 하는 시간이 있다. 알림장에 선생님이 공유해주신 그림을 보고 깜짝 놀랐다. 집회가 끝나고 집에 돌아오며 시끄럽고 재미없었다고 다시 가고 싶지 않다고 말했는데, 주말에 가장 인상적인 장면으로 집회 장면을 그린 거다.
그림에는 많은 사람들이 빨간색, 검은색, 보라색 각각의 피켓을 들고 있었다. 여섯 살 치고는 제법 관찰력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현장 사람들의 분노는 느끼지 못했는지 집회 참여자들 모두 밝게 웃고 있는 그림이었다. 시끄러운 축제로 받아들인 모양이다.
SNS에 그림을 공유하며 '그래, 엄마가 느끼는 이 엄청난 분노와 허탈감. 너는 아직 몰라도 되는 거야. 아니, 여성을 바라보는 인식이 많이 바뀌어서 평생 모르고 살면 좋겠다' 했는데 집회에 참여했던 다른 지인은 딸의 그림이 현장 분위기를 정확히 표현한 것 같다고 말했다.
각자가 개별적으로 무기력에 떨다가 다 같이 모여서 비로소 여성의 입장을 말할 수 있는 공간을 갖고, 목소리를 내며 긍정적인 기운을 확장하는 시간이었기에 인상 쓰고 분노하는 그림보다 웃는 모습이 더 잘 어울리는 집회였다는 말이다.
생각해보니, 정말 그렇다. 말도 안 되는 판결이라고 세상이 어쩜 이렇게 안 바뀌는 거냐고 실망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무력함에 빠져 우울했는데. 집회에서 함께 목이 터져라 구호를 외치고, 광화문 일대를 행진하며 '나만 이렇게 느끼는 건 아니구나. 함께 모여 목소리를 모으면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겠구나' 큰 힘을 얻는 시간이었다.
사법부에도 이 간절한 마음이 가 닿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내 딸에게 이런 사회를 물려줄 수는 없다. 여성이 법의 보호를 받기 위해서는 건전하고 순결한 정조를 지켜야만 한다고 말해야 한다니. 딸에게 성교육을 할 때는 피해자답게 행동하는 법을 알려줘야 한다니. 해도 해도 너무한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