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G-SHOW : THE LUNA>
몇 보 걷지도 않았는데 온몸에는 땀이 흐르고, 중력보다 무겁게 짓누르는 듯한 습도에 숨은 턱 막혀온다. 근처에서 열리는 야구 경기로 이미 역 주변은 인산인해. 사람들의 열기까지 더해 체감온도는 오늘 아침 뉴스 속 수치를 훌쩍 넘긴 지 오래다.
이런 날씨를 피해서, 뮤지컬 [G-SHOW : THE LUNA]를 보러 잠실학생운동장으로 향한다.
처음 [G-SHOW : THE LUNA]에 대해 듣게 되었을 때는, 느낌표보다는 물음표가 더 많이 찍히던 것이 사실이다.
빙판 위 뮤지컬이라니, 게다가 극 중 등장인물들의 절반은 뮤지컬 배우가 아닌 스케이터다. 서로 다른 장르가 만나 하나의 무대를 이루어 간다는 점에서 '과연'이라는 단어가 좀처럼 떼어지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누가 스케이터였으며, 배우였는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의 느낌표로 가득했던 뮤지컬이었다.
무더운 여름, 당신이 피겨와 뮤지컬이 결합된 독특한 형식의 뮤지컬 [G-SHOW : THE LUNA]를 찾게 되었다면 눈여겨보면 좋을 몇 가지 포인트를 정리해 본다.
뮤지컬 [G-SHOW : THE LUNA]의 구성은 간단하다. '루나 아일랜드'를 둘러싸고 이곳을 지키고자 하는 이들과 그렇지 않은 자의 이야기. 단순한 플롯이지만, 뮤지컬의 내용이 남의 이야기 같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뮤지컬 속 설정된 가상의 배경, 여름과 겨울만 남게 된 2060년이 우리가 맞이하게 될 가까운 미래와 닮아 있기 때문이다.
연일 이어지는 폭염 특보와 최장기간 열대야라는 헤드라인 기사들이 매일같이 올라온다. 그간 입추와 처서가 지나면 귀신같이 달라지던 바람의 감촉을 느끼던 것도 옛말이 다 됐다. 여전히 바람의 습도는 무겁고, 날씨는 무덥다. 조상님들도 이런 기상천외한 기후위기까지는 내다보지 못하셨겠지.
이와 같은 현실과 맞물려 아이들과 함께 [G-SHOW : THE LUNA]를 찾았던 어른들까지 극에 몰입하게 된다. 빙판 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가 곧 뮤지컬을 보고 있는 나의 이야기가 된다.
그렇게 극을 보고 있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만약 나라면, 루나 아일랜드를 끝까지 지켜내기 위해 노력할 것인가? 아니면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노르말리스를 바라보며 루나 아일랜드를 우주정거장으로 바꾸겠다는 아틀라스의 의견에 동의할 것인가?
노르말리스와 루나 아일랜드를 끝까지 지켜야지,라는 말이 목에 걸려 쉽사리 나오지 않는다. 죽음을 목전에 앞둔 노르말리스가 기적적으로 살아날 확률이 얼마나 될 것인가라는 머릿속 계산기가 윙윙 돌아간다.
기적 (奇跡/奇迹)
1. 상식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기이한 일.
2. 신(神)에 의하여 행해졌다고 믿어지는 불가사의한 현상.
우리에게 '기적'은 현실의 반대편에 있는 단어. 좀처럼 와닿지가 않는다. 허황된 꿈같은 이야기보다는 현실적이라는 대안이라는 명목하에 후자 쪽으로 의견이 기운다. 실제로 극 중에서도 윈터의 아버지, 아틀라스가 이와 같은 논리로 루나 아일랜드를 우주 정거장으로 만들 계획을 세우기도 한다.
기적을 바라는 마음은 정말로 허황되고, 세상물정 모르는 바보 같은 생각일까? 이러한 질문이 고개를 들 때쯤, [G-SHOW : THE LUNA]는 '멈춰 있을 순 없어'라는 넘버로 대답한다. 서로의 어깨를 붙잡고 발을 내딛자고. 그렇게 윈터와 가람을 비롯한 등장인물들은 루나 아일랜드를 지키기 위한 방향으로 한걸음씩 나아간다.
허무주의는 세상을 바꿀 수 없어요. 삶은 어쨌든 계속되니까요.
구희, <기후위기인간>
'나 하나로 되겠어?'로 시작된 작은 비관은 포기를 낳는다.
기적을 만드는 건 허무주의자들이 아닌 낙관주의자들이다. 그렇기에 멈출 수 없다. 기적을 바라는 마음을 모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가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도 포기하지 않고 노르말리스와 루나 아일랜드를 지키는 방향으로 계속 나아간 등장인물들이 결국 섬을 지켜냈듯 말이다.
[G-SHOW : THE LUNA]가 피겨와 뮤지컬이라는 경계의 벽을 허물듯, 각 캐릭터들은 가진 저마다의 매력으로 시원스레 빙판 위를 가른다. 극에 참여한 스케이터들과 배우들에게도 도전이었을 이번 뮤지컬에서 우리는 '뮤지컬 아이스쇼'라는 새로운 가능성을 엿본다.
뿐만 아니라 출연진들과 함께 하얀 빙판 위를 채우던 다양한 미디어 아트는 풍성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80분이라는 시간 동안 인터미션 없이 극이 진행되지만, 곳곳에는 관객들과 함께 소통하는 작은 이벤트도 준비되어 있다.
아마 올여름, [G-SHOW : THE LUNA]는 공연장을 찾은 가족단위 관람객들에게 잊지 못할 추억을 선사할 것이다.
해당 글은 <아트인사이트>에 기고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