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권도 우리 민족이었어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김원영, 2018 - 뼈가 잘 부러져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는 ‘골형성부전증’을 갖고 태어난 변호사 김원영 씨가 쓴 책이다. 혹자는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이보다 더 깊게 생각하게 하는 책이 있었는가."라고 말했다. 책에서 인상 깊게 읽은 한 꼭지를 소개하고 싶다.
인류 지식의 보고인 유튜브에는 별별 영상이 다 있지만, 그 중에서 내가 즐기는 특이한 취미 중 하나는 바로 옛날 한국을 묘사한 영상을 찾아보는 것이다. 특히, 영화관에서 영화 시작 전 의무적으로 상영하곤 했다는 대한뉴스는 당시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훌륭한 창구이다. 관심이 있다면 박정희 대통령 서거 당시 영상을 참고해 보자. 장엄한 배경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민족을 5천년 가난에서 구해내신 국부'의 서거에 애도하는 사람들의 흐느낌에 잠시 여러 생각이 교차한다.
80년대는 희망의 시대였다. 1기 지하철, 올림픽대로, 잠실 경기장, 예술의 전당 등 서울시민이 애용하는 굵직굵직한 시설들은 그때 모두 지어졌다. 그중 지하철 2호선 개통 영상을 보면 에어컨과 공중전화, 에스컬레이터 등 시민을 배려하여 수많은 시설을 설치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시민을 위한 친절함이 느껴지는가? 그런데 1980년대의 시청역과 2019년의 시청역이 다른 것 한 가지가 눈에 띈다. 영상에서는 엘리베이터를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대역에 아름다운 조명을 설치하고 타일로 마감한 예술적인 벽화를 설치했다는 자랑은 담겨 있어도, 시민의 편의를 위한 엘리베이터를 설치했다는 이야기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옛날이라고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없었을 리도 없을 터인데, 엘리베이터를 설치하지 않은 것이 지금의 입장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물론 건설비를 아껴야 했을 수도 있다. 그럼 그동안 장애인들은 어떻게 지하철을 탔을까? 아마 못 탔을 것이다.
이동권이라는 개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주로 ‘장애인 이동권’이라는 단어의 조합으로 자주 등장한다. 자유권, 참정권처럼 일견 당연히 주어진 것처럼 보이는 이 권리를 나타내는 단어는 사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영어로는 합의된 번역어가 없다.
불과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장애인의 이동권은 단지 배려의 대상이었다. 배려는 참 좋아 보이는 단어다. 그 뜻을 잘 뜯어보면, ‘여력이 되는 사람이 힘든 사람에게 아량을 베풀어 준다’는 의미이다. 바꾸어 말하면, 아량을 베푸는 사람이 여력이 되지 않으면 구태여 베풀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다. 배려를 요구하는 것을 우리는 진상 또는 떼쓰기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임산부 배려석에 앉은 사람이 다리가 아파서 앉아 있겠다고 한다면 자리에 앉지 못한 임산부가 그를 강제로 일으켜 세울 수는 없다. 이런 관점에서 2002년에 장애인 이동권을 대하는 헌법재판소의 시각을 보자. 장애인의 이동은 당당히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 배려의 대상일 뿐이라는 결정이다.
장애인의 복지를 향상해야 할 국가의 의무가 다른 다양한 국가과제에 대하여 최우선적인 배려를 요청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나아가 헌법의 규범으로부터는 ‘장애인을 위한 저상버스의 도입’과 같은 구체적인 국가의 행위의무를 도출할 수 없는 것이다. (저상버스 도입의무 불이행 위헌확인, 2002헌마52)
그러나 이동권은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적극적으로 구제 가능한 권리이다. 배려와 다르게 권리는 침해당했을 때 직접 시정을 요구할 수 있다.
지체장애인이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지하철역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경우를 생각해 보자. 이동권이라는 개념이 없었을 때에는 그냥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고 다른 교통수단을 찾아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동의 자유가 법에 보장된 권리가 된 이상, 이제 엘리베이터를 설치하지 않은 지하철공사는 장애인의 이동권을 직접 침해한 주범이 되었다. 따라서 장애인은 해당 시설을 깔아 달라고 공사에 요구할 권리가 있다. 이때 지하철공사의 ‘돈이 없어서...’라는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비장애인의 다리를 붙잡아 역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면 안 되는 만큼, 엘리베이터를 설치하지 않아 지체장애인을 지하철역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동권이라는 개념이 법에 명시된 이후, 지하철역을 신설하거나 버스 노선을 개설할 때는 엘리베이터나 저상버스를 반드시 갖추게 되었다.
이는 2001년 오이도역에서 휠체어 리프트를 탄 사람이 떨어져 죽은 이래 장애인들이 장관 면담, 대통령 면담, 도로에 드러눕기 등 투쟁을 통해서 직접 얻어낸 권리이다. 책은 이렇게 이동권이 투쟁을 통해 발명된 역사를 과학에서 말하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과 같다고 표현한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을 보고 장애인을 향한 배려가 부족하다고만 생각하던 시절에서, 이를 설계자가 미필적 고의로 장애인의 이동권을 침해했다고 간주하게 된 것이다. 2008년 판결문을 보자. 위에 소개한 2002년 헌재 결정문과 차이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더는 가진 자들의 은혜적 배려가 아닌 전 국민이 함께 고민하며 풀어가야 할 사회적 책무로서 막연히 예산상의 이유만을 들어 그러한 의무를 계속적으로 회피할 수는 없다 ... 일상생활에 있어 아무런 제약이 없어 비장애인에게는 그 존재의 가치조차 논의하지 아니하는 이동권이 단순히 예산상의 이유만으로 제약을 받는 것은 이 시대의 모순일 수밖에 없다. (창원지법 2008. 4. 23., 선고, 2007가단27413)
물론 영어에 이동권이란 단어가 없다고 해서 미국이 장애인 인권 후진국일 리는 없다. 외국의 장애인차별금지법에는 ‘합리적 편의 제공’(reasonable accommodation; 한국의 법은 ‘정당한 편의’라는 표현을 사용한다)이라는 이름으로 경사로 설치, 엘리베이터 설치 의무화와 같은 실제적인 법 조항들로써 이동권을 보호하고 있다. 미국 같은 전통적인 부자 나라의 장애인 이동시설 설치 현황은 이제 막 선진국의 말석을 차지한 한국보다는 우수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한국인들이 고른 '정당한 편의'란 단어 하나는 마음에 든다. 외국의 ‘합리적 편의 제공’이라는 표현에서는 고매한 비장애인 건축주들이 장애인들에게 베푸는 시혜라는 인상이 묻어난다. 일본에서는 훨씬 약한 표현인 ‘합리적 배려’라고 일컫는다. 그에 반해, 한국의 ‘이동권’ ‘정당한 편의’라는 단어에서는 장애인이 주체적으로 요구할 수 있는, 수호되어야 할 신성한 권리라는 느낌이 든다. 이쯤 되면 한국은 용어 선진국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이 모든 것은 장애인들의 투쟁으로 얻어낸 결과이다.
단어는 단어고, 한국의 현실은 선진국들보다 갈 길이 아주 멀다. 장애인, 비장애인, 노인, 어린이 등 모든 사람이 쉽게 쓸 수 있는 디자인을 뜻하는 유니버설 디자인은 병원에서조차 막 한국에 들어와서 활발히 논의되는 단계에 그치고 있다. 예를 들어 병동의 복도는 휠체어 두 대가 마주 보고 지나갈 수 있도록 충분히 넓어야 하며 복도에는 침대, 휠체어 등 움직임을 방해하는 물품을 보관하지 않도록 설계되어야 한다. 그리고 복도의 벽에는 짚을 수 있는 난간이 끊어짐 없이 이어져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번 겨울에 방문한 지방의 한 대학병원에는 휠체어 환자가 많은 정형외과 병동임에도 이런 원칙이 전혀 지켜지고 있지 않았다.
아무쪼록 앞으로는 이동권이 더 잘 보장되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를 무임승차나 장애인을 향한 특혜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장애인이 가기 쉬운 길은 비장애인에게도 가기 쉬운 길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언젠가는 늙게 되어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