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를 온 지 1년이 넘어가니 몸과 마음이 적응해 나가고 있다
지난 주말, 정말 날씨가 너무 좋았다. 이제 곧 추운 겨울이 찾아오겠지만, 지금 이 곳 코네티컷의 가을은 햇살과 단풍이 너무 예쁘다.
금요일. 딸아이의 학교에서 과학행사가 있었다. 생달걀을 높은 곳에서 깨지지 않게 떨어뜨리기 프로젝트이다. 처음엔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었다. '에그헌팅도 아니고, 달걀을 왜??' 그런데 제법 큰 학교 행사였다. 근처 대학교에서 사다리 불자동차가 와서 높은 곳에서 학생들이 만들어온 Egg Vehicle을 떨어뜨려준다. 하나씩, 하나씩. 그리고 학생들은 나가서 자신의 것을 찾아온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헤매지 않고 자기가 만들 것들을 찾아가는 게 신기하다. 남편과 나도 뒤늦게 합류해서 지켜봤다. 아쉽게도 딸아이는 킨더라서 가장 먼저 떨어뜨렸나 보다. 비록 딸아이의 작품이 어떻게 실패(?!)하는지는 보지 못했지만, 우리를 보자마자 딸아이는 웃으면서 자기껀 끝났다고 말한다. 깨진 달걀이 보인다. 승부욕이 큰 딸아이가 행여나 속상해하진 않았을까 살펴보았지만, 자기 꺼보다 다른 사람들 꺼 보는 게 더 재밌다고 한다. 또 이만큼 자랐구나. 내가 모르는 사이에.
그리고, 금요일 오후가 빨리 시작되었다. 지금 빠르게 이동하면 저녁을 먹고 해가 지는 바다를 볼 수 있을 거 같다는 생각에 우리 가족은 근처 바닷가 마을로 행선지를 급하게 정하고 이동한다. 피곤한 딸아이가 차에서 곯아떨어진다. 피곤했겠지. 한 주 동안 수고 많았어. 오늘은 금요일. Library에 가는 날이라서 두 권의 책을 빌려온 딸아이는 책을 함께 챙겨서 우리 과 함께 바다로 간다. 이렇게 한 시간 안이면 바닷가에 갈 수 있는 이 곳이 참 마음에 드는 순간이다.
정말 좋았다. 햇살과 석양과 그리고 마음의 여유가 느껴지는 금요일 저녁이었다. 아주 조금은 예전의 나를 발견하는 순간이지 않았나 싶다. 예전엔 참 충동적으로 여행을 많이 다녔는데, 이젠 정말 그러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가끔 이렇게 계획에 없었던 일정들이 종종 있었으면 좋겠다. 좀 더 재미나게 그리고 신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다음 날, 토요일. 한글학교에 가는 날이다. 어제저녁에 바닷가에 갈 때 한글학교 숙제도 챙겨갔다. 많지 않은 분량이라서 카페에 가서 우리가 차를 마시는 동안 딸아이는 열심히 한글을 따라 그린다. 아직 제대로 읽지 못하지만, 글자라는 걸 자기 스스로 따라 쓸 수 있다는 것에 조금씩 재미를 붙이고 있는 거 같다. 지난주, 아는 언니로부터 지금 시기가 딸아이에게 참 중요한 시기라는 걸 전해 듣고, 한글교육의 책임감과 의무감이 생겼다.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있는 딸아이는 집에서는 한국말을 쓰기 때문에 큰 걱정이 없었다. 그런데 킨더에 가면서부터 갑자기 영어사 용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우리에게도 영어로 물어보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아져가고 있다. '아, 지금 이 시점이구나!' 영어가 더 편해지는 순간이. 지금 한국말을 더 연습하지 않으면 어눌해져서 어느 순간에 한글 사용을 꺼려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루에 10분씩 엄마와 한국말 연습을 하기로 이야기하자, 딸은 그저 신나 한다. 그래, 우리 함께 해보자:)
한글학교 수업이 끝나고, 아는 부부 언니 오빠네와 함께 점심을 같이 먹고, 날씨가 좋으니 어디라도 함께 놀러 가자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근처에 위치한 내가 정말 좋아하는 중고서점, The Book Barn에 가기로 했다. 지난봄에 갔었는데, 유럽 시골마을 어딘가에 와있는 듯한, 동화 속 야외 서점이다. 정말 너무 따뜻하고 아기자기한 공간. 이번에도 정말 너무 좋았다. 딸아이도 함께 온 한 살 많은 오빠랑 제법 잘 논다. 처음엔, 낯가림과 함께 노는 걸 꺼려하고 어려워하는 거 같아서 우리들의 마음도 편치 않았는데, 좀 더 기다려주니, 이렇게 자연스럽게 같이 뛰어놀고 좋은 시간을 보내는 것을 보니 마음의 안도감과 감사함이 생긴다. 마음속으로는 좀 더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는데, 같이 좀 더 놀라고 강요하기엔 억지스러워 보이는 거 같았다. 엄마 아빠의 사회적 관계(?) 때문에 딸아이의 자유의지를 우리가 강요할 수는 없기에. 속상하지만, 함께 모이는 날이면 거의 따로따로 노는 경향이 있었다. 자주 만나고 이 곳에 와서 만난 몇 안 되는 친한 한국 가정이기에 좀 더 친해지고 싶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시간이 지나다 보니 더 자연스럽게 친해져가고 있는 두 아이를 보면서 참 감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딸아이에게도 적응의 시간이 필요했다. 우린 그걸 이제야 알았다. 다행히도 우리가 우물쭈물하는 그 사이에 딸아이에게 강요하지 않고 기다려줬다는 게 감사했다.
그리고, 주일. 오늘은 교회 일정밖에 없다. 지난 이틀 동안 연속으로 바닷가를 놀러 갔더니 조금 무리하긴 했었다. 오늘은 좀 쉬어가는 하루를 만들어도 될 거 같다. 그런데 예상에도 없던, 아는 언니네 집을 방문했다. 남편분들은 교회 천막공사에 인력동원(?)이 되어서 기다리는 동안, 얘들도 집에서 더 놀게 하면서, 자기네 집에서 차나 한 잔 하자고 했다. 따뜻하고 배려있는 제안에 아무 생각 없이 동행하게 되었다. 집으로 이동하는 동안 차 안은 시끌 벌쩍 하다. 딸아이는 거의 춤을 추면서 차에서 나오는 vbs 노래를 언니 오빠들과 함께 따라 부른다. 따로 만나서 놀아본 적은 없지만, 주일마다 잠깐씩 보는 언니 오빠들과 같은 차를 타니 너무 신이 났나 보다. 요즘은 교회에 가서도 느끼는 거지만, 이제 교회 구석구석을 잘 아는 딸아이는 혼자서도 잘 돌아다닌다. 처음 교회에 왔을 땐 어디를 가든 내가 뒤따라가서 봐주어야 했지만, 이젠 언니 오빠들과 제법 잘 지내는 거 같아서 참 마음이 좋았다. 주일학교에서도 언니 역할을 곧잘 한다는 선생님의 피드백이 한없이 감사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오늘 시간을 보냈던 언니네는 예전부터 참 좋은 부부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개인적으로 따로 시간을 내서 만날 사이는 아니었던 언니 오빠네 부부네였다. 그런데 이렇게 예정에 없던 만남을 하고 나니 더 친해진 기분이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참 편하고 좋았다.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는 기분이었다고나 할까? 딸아이도 언니 오빠랑 노느라고 1층으로 내려올 생각을 안 한다. 이런 순간이 오긴 오는구나. 아직도 적응이 안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좋은 사람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고 나면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적응해나가고 있는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이제 서서히 이 곳에, 그리고 이 곳 사람들과 친해져 가고 있구나. 이사 온 지 1년이 지나자 적응이 되어가고 있음을 새삼스럽게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