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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정문 Nov 24. 2023

사람은 왜 살아야 할까?

사람은 왜 살아야 할까.


나는 아주 오랫동안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고민해 왔다. 그 시절의 기억이 거의 없는 6살 즈음, 엄마가 사다 준 유아용 철학 만화의 한 꼭지로 ‘사람은 왜 사는가?’라는 에피소드가 아직까지 기억이 난다. 그 당시 즐겨보던 퀴즈책에서는 Q.질문이 있으면, A.답이 항상 곧장 나오곤 했는데, 그 철학 만화책은 끝까지 읽어도 도대체가 그래서 사람이 왜 사는지 알려주지 않았다.     


그렇게 머리가 좀 커서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하는 책들을 탐독해보기도 하고, 심지어는 대학을 철학과로 가서 사람이 도대체 왜 사는지를 고민해보고자 했지만, 끝끝내 명확한 답을 얻지 못했다. 철학수업에서는 왜 사는지에 대한 고민을 풀기 위해서, 오히려 우리가 경험하고 느끼는 것, 생각하는 것들을 하나하나 꼬집는 방식을 택했는데, 직관적이지 않고 세부적으로 파고드는 것을 싫어하는 내 성격상 그것이 딱히 마음에 꽂히지는 않았던 것.     


서른 즈음이 되어서야 스스로 내리게 된 결론은 ‘사람은 왜 살까?’라는 질문은 답이 있을 수 없는 도덕적 명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무단횡단을 하면 안 된다.’, ‘환경오염을 시키면 안 된다.’와 같이 그저 사람들이 믿고 싶고 유익하다고 생각되는 방식으로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것이라는 게 나의 잠정적 결론이 되었다.     


그래서 나의 사고는 결국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기로 했다. ‘왜 살까?’가 ‘뭘 위해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내가 알아서 결정하고 결단 내리면 그만인 이 질문조차도 결코 쉽지 않았다. 사실, 왜 사느냐 하는 문제만큼이나 어려운 것이 무엇을 위해 사느냐는 문제였다. 최소한, ‘사람은 왜 살까?’ 하는 문제는 다른 이와 공유할 수 있는 질문이라면, ‘그럼 나는 무엇을 위해 살까?’하는 문제는 오롯이 내가 답을 내려야 하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내가 이 삶을 통해 무엇을 얻고자 하는지, 자신에 대해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인데, 당장에 오늘 먹을 점심 메뉴 하나 고르는 것도 고민이 되니, 그게 어디 쉬운가 말이다.

오늘 아침에는 다시 월급쟁이가 되어 안정적으로 살고 싶었다가도, 저녁에는 굶어 죽어도 작가가 되고 싶은 게 내 마음이다.     


곧 2024년이 온다. 내겐 서른이 되는 해다.(그마저도 나라에서 –1 해준 것을 감안해서다.) 나는 서른까지는 명확한 삶의 의미와 목표를 찾고 싶었다. 그리고 나의 30대를 그것을 향해 묵묵히 나아가는 삶으로 꾸며보고 싶었다. 하지만 여전히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 고작 서른에 과분한 욕심을 낸 것일까?     


그러니 서두를 것 없이 조금 더 시간을 들여보기로 한다. 삶의 의미를 찾아내는 일을 일단의 목표로 두기로 한다. 명확한 나의 답을 찾지 못한 나의 차선책이다. 솔직히 지금 마음으론, 인생의 답 같은 건 평생 못 찾을 것 같긴 하다.


다만 내가 의지하는 것은, 오늘 하루에도 선택해야 할 여러 가지 것들(점심을 뭘 먹을까, 어떤 소재로 글을 쓸까 등)로부터 내 삶의 의미들이 조금씩이나마 드러날 것이란 희망이며, 그렇게 물렁하게 살던 내가 생의 마지막이 되어서야 '이게 최선이다.' 하며 두고 갈 엉망으로 쓴 마지막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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