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료진 덕분에를 말하는 이유
명예와 인정욕은 때로는 꼴사납기도 하지만, 사실은 사회를 매끄럽게 만드는 순기능이 훨씬 더 많다고 생각한다.
원래 같으면 전문 컨설팅 업체에서 낸 수백만 원짜리 보고서에 담겨야 할 insightful한 내용이지만, 전문가들은 자신의 통찰을 전통적으로는 서적과 논문, 요즘은 페이스북과 뉴스 인터뷰에 아무 대가 없이 공유한다. 그런 통찰을 우리가 따봉이라는 수단으로 칭송해 주기만 하면, 전문가들은 별다른 대가 없이 인정 욕구만 채우고 기쁜 마음으로 또 다른 통찰을 내놓는다. 그럼 우리는 또다시 그 통찰을 보고 배운다. 이렇게 선순환 관계가 형성된다. 이 과정에서 들어가는 금전적 거래는 없다. 칭찬과 존경만 해주면(?) 공짜로 이들의 지식을 흡수하는 좋은 체제가 지금까지의 세상이었다.
그러나 전문가를 향한 존중과 신뢰가 떨어지고 모든 지식의 대가가 금전으로만 오가는 세상이 되면, 그들이 가진 깊은 통찰을 값싼 따봉과 맞바꾸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 명예와 존경이 사라진 야만의 세상에서는 십 년이 넘는 전문 트레이닝을 거친 연구자는 자신이 그토록 힘들게 트레이닝받았던 인고의 세월에 대한 값을 두둑이 받아내야만 자신의 지식을 제공할 것이다. 우리가 기사로 손쉽게 읽었던 그들의 깊이 있는 분석은 사라지고, 비전문가만 판치게 될지도 모른다.
적당한 금액에 존경과 따봉을 얹어주면 금방 얻을 수 있었던 탁월한 분석은 야만의 시대가 되자 엄청난 값어치를 호가하게 된다. 어쩌면 명예 하나만을 보고 갔던 직업들 또한 점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나마 자부심을 갖고 종사했던 직업인데, 그조차 사라지고 난 뒤 더 이상 힘들고 돈도 안 되고 멸시받는 일에 몰두하고 싶을 사람은 없다. 물론 '내가 너에게 감사한 마음을 줄 테니 공짜로 재능기부를 해라' 같이 열정페이를 강요할 순 없다. 그런데 우리 같은 양민들이 보내는 존경과 따봉을 대가로 받고 지식인들이 자발적으로 각종 통찰을 공짜로 풀어주는 지금까지의 세상은 썩 괜찮은 체제라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을 종종 했었는데, 이번에 과별 레지던트 경쟁률 통계가 나왔다. 아니나 다를까 필수과들은 대거 미달이 떴고, 특히 소아과는 거의 전멸이나 다름없었다. 의료계에서는 원래도 바이탈과는 몸이 힘들고 돈도 적게 받지만 자부심으로 존경과 감사를 받으면서 버티던 것이었는데, 지난 파업 때 곳곳에서 온갖 수모를 겪었던 일의 파급효과가 아닌가 생각한다.
지난 8월에 아주대병원 권역외상센터에서 일하는 교수가 사람들 보고 니들이 심장 손으로 짜 봤냐면서 페북에 남긴 글이 캡처돼서 돌아다녔다. 아주대병원이면 이국종 교수가 일하는 바로 그곳이다. 그런 힘든 곳에서 몸 굴려가며 일하는 여교수를 향해서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입에 담을 수도 없는 기막힌 비난과 성희롱이 쏟아졌다. 내가 그런 대우를 받으면 다음날부터 환자고 뭐고 일 때려치우고 싶을 거 같다. 그 교수는 일일이 고소미를 다 넣었다고 한다.
우리 사회에서 누군가는 힘든 일을 도맡아 해야 한다. 그들이 돈을 적게 받는데 존중마저 없다면 그 일에 더 이상 매달릴 이유가 없다. 의사에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니다. 목숨을 바쳐 일하는 군인과 경찰관, 소방관, 그리고 일부 과의 의사들은 시장 가격보다 낮은 가격으로 일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들이 시장 가격으로 월급을 받아야만 일하겠다는 세상이 반드시 더 정의로운 세상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그들이 두둑한 봉급을 받고 일한다면 가장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운 면이 있다. 따라서 우리가 그들에게 넉넉한 봉급을 쥐어주지 못한다면, 존경과 존중이라도 보내야 한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그들에게 존중을 보내지 않아서 그들이 일을 떄려친다면, 그때는 우리의 책임이 상당 부분 차지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똑똑한 사람이나 힘든 일을 하는 사람들을 존경한다. 그들은 대학이나 직장에서, 논문으로 책으로 페북에서 거의 공짜로 자신의 지식을 풀어낸다. 또 이들은 목숨을 바쳐가며 나라를 지키고, 안전을 지키고, 무너지는 건물에서 사람을 구해내고,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낸다. 물론 이들이 진짜로 존경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그들에게 존경을 보내 즐겁게 만들면 그 대가를 적게 지불하고도 서비스를 얻을 수 있다는 마음도 조금은 포함되어 있다. 이미 늦었는지도 모르지만, 존중과 감사가 이 사회에 다시금 자리 잡는다면 더욱 살기 좋고 매끄러운 세상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