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라톤 나갑시다!
작년 9월, 에너지 넘치는 회사 동기 D의 연락이었다. 운동이랍시고 매일 아침 1km 정도를 달리고는 있었지만, 10km 마라톤이라니. 나는 자신 없었다.
- 10km는 무슨 나 5km도 뛰어본 적 없는데. 5km로 하면 안 될까?
- 에? 5km요? 할 거면 10km, 제대로 해야죠!
그렇게 어영부영 동기들과 10km 마라톤에 참가하게 되었다. 취미가 등산이며, 마라톤인 친구들과 함께 뛰다가 혼자 낙오될까 걱정이 되었지만, 출발선 앞에서 운동화 끈을 단단히 묶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탕!
출발음이 터지고, 우리는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라? 친구들은 ‘가볍게’ 달리기 시작했지만, 그 속도에 맞추자니 내겐 전력질주였다. 오 마이갓- 망했다.
죽는소리를 내며, 나는 점점 느려지고, 동기들은 앞서갔다. 하지만 D는 먼저 가지 않고, 계속 나를 기다려줬다. 다리의 느낌이 사라지고, 당장에 호흡곤란으로 쓰러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나 때문에 느리게 가는 D에게 미안해서라도 ‘젖 먹던 힘까지’ 짜내서 한 걸음 더 뛰었다. 그렇게 ‘더는 못해’라고 외치면서, ‘할 수 있어! 조금만 더 가면 돼!’라는 소리에 힘입어 생애 첫 10km 마라톤을 완주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다리를 절뚝거리며 겨우 대중교통에 몸을 실었다. 정말 다시는 못 걷는 줄 알았다. 그날은 물론이요, 일주일 내내 계단도 겨우 오르내리고, 의자에 앉는 일도 어찌나 고통스럽던지.
그런 육체적 고통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그날의 성취는 1년이 지나도록 마음에 오래 남아, 나는 올해에도 같은 마라톤에 참여하게 됐다. 이번엔 친구를 따라서가 아니라, 온전히 나의 페이스대로 달려보기로 했다.
다시, 준비, 탕-
내 페이스대로 뛰어서일까. 두 번째 마라톤에서는 당장의 한 걸음보다 내가 뛰고 있는 이 길에 대한 생각이 많이 들었다. 이 길이 인생과 많이 닮아있다는 생각이 든다. 괜히 인생이 마라톤이라고 하는 게 아니다.
10km 마라톤이니, 1km 당 10년의 인생을 대입해 본다. 처음엔 즐겁게 달린다. 광활하게 펼쳐진 마라톤 코스가 아름답다. 뛰는 내가 멋지다. 그러면서 열심히 달렸지만, 고작 10년 지났다.
이제 시작이니까, 뒤처지지 않으려면, 나중에 힘들지 않으려면 쉬지 않고 달려야지, 그러다 보니 또 고작 20년, 이제 더는 못 갈 것 같은데 30년... 이 지독하게 고통스럽기만 한 인생은 언제 끝난단 말인가. 멈추고 도망가고 싶은 생각만 든다.
하지만 도망갈 순 없고, 길은 하나. 다들 어떻게 뛰는지 괜히 돌아본다. 기록은 포기한 듯 쉬엄쉬엄 걷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적당히 회복한 후 다시 전속력으로 다시 질주하는 사람들, 점점 나에게서 멀어져 가는 사람들이 보인다. 나처럼 뛰는지 걷는지 모를 속도로 열심히 달리고 있는 거북이들도 있다. 아, 다들 아무튼 다들 나아가고 있구나, 생각한다.
그런데 저 쪽, 마라톤 코스 옆에 있는 카페에 들어가 벌써 마라톤은 포기하고 정취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아이고, 포기하고 도망가는 방법도 있긴 있네.
그러다 겨우 5km가 되면 물을 배급해 준다. 기다렸다는 듯이 안도하며 잠시 쉬어가는 사람들. 계속 뛰던 길을 마저 뛰면서 물을 입 안에 끼얹어버리고 남은 길을 가는 사람들, 이만 만족하면서 아주 주저앉아버리는 사람들. 그리고 새로운 출발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언뜻 5-60대의 어른들이 지금까지의 인생을 수확하고 새로운 인생을 준비하는 모습 같다.
7km 즈음되면, 꽤 많은 사람들이 슬슬 얼마나 남았는지에 집착하기 시작한다. ‘아직도 7킬로가 안되었다고?’하며 절망하는 소리가 들린다. 7km 표지판에 멈춰 서서 주저앉는 사람들도 보인다. 몸이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앞으로 가야 할 길이 한참이나 남았다는 것이 괴롭지 아니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더 달려야 한다는 사실에 절망할 때에, 몇몇 사람들은 7,8,9km 표지판 앞에서 밝은 모습으로 사진을 찍고 기념한다. 매 순간의 성취를 확인하고 기념하는 것도 마라톤을 즐기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겠구나. 사람들이 살면서 기념일을 챙기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그렇게 각자의 방식으로 달리다 보면 결승선이 보인다. 어떻게 달려왔건, 결승선을 지나면 완주 기념 메달을 목에 걸 수 있다.
삑-
기록 측정과 함께 결승선을 지나니 괜히 기록에 대한 아쉬움이 남았다. 처음에 조금 더 열심히 달릴 걸, 속도 조금만 더 내 볼 걸, 하면서. 내 인생의 끝자락도 어쩐지 이런 기분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년과 똑같이 무릎과 발목, 골반이 빠져버릴 것 같은 통증이 찾아왔다. 작년처럼 또 당분간은 제대로 걸어 다니지 못할 것 같았지만, 나는 이 놈의 괴로운 마라톤을 내년에도 참여할 것 같다. 어쩐지 인생을 한 회차 살아보는 느낌이 들어서다.
다들 인생이라는 마라톤에서 어떤 페이스로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 이번 인생에서 나의 페이스는 8분 21초. 느리지만 쉬지 않고 내딛는 인생이었다. 다음 생에는 조금 더 부지런히 빠른 인생을 살아볼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