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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시 Jan 31. 2019

원피스와 청귤 에이드

제주에서 나를 만나다 中

원수연의 만화와 원태연의 시를 손에서 놓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누구보다 감성 충만했던 시절이었고 그 마음이 오래갈 줄 알았다. 한참 시간이 흘러, 내가 그런 시절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기억이 가물거린다. 지금 보면 손발이 사라질 것 같은 글귀들이지만 그때는 폭 빠져 나를 대변해주는 것 같았다. 순정만화 외에는 만화도 도통 읽어본 기억이 없었다. 숙소를 검색하다가 원피스라는 만화를 모티프로 한 곳이 있다기에 어떤 분위기일까 궁금해서 마지막 밤을 보내기로 했다. 직접 키우는 귤 농장과 잘 키운 귤로 만든 에이드를 먹을 수 있다는 것도 선택하게 된 이유 중 하나이다. 노랑과 주황색이 강렬한 카페는 맛있는 빛을 내며 시선을 끌었다. 가격은 비쌌지만 산지에서 먹는 건 좀 다르겠지 기대를 걸고 청귤 에이드를 주문했다. 손님이 많지 않았지만 나오는 속도는 더뎠고, 시간을 보내기 위해 카페 이곳저곳을 사진에 담았다. 만화 원피스의 피겨들이 가득했고 귤을 닮은 색상들이 가득했다. 한참을 기다리다 드디어 받아 든 청귤 에이드는 가격이 비싼 만큼 양이 많았다. 맛은 또 얼마나 맛나던지, 청귤의 씁쓸함과 달콤함에서 청귤의 신선함이 느껴졌다. 에이드가 맛난 걸 보니 커피도 맛있을 것 같아 저녁에 마시려 했는데 아쉽게도 7시면 문을 닫는다는 걸 몰라서 마시질 못했다. 다음 날 아침을 기약했지만, 마지막 날 태풍 솔릭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렌터카를 반납하고 공항으로 달려가 오전 내에 제주를 빠져나가야 했다. 커피를 맛보지 못한 게 아직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게스트하우스는 카페 2층에 가정집처럼 생겼다. 넓은 거실과 주방, 그리고 화장실은 지은 지 얼마 안 된 아파트를 연상시켰다. 아파트와 비교하면 방 안에 여러 개의 침대가 놓여있다는 게 다르다면 다를 것이다. 그날은 나 말고는 손님이 없었으나 게하 스태프들과 한방을 써야 했다. 여성 전용이라서 2명의 여성 스태프가 있었고, 그 둘은 이틀씩 근무를 교대한다고 했다. 여느 20대가 그러듯이 밤새 전화로 수다를 떨고 TV를 보며 시간을 보내는 것 같았다. 저녁시간이 다가오자 오늘 근무가 아닌 게하 스태프가 함께 식사할 것을 제안했고, 나는 거절하기 어려워 그러자고 했다. 나는 사실, 거절도 잘 못하지만 낯선 사람과 단둘이 함께 있는 것에 불편함을 느낀다. 여러 행사에서 사회를 본다든지 발표하는 것에는 불편함이 없는데 단둘이 대화하는 것을 어색해한다.

그래도 상대방이 내 심정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최대한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동네 한 바퀴를 돌았고 좀 더 예민한, 사는 얘기를 꺼내야 할 때쯤 도착한 갈치조림 집에서 식사하기로 결정했다. 사실 5일 동안 제주여행을 하는 동안에는 2인 이상 주문 가능한 메뉴들이 많아서 제대로 된 한 상차림을 먹어본 적이 없었기에 불편하더라도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겠다는 기대감도 있었다. 다행히 그 집은 TV에도 소개되었던 맛집이었고 늦은 시간에도 식사 중인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는 뼈 없는 갈치조림과 고등어구이를 시켰고. 누구에게라도 권하고 싶은 그런 맛이었다. 그러나 끝을 향해가는 제주여행의 피로감과 단둘이 마주한 것이 불편했던지 얼마 먹지 못하고 수저를 내려놓아야 했다. 입은 계속 먹으라 신호를 보내지만 위는 더 이상 반응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때가 시작이었나 보다. 여행을 마친 후 집에 돌아온 다음 날부터 통증이 심해져 병원 신세를 져야 했고 장염 진단을 받았다. 며칠 고생해서 갈치조림은 먹고 싶지 않은데, 지금 생각해도 맛은 있었던 것 같다. 그날 그렇게 다소 불편한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바람이 제법 강해진 걸 느껴졌고, 돌아갈 길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들어가서 먹으려고 식당 가기 전에 사놓은 맥주도 먹지 못한 채 내일을 걱정하며 서둘러 잠이 들었다. 태풍 솔릭이 막 제주를 덮치던 날 아침, 게하 카페 문을 열기까지 기다릴 수 없었고. 예약한 오후 비행기가 결항할지 몰라 서둘러 렌터카를 반납하고 공항으로 향했다. 이쯤에서 렌터카 반납 이야기도 모두 궁금할지 모르겠다. 생각보다 심심하게, 꽉 막힌 제주시는 물론이고 렌터카 입구 좁은 골목도 매끄럽게 운전했다. 골목길을 나와 큰길에 접어들 때 사이드미러를 접고 운전한 사실을 알았다거나 깜빡이를 켜고 주차를 해놨다든지 하는 생각만 해도 뒷골이 오싹해지는 일들은 초보라면 누구나 겪을만한 일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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