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더 발레리나>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정현종, <방문객> 중
한 사람은 하나의 세계라고 했다. 그렇기에 한 사람이 오는 건, 하나의 세계가 나에게 다가오는 거라고. 나는 이 말이 사람과 사람 간의 일대일 직접 관계에만 해당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더 발레리나> 공연을 본 뒤로는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관객이 되어 누군가의 무대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의 세계가 나에게 밀려온다.
<더 발레리나>의 구성은 보통의 발레 공연과 달리 조금 독특하다. 학창 시절 문학시간, 시험에 자주 나온다며 귀가 닳도록 들었던 액자식 구성을 닮았다.
공연의 구성을 대략적으로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공연을 준비하는 연습실 - 발레 공연 - 공연이 끝난 뒤의 연습실'의 구성이다. 발레 공연 무대 중에도, 무대의 4분의 1은 무대를 준비하거나, 무대를 마친 무용수들의 백스테이지이다. 이러한 구성을 통해 관객들은 무대 뒤에 가려져 알지 못했던 무용수들의 좀 더 솔직하고 날것의 모습을 엿볼 수 있게 된다.
본 공연이 시작되기 전부터 무용수들은 연습실로 꾸며진 무대 위에서 몸을 푼다. 입장으로 소란스럽던 객석에서는 일순간 긴장감마저 맴돈다. 그리고 시작된 공연. 많은 대사는 이뤄지지 않는다. 연습실을 배경으로 한 구간에서는 발레마스터(발레단의 훈련 교사 겸 안무가)의 안무 코칭 대사 정도가 전부다.
공연에서 눈에 띄는 주인공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가 주인공이다. 스토리 진행상, 연습 중 부상을 입은 발레리나 대신 무대에 서게 된 신입단원이 존재하긴 하지만 크게 두드러지는 편은 아니다. 무대를 향해 달려가는 주인공들 중 한 명일 뿐이다.
드디어 무용수들이 준비한 무대를 선보이는 당일. 때로는 무대라는 바다를 유영하는 듯한 몸짓으로, 어느 구간에서는 서러움이라는 감정을 표현하기도 한다. 그들의 몸짓은 무대라는 오선지 위를 가득 채워 나가는 음표 같다. 각자의 음표가 모여 하나의 선율이 된다. 그렇게 그들은 관객들에게 '보이는 음악'을 선사한다.
그들의 연습과정을 지켜보았기 때문일까, 관객들은 자연스레 그들의 무대를 숨죽이며 함께 응원하게 된다. 이 공연의 구성이 가지는 가장 큰 장점이다. 관객은 무용수의 몸짓 안에 녹아있는 땀방울을 느낀다. 그리고 하나의 무대가 끝날 때마다 환호보다 더 큰 박수갈채를 무대로 보낸다. 이 무대를 위해 너희가 흘렸던 땀방울을 우리는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고, 저마다의 마음을 가득 담아서.
삶을 살아가다 보면 과정보다는 결과를 중시할 때가 많다. 사회에 나와서 수도 없이 들은 말 중 하나는 '열심히 할 생각 말고 잘할 생각을 하라'였다. 사실 나도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보다는 잘하는 사람이 내 동료였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품는다.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는 '과정'보다는 겉으로 보이는 '결과'로 누군가를 평가하는 건 가장 손쉬운 방법 중 하나다. 호수 위 백조의 모습을 보고 우리는 우아함을 이야기하지만, 호수 아래 쉼 없는 발길질에 대해서는 자주 언급하지 않듯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나는 꽤 자주, 과정이 가지고 있는 힘을 잊을 때가 많다. 어찌 됐든 결과만 잘 나오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하루를 보낸다.
그래서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를 마주하게 될 때면, 그 결과를 위해 달려온 과정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잊으려 했다. 고작 이 결과를 얻기 위해서 그렇게 노력했다니. 그동안 내가 쏟았던 시간과 마음이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더 발레리나>는 그런 나에게 과정이 가진 힘을 다시금 일깨워준다.
무대를 단단하게 채우는 무용수들의 몸짓은 지난날의 연습으로 더욱 매끄럽게 가공되어 관객들과 마주한다. 그들의 우아한 몸짓은 곡선처럼 극이 끝날 때까지 이어진다. 마치 인생 같다. 인생은 결코 어떠한 결과로 분절되지 않는다. 어쩌면 내가 지금까지 실패라고 여겨왔던 결과들은 진짜 결과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인생이라는 흐름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한, 우리는 과정 속에서 살고 있는 거니까.
무대가 끝나도 삶은 계속된다. 방금 전까지 무대였던 공간은 연습실이 되고, 무용수들은 다음 무대를 위해 다시 연습에 매진한다. 아마 다음 공연도, 다다음 공연도 마찬가지겠지. 끝이라고 생각했던 지점은 무언가의 시작점이 된다. 예전엔 이게 참 야속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제는 망쳐버린 오늘이 인생의 끝이 아닌 내일의 시작이라는 게 묘하게 위로로 닿는다. <더 발레리나>의 구성이 '연습실 - 공연 - 연습실'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내일을 기대하는 듯 벅찬 얼굴로 연습실로 나서는 마지막 단원의 뒷모습을 마지막으로 <더 발레리나>의 공연은 끝이 난다. 70분의 시간 동안 무용수들의 일상을 잠시나마 엿본 기분이다. 공연장 밖을 나오자 내가 그동안 알지 못했던 세계가 내 세상의 일부를 가득 채운다.
해당 글은 <아트인사이트>에 기고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