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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래 Dec 28. 2022

가능성은 현실이 되어

영화, <라스트 홀리데이> (Last Holiday, 2006)


마스크 안에서도 코 끝이 시려오는 바람을 느끼고, 어디선가 익숙한 선율이 흘러나올 때. 어둠이 슬며시 내려앉으면 형형색색의 불빛들이 그곳을 밝히는 연말 거리를 거닐다 보면 생각이 나는 영화가 있다. 바로 영화 <라스트 홀리데이> (Last Holiday, 2006)이다.   



*이 글은 해당 영화에 대한 스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라스트 홀리데이 (Last Holiday)


제목에서도 쉽게 유추가 가능하듯이 영화 <라스트 홀리데이>는 평범한 마트 판매원으로 일하던 주인공 조지아 버드가 하루아침에 시한부 선고를 받은 뒤, 하고 싶었지만 그동안 실천으로 옮기지 못했던 목록들을 하나씩 지워나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길어봤자 4주, 고작 3주가 남았다는 의사의 말을 들은 조지아에게 시간은 그 어떤 가치보다 귀한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말을 자꾸만 가로채는 직장상사의 휴대폰을 박살 내며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오기도 하고, 좁은 비행기 기내 안에서 의자를 본인 쪽으로 젖히는 진상 손님에게 일침을 가하고 1등석으로 자신의 좌석을 옮기기도 한다.   



그녀는 언젠가의 꿈으로만 남겨두었던 '가능성의 책(Book of possibilities)'을 펼쳐 남은 시간을 보내기로 결심한다. 멋진 드레스를 입고, 자신이 즐겨보던 요리 프로그램 속 디디에 주방장이 만든 음식을 종류대로 주문하여 맛보기도 하며, 최고급 호텔에 묵는다. 어디서든 당당하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그녀를 보며 같은 숙소에 묵던 고위층 인사들은 그녀를 억만장자로 오해하게 되는 해프닝까지도 일어난다.  


사실 영화의 결말은 뻔하다면 뻔하다. 그녀의 시한부 판정은 실은 검사 기계 오류에 의한 오진이었으며, 그녀의 모습을 통해 삶의 의미를 재고하게 되는 주변인들의 이야기. 조지아 역시 본인에게 주어진 매일을, 최선을 다해 살게 되었다는 자막을 마지막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가능성은 현실이 되어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의 유한함을 자꾸 잊어버린다.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들과 내일도 함께일 거라는 믿음. 그 믿음이 주는 착각 속에서 하루를 보낸다. '영원한 건 절대 없어'라는 노래 가사를 자주 흥얼거리면서도 또다시 영원을 믿는다.  


이별을 마주하게 될 날이 오늘은 아닐 거라며 애써 외면하던 죽음이 기어이 내 앞으로 찾아왔을 때, 할아버지의 영정 사진을 보며 나는 무슨 생각을 했더라. 조금 더 자주 찾아뵐 걸, 짬을 내서 전화라도 드릴 걸, 명절 때 방에 틀어박혀 핸드폰만 하지 말고 말동무가 되어드릴걸. 그 후회들은 내 안의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나의 목구멍을 깊숙하게 찌르곤 했다.


이렇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매번 죽음을 목전에 앞두고서야, 혹은 그것과 얼굴을 마주해야지만 지나가버린 일상의 소중함을 떠올린다. 삶의 기반에는 언제나 죽음이 깔려있음을 깨닫게 된다.  


영화 속 조지아가 시한부 판정을 받고 난 후 다시 펼쳐본 가능성의 책 안에는 그녀 스스로의 솔직한 욕망들이 담겨 있었다. 그녀가 꼭 하고 싶었던 일들, 가능성으로만 덮어두었던 그녀의 목록들은 현실로 되살아나 그녀의 삶을 채우기 시작한다.  


좋은 일(가능성)은, 기다리기만 해서는 나를 찾아오지 않는다. 의사의 선고 직후 '좋은 일이 오기만을 기다렸는데!'라며 울먹이던 그녀가 자신의 욕망에 솔직해지고, 가능성을 본인의 삶으로 하나씩 옮겨 올 시점부터 영화는 극적인 행운들을 그녀 앞에 선물한다. 이처럼 인생에서의 좋은 일은, 내가 지금 찾아 떠나야지만 그제야 내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다음 생에는 우리 좀 다르게 살아보자.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사랑하고 세상을 구경하는 거야. 그저 두려워하지 않으면 돼."

영화 <라스트 홀리데이> 중


오진이라는 또 한 번의 행운이 그녀에게 찾아오면서, 우리는 앞으로 그녀가 지난 호텔 방 거울 앞에서 읊조렸던 대사처럼 남은 생을 살게 될 것이라는 걸 짐작하게 된다.  



영화는 조지아 버드라는 인물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오늘'의 소중함을 말한다. 오늘을 담보로 삼아 보장할 수 없는 내일을 대출받는 삶, 그 안에서 손발이 꽁꽁 묶인 채 오늘을 낭비하지 말라고. 모든 순간이 당신에게 '라스트 홀리데이'임을 명심하라고 말이다.  


그래서 매번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내일이 아닌 '오늘'을 좀 더 잘 살아보기 위해 내가 원하는 것에 솔직해지게 된다. 내가 연말이 되면 결말이 뻔히 보이는 이 영화를 자주 꺼내어 보게 되는 이유다.


저물어가는 한 해를 마주하는 연말, 또 한 번의 이별의 순간이다. 해(year)의 죽음 앞에서 '~할 걸' 혹은 '~해볼 걸'과 같은 후회를 하기 쉬운 시기이기도 하다. 올해 나는 또 어떤 후회들을 늘어놓았던가.  


혹시 당신에게도 조지아처럼 서랍 깊숙한 곳에 넣어두었던 '가능성의 책'이 있다면 이 영화와 함께 꺼내어 보았으면 좋겠다. 당신이 꿈꿔왔던 가능성이 현실로 바뀌는 순간, 그 시작이 오늘이 되길 바라며.  





해당 글은 <아트인사이트>에 기고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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