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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디함 Mar 02. 2023

2013년 - 알탕, 소주와 짧은 입맞춤

어젯밤 올리버에게 바람 맞았다 [제2편]


(...1편에서 이어서)


올리버와 나는 대회가 끝나 각자의 도시로 (나는 독일 베를린, 그는 오스트리아 비엔나) 돌아온 이후에도 꾸준히 페이스북으로 연락을 주고 받았다. 고등학교 때 쓰던 내 일기장을 보면 나는 그에게 정신적으로 참 많이 의존했었다. 부모님 일들로 힘들때면 그가 모든 얘기를 들어줬었다. 몇 개월 후 내 생일에는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호텔 자커에서 정통 자커토르테(살구잼이 중간에 들어가 있는 진한 초코케이크, 생크림이랑 같이 먹는다)를 택배로 보내주었다.



자커토르테 위에 1,8 이라는 숫자초를 끼워 두 볼을 감싸고 '후'하고 초를 부는 내 사진이 있다. 그 케이크가 올리버가 보내준 케이크다. 택배의 민족 우리나라 마인드로 생각하면 그게 뭐가 대수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당시에 택배는 정말 비싼 시스템이었고 특히나 그저 외국인 고등학생이었던 우리에게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게 어려운 일을 그는 나를 위해 해줬었고, 그가 보내준 자커토르테는, 내 18살 생일케이크는 평생의 자랑스러운 기억이 되었다.


한국에 돌아와 나는 연세대학교에 그는 카이스트에 입학했고, 우리는 사는 곳이 달랐지만 그래도 2년을 주기로 보았던 것 같다. 내가 갓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 아마도 2010년쯤 나는 이미 같이 기숙사에 살던 오빠와 사귀고 있었고, 그당시 그가 나를 보러 기숙사까지 와줬던 기억이 있다. 또 2013년에 미국 버클리에서 1년간의 교환학생과 일본 남자친구와의 교제를 마치고 돌아온 후에도 그를 만났지만 당시 내 일기장에 의하면 나는 그를 이성의 대상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 날에 대해서는 내 일기장에 상세히 기록돼 있어 기억이 잘 보존돼있다. 올리버에게서 오랜만에 연락이 왔고 밤 12시가 지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랜만에 연락이 된겸 만나자며 잠실에서부터 용인에 있는 우리집까지 야간택시를 타고 왔다.




12월 추운 날이었다.


먼저 도착한 그는, 우리집 건너편 우체국 앞에서 따뜻한 캔커피로 추위를 달래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미국물에 흠뻑 취해 있을 때라 쌩얼에 버클리 후드티를 입고 나갔었다. 우리는 시냇길을 따라 죽전 카페거리의 멕시코 식당에 갔다. 그 멕시코 식당은 9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똑같이 있어서, 매번 내가 카페거리로 산책을 갈 때면 그와 앉았던 자리를 보게 된다.


멕시코 식당이 9년을 버틴건 참 신기한 일이다. 일기장에 써있기로는 그날 그 식당에서 먹었던 맥주와 나초는 정말 맛이 없었다. 나는 일본 남자친구와 헤어진 이후였지만 처음으로 결혼까지 생각했던 연인이었어서인지 계속 이별에 시달리고 있었고 그래서인지 그에게 철벽 태도로 대했었다. 한 살 더 많은 그를 '형'이라고 불렀으니 뭐.. 말 다 했지. 그럼에도 그가 보여준 모습은 정말 인상 깊었다.


그는 메뉴판 뒤에 숨겨져 제 구실을 못하는 꺼져 있는 양초를 거기에 있는지 어떻게 알고는 꺼내었고, 웨이터에게 묻지도 않고 자기가 알아서 새 양초를 찾아 교체한 후, 옆 테이블에 있는 흡연자 아저씨에게 라이터를 빌려 기어코 초에 불을 켰다. 테이블 위 켜진 초의 중요성을 아는 그의 그런 감성을 나는 몹시 소중해하고 사랑한다. 일기장에는 그를 이성의 상대로 보지는 않는다고 작성했지만 그래도 그가 분명 다른 사람과는 다른 존재감을 갖고 있었다는 건 확실하다.



(일기장)


"어쩜 그렇게 애써 보여주려 하지 않아도

자기는 일반적이지 않다는 걸 여실히 드러내는지..

매번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he has something that others don't or can't have."




올리버는 내가 알탕에 소주를 좋아한다는 걸 기억해주어 (대학교 때 한참 소주 잘 마실 땐 그랬다.. 지금은 아님) 2차로 알탕과 소주를 먹자고 했고 제법 콧김에서 소주 알콜향이 풍길 때쯤 그가 택시를 잡아 나부터 집에 내려다줬다. 택시가 잠시 나부터 내려줬던거라 올리버가 차에서 내려 아주 짧게 작별인사를 나눴는데.. 정말 예상치 못한 0.0001초의 뽀뽀였다. 너무 짧아서 놀란 토끼눈으로 어벙벙하게 있었는데.


그는 나지막히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좀더 일찍 할걸..."이라고 궁시렁대고 택시를 탔다.




(3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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