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 합의문은 나왔지만, 제대로 이행될 거라고 믿는 사람은 정부 쪽에서도, 의사 쪽에서도 별로 없어 보입니다. 모두에게 상처밖에 남지 않은 것 같은데요, 이왕 이렇게 된 거 의대의 실습교육과정에 대해서 얘기해 보고자 합니다. 대체 의대에서는 뭘 배우는 걸까?
대부분의 의대에는 case presentation이라는 발표과제가 있습니다. 의과대학 부속병원에서 치료받는 환자를 한 분씩 배정받은 다음, 해당 환자의 호소와 검사, 진단, 치료 과정을 분석하여 ppt 자료를 만들고 교수님 앞에서 발표하는 과제입니다. 대학병원에 온 환자다 보니 간단한 병은 아니고 기저질환도 많아서 다양한 검사와 처치를 겪으며 순탄치 못한 치료 경과를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증례를 잘 요약해서 교수님 앞에서 발표하는 것이 상당히 부담이 됩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하고 항상 노력하지만 잘 안 돼서 교수님한테 혼나는 것이 이겁니다. "차트에 나와있는 검사와 진단을 그냥 베껴서 나한테 읽어주는 것이 발표의 목적이 아니다. 네가 이 환자를 처음 봤다고 생각하고, 처음 impression은 뭔지, 그래서 어떤 검사들이 왜 필요한지, 각각의 해석이 무엇인지, 향후 계획이 무엇인지를 깊이 고민하라"는 것입니다. 환자를 볼 때도 남이 이미 '개척'한 진료 경과를 그냥 따라가는 것에서 그치지 말고, 각 진료 과정을 스스로 복기하며 왜 이 검사를 했는지 고민한 흔적이 있어야 실력이 늘기 때문입니다.
드라마에 자주 나오는 의사들의 발표 장면인데 학생 발표도 진짜 이런 식으로 진행돼요.
이건 마치 수학 문제를 푸는 것과 똑같습니다. 수학 시험 직전에, 답지에 나와 있는 각종 정리들의 증명 과정을 급히 훑어보면서 시험장에서 기억이 나기를 바라면서 눈에 발라 놓았던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시험에서는 도움이 될지 모르나, 이런 식으로는 백날 공부해봐야 실력이 늘지 않는다는 것 역시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풀이를 한 줄 한 줄 따라가며 노트에 필기하고 직접 계산하는 고민의 흔적이 있어야 수학 실력을 붙일 수 있습니다. 풀이 과정만 보고 음 이건 그렇군~ 하고 넘기면, 그때에는 누구나 마치 본인이 다 안다는 착각에 빠지지만 실제로는 수학 실력이 전혀 늘지 않겠죠.
Case presentation도 똑같습니다. 발표의 퀄리티는 이 학생이 얼마나 의무기록을 찬찬히 읽어보며 준비하고 고민했는지에 정비례합니다. 환자를 처음 본 의사의 입장으로 돌아가 고민하는 등의 제대로 된 준비를 거치지 않고 단순히 의무기록을 복붙하는 수준에 그치면, '이 검사는 왜 했어?' '이 환자가 왜 이 병이 생긴 것 같아?'와 같은 교수님의 날카로운 질문에 허를 찔리고 뼈도 추리지 못하는 불상사가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사실 이 case presentation이라는 게 우리 본3 학생들에게는 가장 귀찮고 부담되는 과제 중 하나지만, 제대로 공부한다면 피가 되고 살이 되며 스스로 고민한 만큼 얻어가는 것도 많습니다. 따라서 교수님들도 그만큼 신경 써서 지도합니다. 이런 과제를 꼼꼼히 준비하려면 다양한 저널과 가이드라인도 살펴봐야 하다 보니 5지 선택형 문제집에서 벗어나 시야도 넓어집니다. 실제로 모 교수님에 따르면, 학생이 발표를 준비하는 자세를 보면 요 학생이 3년 뒤에 전공의가 되면 환자를 어떤 식으로 보고 있을지 예언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학생 때조차 환자에 관심 없는 사람은, 전공의 때는 환자에 더더욱 관심이 없기 때문이라네요.
9월에 했던 Case presentation
그런데 이 의학교육의 질이란 게 그렇게 쉽게 얻어지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또 다른 모 교수님은 자기가 모 의대 출신 전공의를 받았는데 이 전공의가 학생 때 case presentation이란 걸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는 얘기를 듣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합니다. 그 교수님이야 좋은 대학 출신에 좋은 병원에서 수련받고 교수가 됐을 테니 학생 때 케이스 발표를 구경도 못해본 사람이 있다는 걸 상상도 못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어떤 지방대 의대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은 병원 환자들 중에 발표할 만한 케이스 자체가 드물어 환자에 대한 발표를 해 본 적이 없는 경우도 있고, 명문 의대에서는 1년 동안 약 30번은 넘게 보는 표준화 환자(SP)를 한두 번 정도밖에 보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실습생 대상 작년의 조사에 따르면 설문에 응답한 인원의 19%가 표준화 환자 부족으로 모의 진료(CPX)의 기회를 충분히 부여받지 못했고, 26%가 임상술기 실습(OSCE)을 위한 재료가 충분히 공급되지 않았다고 답변했습니다. 의대별로 편차가 심하다는 얘기죠.
또, 실습을 돌면 돌수록 국가고시 문제랑 실제 환자 사이의 매우매우 큰 차이를 절감합니다. 공부용으로 국시 문제를 조금씩 풀고 있는데, 이런 문제를 풀 때 우리는 보통 환자의 주호소는 본체만체하고 바로 문제 하단의 CT 사진에 먼저 눈이 돌아갑니다. 영상검사 결과를 보면 웬만하면 답이 나오게 돼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당연히, 실제 환자는 이렇게 시험 문제처럼 주호소, 진찰 결과, 과거력, 피검사와 영상검사 결과지를 이마에 붙여 놓고 오지 않겠죠. 환자의 주호소를 들은 다음, 의사는 스스로 판단하여 필요한 진찰을 수행하고, 의심되는 과거력을 물어보고, 그다음 필요한 검사를 수행합니다. 당연히, 각 단계별로 어떤 검사를 할 것인지는 전부 다 open question입니다. 스스로 결정 내려야 하는 거죠. '이 환자에게 다음 검사로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객관식 보기 5개'와 같이 정형화된 문제 풀이와 실제 진료환경은 천지 차이입니다. 국시 대비 문제집을 열심히 풀어 국시 만점을 받는다 하더라도, 실제 의료환경에서 환자를 잘 볼 거라고 장담할 수 없는 이유죠.
예컨대, 아래 문제와 같은 환자를 제가 실제 의료 현장에서 만난다면, 증상만으로 간염을 의심할 수 있을 거라 저조차 생각지 않습니다(아직은요). 하지만 문제처럼 간염을 이미 의심해 바이러스 검사가 모두 이루어진 상태에서는 누구라도 답을 쉽게 고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환자를 내가 실제 현장에서 만난다면 증상만으로 간염을 의심할 수 있을까?
결국 환경이 열악한 학교에 재학 중인 지방의대생들은 명문의대생들이 회진, 외래, 케이스 발표 준비 등등을 하는 동안 국시 문제집 풀이에 열중하게 되고, 따라서 오히려 시험성적 쪽으로는 상당히 두각을 보이는 학생들이 배출되기도 합니다. 물론 앞에서 말했듯이 국시 성적이 높다고 해서 환자를 잘 보는 능력이 뛰어나지는 않으니, 그들이 반드시 훌륭한 의사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좋은 의사가 되려면 문제지 밖에서 경험을 통해 환자를 다각도에서 바라보는 능력이 중요하니까요.
즉 이미 있는 의대의 내실을 다지는 것조차 그만큼 어려운 일입니다. 정부의 주장처럼 그냥 의료 취약지 몇 군데를 뽑아 의대 건물을 세운다고 고급 의사가 뚝딱 늘어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물론 의사 수야 늘어나긴 하겠죠. 그러나 경남에서 잘 운영되던 공공병원도 돈 없다고 폐쇄해버린 일이 불과 몇 년 전입니다. 이제 와서 세우는 새로운 공공의대에는 충분한 예산이 들어가서 의학교육의 질을 담보할 수 있을까요. 그냥 그 예산으로 지금 있는 의대의 교육과정을 개선하거나, 비인기과의 처우 개선에 힘쓰는 게 더 나은 방법은 아닐까요.
결론은, 이미 있는 의대도 파행 운영되는 곳이 많은데, 지방에 새로운 공공의대를 세우면 그것이 얼마나 잘 운영될까 하는 의구심을 떨치기 어렵습니다. 기왕 얘기 나온 김에 제대로 하겠다면, 의대계의 카이스트를 새로 만들겠다는 각오로 작정하고 돈을 퍼부어야 합니다. 할 거면 제대로 해야지요. 하지만 일이 그렇게 잘 풀리리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공공병원 의사로서 정부의 약속을 못 믿는 이유라는 글이 이슈가 되었던 적이 있는데요. 글쓴이가 일하는 공공병원에서 코로나 환자를 수용해서 엄청난 적자를 보았는데, 정부에서 그 적자를 메꿔 준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아 병원 재정이 궁핍해졌다는 내용입니다. 코로나와 직접 싸운 의료진의 인건비도 제대로 지급되지 않는 나라인데, 한번 세워지면 그만인 공공의대에 수십 년간 정권을 바꿔 가면서 전폭적인 투자가 이어질 거라는 약속을 누가 믿을 수 있을까요. 이런 면에서 세심한 계획이 공개되지 않는 이상 정부의 공공의대 설립 정책에 찬성하기 쉽지 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