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벤져스 엔드게임’을 보고
*스포있음
1. 영웅이 아닌 삶은 어떠했냐는 질문에 캡틴아메리카는 대답을 유보한다. 이어지는 엔딩은 재즈곡을 배경으로 한 연인 페기와의 댄스씬. 너무나 뜬금없어 마치 신화와도 같이 느껴지는 이 묘한 결말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2. 복수를 다룬 콘텐츠는 독자에게 희망을 선사한다. 히어로물은 복수를 다루는 대표적인 장르 중 하나일 것이다. 과거 여러 문학과 매체 속 히어로들의 지당한 복수는 범죄 억제와 단죄 기능을 상실한 사회를 기반으로 기능해왔다. 그래서 복수가 카타르시스를 주는 사회는 기본적으로 법과 제도가 올바르게 기능하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한 방증이기도 하다. 이 연장선상에서 사람들이 히어로물을 소비하는 이유 중 하나는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현실 속에도 언젠가 이들처럼 멋진 영웅들이 나타나 정의를 바로잡아 줄 거라는 기대 때문일 것이다.
3. 어벤져스의 사전적 의미가 ‘복수자들(avengers)’인 만큼 이들의 목적도 결국 희망의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는 것일 테다. 하지만 ‘어벤져스 엔드게임’ 속 히어로들은 희망을 다루는 방식이 다르다. 지금까지의 개별 작품들은 어땠을지 몰라도 적어도 엔드게임이라는 한 편의 영화 속 히어로들은 희망을 전과 다르게 전달한다.
4.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 설명하기 이전에 히어로물이라는 장르가 어떻게 영웅을 신격화시키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통상 주인공들의 신격화는 과거 혹은 미래화를 통해 이뤄진다. ‘여기에 나 같은 영웅이 있었다’라는 과거의 전설, 혹은 ‘앞으로 너희의 안전은 내가 책임질게’라는 내일의 파수꾼으로 묘사하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엔드게임은 히어로들을 과거나 미래 속 인물로 묘사하지 않는다. 영화는 과감히 어제와 내일을 대변하는 히어로 둘을 제함으로써 오롯이 현재만을 남겨 놓는다.
5. 예상했듯 과거와 미래를 대표하는 인물은 각각 캡틴아메리카와 아이언맨일 것이다. 캡틴아메리카는 과거로부터 현재로 박제된 냉동인간이며, 아이언맨은 현대 기술의 끝단에 서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캡틴아메리카 시빌워’에서 둘이 무엇이 진정한 영웅 노릇이냐를 두고 벌인 다툼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마블은 엔드게임을 통해 앞으로 MCU를 이끌어갈 주인공은 과거나 미래로 대변되는 히어로가 아님을 분명히 밝힌다.
6. 엔드게임 속 미래를 밝히는 불은 꺼지고 영원할 것만 같던 과거의 전설은 노쇠한다. 미래와 과거에서 온 둘은 현재에서 퇴장한다. 실제 배우의 나이, 출연료, 계약기간 등을 떠나 스토리상 둘의 퇴장이 의미하는 바는 의미심장하다.
7. 어쩌면 마블은 지난 10년 동안 ‘희망은 어디에 있나’라는 질문을 계속 해왔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끝에 희망은 아직 오지도 않은 막연한 기대에 있지도, 이미 지나간 과거 속에 있지도 않다는 결론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바꿔 말하면 이는 히어로물을 다루는 마블이 10년을 끝으로 앞으로 어떻게 나아갈지에 대한 블루프린트이기도 하다.
8. 시간강탈 작전을 준비하면서 헐크는 말한다. 과거의 무언가를 바꾼다고 해서 현재 혹은 미래의 무언가가 바뀌는 것은 아니라고. 아기 타노스를 죽인다고 미래 타노스가 없어지지 않는다고 말이다. 또 닥터스트레인지는 최후의 전쟁에서 이 싸움에서 우리가 승리하게 되냐는 아이언맨의 질문에 “그걸 지금 말해주면 그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답한다. 그러니까 헐크와 닥터스트레인지의 말은 결국 과거나 미래 둘 다 현재를 바꿀 수는 없다는 것이다. 현재를 바꾸는 건 오로지 현재일 뿐이다.
9. 마블의 메시지는 결국 ‘지금, 바로, 여기’다. 모든 시작은 끝이기도, 모든 끝은 시작이기도 하다. 마블이 엔드게임을 통해 우리에게 남겨놓은 건 현재다. 마블은 이미 페이즈3에서 인종, 성별, 난민 문제 등과 같은 현실 속 사회 문제들을 MCU 속으로 끌고 들어왔다. 영화 엔딩 속 캡틴아메리카와 그의 연인 페기가 몸을 맡기고 있는 음악은 ‘It’s been a long, long time’이라는 제목의 재즈곡이다. 현실 속 수많은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키를 쥔 자는 현재에 존재하는 우리에게 있다. 이를 말하기 위해 이토록이나 오래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