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이야기
최근 한 달 안에 약국에서 이런 말을 해 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본인은 20대 초반으로서 선진화된 한국 위생 체계의 수혜를 입은 터라 기생충은 이야기로만 접해 보았다. 주유소의 휘발유 냄새를 좋아하면 기생충이 있다는 괴담이라든지, 학교에서 대변검사를 했는데 귀찮아서 길에 있는 개똥을 집어서 냈다가 양호실로 불려 가서 혼쭐이 났다는 우스개라든지.
물론 전부 옛날 얘기일 뿐이다. 요충 정도를 제외하면 현대 한국인들에게 기생충은 상상 속의 동물에 가깝다. 회충이 생길 일도 거의 없고, 생겼다 하더라도 처방전조차 필요 없는 구충제 한 알 먹으면 해결되는 일이고, 위생 발달로 돼지고기에서조차 국내산이면 기생충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는 수준에 이르렀다. 내가 좋아하는 약수역 근방의 모 돼지고기 식당에 가도 고기를 완전히 익히지 말고 적절히 구운 다음 육즙을 즐기라는 직원의 말을 들을 수 있다.
그러나 불과 50년 전까지만 해도 전혀 그렇지 않았다. 한반도는 기생충의 천국이었다. 과거 한국은 세계적으로 기생충 방역에 굉장히 힘쓴 나라이기 때문에 시대에 따른 감염률에 대한 자료가 잘 남아 있다. 조금 나이가 있는 분들이라면 위에서 말한 개똥 이야기 같은 기생충에 대한 각자의 기억이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기생충 감염비율이 그렇게 높긴 했지만 결코 우리 의지로 그들과 함께하게 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해방 후 5-60년대까지는, 기생충이야말로 가장 많은 한국인들이 사랑했던 반려동물이었다. 믿기 힘들겠지만 사실이다.
한국과 같이 농사를 지을 때 인분을 비료로 사용하는 지방에서는 전국토가 우리 회충알로 덮혀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겁니다. 예를 들어 한국 사람의 50%가 우리 회충을 가지고 있다 하면 (...) 하루에 한국에 뿌려지는 우리 회충알의 총수는 15조개나 됩니다. 이처럼 천문학적 숫자의 우리 회충알이 단 하루분만 한국에 뿌려진다 하여도 끔찍스러울 터인데 1년 365일 하루도 쉬지 않고 일요일이나 국경일도 없이 뿌려지며, 이렇게 하기를 이미 단군 개국 이래 수백, 수천 년을 계속해 왔으니 (...) 한국 안에 우리 회충알이 없는 땅은 한 치도 없을 것입니다. (이순형)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회충을 인룡이라고 부르며 귀하게 대접했다. 승정원일기에서 영조는 회충을 토한 뒤 "회충은 사람과 함께하는 인룡이다. 천하게 여길 것이 없다."라고 말한다. 그들은 회충이 "사람이 생각하고 말하며 행동하는 모든 기능을 지배하는 중추적 역할"을 한다고 믿었다. 1937년 동아일보는 "재래로 이상한 인식이 우리머리에 남아 있으니 사람의 배속에서 회를 근절 식히면 죽는다는 이상스런 생각을 가지고 있어 마치 회가 많은 덕에 살고 있는 것 같은 생각들을 하는 이"들이 많다고 지적하고 있다.
게다가 한반도에는 전통적으로 고열을 내는 질환이 많았다. 환자가 고열을 앓다가 항문을 통해 회충이 기어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회충이 있어야 인간이 살 수 있구나, 인간의 정기를 지닌 회충이 빠져나오면 사람은 죽는구나라는 단단히 잘못된 생각을 품게 되었다. 이 사고방식은 20세기 중반까지 한국인들의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어쩌면 농본 국가인 조선 사회에서 기생충을 겪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일지도 모른다. 감염자의 인분을 통해 쏟아낸 수십만의 알들은 거름과 함께 논밭에 뿌려지고, 거기서 자란 작물에 알이 묻어와 어찌 됐든 알을 섭취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해방 후 미군정의 조사에서 전 국민의 82%가 회충에, 81%가 편충에, 47%가 구충에 감염되어 있었다고 한다. 사실상 전 국민이 기생충에 감염되어 있었던 것이다. 새까만 머리의 한국인인 독일에 가면 '특이인'이 되고, 노란 머리의 독일인이 한국에 오면 '특이인'이 되듯이, 적어도 해방 당시까지는 기생충 감염은 우리에게 비정상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을 보다 못한 국내의 전문가들은 기생충의 병해를 널리 알리려고 애쓴다. 군사 정권 하에서 기생충학 연구 지원, 가족계획을 비롯한 공중보건 시스템 확립, 모든 아동의 기생충 검진과 치료가 이루어지던 공립학교의 보편화, 국제사회의 의료 지원 등 기생충 박멸을 위한 조치가 일사불란하게 이루어진다. 언론은 의사들의 인터뷰를 보도하며 전통의학과 편견에 근거한 미신을 타파하려 노력했다.
전문가들의 계도에 더불어 한국인들의 회충 사랑(?)에 강력한 일격을 날린 사건이 있다. 바로 1963년 10월에 응급실에 실려온 9세의 아동의 몸에서 무려 회충 1,063마리가 나온 일이다. 체중 20kg의 여아의 몸에서 나온 회충의 양은 양동이 하나를 가득 채울 정도인 5kg에 달했다. 이 사건은 이듬해 신문에 대서특필되었고, 이 사건을 접한 국민들은 차차 회충을 끔찍한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어린 소녀의 뱃속에서 회충이 1,069마리 나왔다는 사실은 돌팔이 약장사도 떠들던 말"이 되었다. 이제 무책임하고 무식한 사람만이 뱃속에 회충을 키우는 자가 되었다.
게다가 파독 예정이었던 광부와 간호사들이 기생충 때문에 파견이 정지되는 일도 일어났다. 갱내에서는 변소 시설이 변변치 않아 생리활동은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적당히 해결해야 했는데, 서독 당국으로서는 자국 광부들의 감염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조국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띤 산업 역군이 한낱 뱃속의 회충 때문에 퇴짜를 맞다니, 나라 망신이었고 집안 망신이었다.
또 주한미군은 한국 야채의 안전을 믿지 못해 일본으로부터 야채를 수입해 먹었다. 이는 외화 낭비의 주범으로 지목되었다. 이 모든 일은 강력한 공동체주의 사회를 살아갔던 한국인들에게 수치의 기억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수치심은 ‘정상’이 아니라는 자신의 약점이 노출되었을 때 생기는 고통스러운 감정으로, 사람들은 일찍부터 약점을 숨기는 법을 배워 대부분의 시간을 ‘정상’으로 보이려고 노력하며 살아간다(너스바움). 60년대로 접어들면서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고, 신문 광고는 더욱 노골적으로 변했다. 60년대 이전 '회충을 속히 업새시요' '회충 구제는 건강의 광명' 정도였던 광고 카피는 60년대로 접어들며 '문화인은 연 2회 기생충을 구제합니다' '회충 왕국은 한국민의 수치!'라는 식으로 노골적으로 부끄러움을 자극했다.
아직도 뱃속에서 기생충을 키우는 사람은 문화인도 아니고, 한국인도 아니고, 수치스럽기만 한 존재가 된 것이다. 1971년 당시 인기 코미디언인 서영춘은 아래와 같은 광고를 찍었다.
에이 에이 챙피해. 네? 뭐가 창피하냐고요. 으유 전 국민의 80%가 회충이 있다니 에이 이거 정말 챙피한 노릇입니다. 에이 저리 들어가 들어가. 헤헤헤 하지만 여러분께서야 설마. 헤헤 있을 겁니다. 에 나요? 나 없습니다. 나 없어요 없어요. 잉. 난 한일약품의 유비론을 먹었단 말씀이야. 잉. 좌우간 회충 요충이 싸악 빠집니다. 온 가족이 잡숴보세요. 에이고 잡숴서 남 주나요. 에. 회충 요충엔 유비론. 한일 약품의 유비론. 물약 말고도 또 알약이 있습니다. 잊지 마세요 정말 싸악 빠져요. 에이 빠져서 남 주나요. 회충 요충엔 한일약품의 유비론!
전 국민을 감염시켰던 기생충은 이제 있으면 안 될 수치스러운 것으로 되어 결국 이 땅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문득 이런 생각도 든다. 회충은 약만 먹으면 해결되는 질병이기에 이런 수치심 주기 전술이 큰 문제없이 효과적으로 작용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병은 어떤가. 완치가 어렵거나 흔적이 남거나 평생 편견에 시달리는 나병이나, 에이즈 같은 병은?
편견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사람이 아직 사회에는 많다. 대표적으로 한센병(나병)을 들 수 있겠다. 한센병은 전염성이 크지 않다. 리팜피신이라는 항생제를 먹으면 나균은 99.9% 사멸한다. 그러나 다르게 생겼다는 이유로 환자들은 사회에서 배제되었다. 별다른 의학적 근거도 없이 군사 정권 하에서 이들에게 강제 불임 수술까지 행해졌던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이런 한센인들이 사회의 편견으로부터 격리되어 모여 살고 있는 마을이 소록도 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89군데나 있다.
서울행 KTX를 타고 대구를 지나 금호강을 건너면 잠시 후 터널 하나가 나온다. 터널이 놓인 산 위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한센인 정착촌인 칠곡농원이 있다. 양계업을 하며 평화롭게 살고 있던 그들에게 단 한 번 세간의 관심이 집중된 적이 있다.
1992년,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대구 개구리소년 실종사건이 있었다. 전 국민이 소년들의 행방을 애타게 찾고 있을 때, 한센인들이 소년 다섯 명을 살해해 지하실에 파묻었다는 특종 보도가 나왔다. 기자와 군인들이 마을에 들이닥쳤고 경찰 조사가 이어졌다. 평화롭던 마을은 풍비박산 났다.
우리는 옛날부터 내려오는 우매한 풍문처럼 아이를 잡아다 죽여서 지하실에 묻은 사람들로 은연 중에 낙인 찍혔습니다. 그리고 이런 보도에 항의하자 그 항의가 조금 거칠었다는 이유로 이제 폭도로 몰렸습니다.
학생들은 부모에게 전학을 시켜달라고 졸랐으며 직장을 다니던 사람들은 직장의 따돌림을 견디지 못하고 모두 사직하였습니다. 계란은 쌓여서 썩어 가는데 뻔질나게 드나들던 장사들은 오지 않았습니다, 사료값 수금 독촉에 부채는 쌓여갔으며 마을 사람들은 한숨과 눈물만 흘리며 어디 하소연 할 곳도 없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다시 육도(陸島)에 갇힌 우리들은 사람들이 무서웠습니다.
그러나 시신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알고 보니, 이곳에서 일하다 월급을 못 받은 사람이 홧김에 허위로 신문사에 제보한 것이었다.
기자도, 경찰도,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은 없었다. 그때의 아픔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고, 지금까지도 주민들은 외지 사람들을 믿지 않는다고 한다. '보통사람'을 내세운 정권에서 일어난 비극이었다. 그 마을에 정말 '보통사람들'이 살았더라도 기자가 아무 사실 확인도 없이 보도를 내보냈을까? 수치심과 혐오는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칠곡농원이 있는 산골짝 아래 KTX는 오늘도 굉음을 내며 서울로 향한다. 천성산의 도롱뇽은 대신 싸워 줄 스님이라도 있었다.
아래 내용을 각색/ 참고자료
https://www.e-sciencecentral.org/articles/?scid=SC000017603
https://www.ncbi.nlm.nih.gov/pmc/articles/PMC1476800/
http://www.breaknews.com/21324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648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