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들판에는 고운 빛깔(시각)과 향기 나는(후각) 들꽃도 있다. 그런가하면 개성 있는 목소리로 우는 새(청각)들도 있다. 평범해 보이지만 그런 것만도 아니다. 태풍도 있고 우박도 있다. 때로 천둥소리와 회오리바람이 일어 조화와 부조화, 미와 추, 생과 사가 혼재(混在)해 있는 불가사의의 이치도 있다.
시는 언어로 빚은 혼의 예술이다. 이런 오감(五感)의 요소가 잘 어우러진 그림(평면적인), 그 이상의 장엄한 오케스트라(입체적인)를 만들어 내는 것이 시의 이상이다.
하지만 자연이 그러하듯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있다. 시론에서도 지금까지 불가피하게 좋은 시와 안 좋은 시로 나누었다. 하지만 자연을 좀 더 섬세하게 보면 빛의 작용에 따라 상태가 변한다는 이치를 발견한다. 이런 원리에 따라 시를 좀 더 가변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생태학적 접근이 필요해 보인다.
시를 바라보는(해석하는) 위치와 관점에 따라, 더 나아가 시대를 읽는 안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이런 방식에 따르면 조건이 충족되어 흠결이 적은 경우(양지의 시)와 어떤 조건에 가려져 있어 진면목을 드러내지 못하지만 재평가의 여지가 있는(그늘의 시) 경우로 나눌 수 있다. 그 ‘조건’이란 통념, 관습, 이념, 왜곡에 의해 작품의 실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경우다. 그리고 여기에 속하지 않지만 나름의 중추역할을 하는 대부분의 작품군(중도의 시)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기존의 취하고 버리는(取捨), 닫힌 관점에서 가능성을 열어두는, 열린 관점에로의 모색(전환)이 가능하리라 본다.
계간문예 72호(23. 여름호)에 수록된 시편들은 지난여름을 한층 풍성하게 해주었다. 이제 인류를 공포와 절망의 늪에 빠뜨렸던 팬데믹의 끝자락에 와있다. 다시 마음을 열고 희망을 영접하는 시간, 문학은 웅크렸던 영혼의 눈을 뜨게 하는 도화선이 어닌가?
이번호 비평 대상작으로는 ‘신작시‘와 일간지 신춘문예 당선자 신작특집에 중점을 두었다. 양지의 시가 있는가 하면 그늘의 시가 있고 이들을 받쳐주는 감성의 시들이 들꽃처럼 개성을 드러내고 있다. 이 중에 대상을 관조하여 본성을 꿰뚫어보는 심안(心眼)의 시들이 눈에 띈다.
햇살이 /유리창을 뚫고
거침없이 들어온다
유리창이 너무 깨끗하다
본래 더럽거나
깨끗함이 없었으니
닦을 것도 없다 (중략)
-<유리창 앞에서>일부 (구재기)
구재기 시인의 <유리창 앞에서>는 안과 밖(현상과 본질)이라는 세상을 투과하는 마음의 눈을 통해서 대상을 관조한다. ‘햇살’은 현상(외부의 유혹)이지만 유리창은 본성과의 경계이다. “본래 더럽거나/ 깨끗함이 없었으니/ 닦을 것도 없다”
마음이 물들지 않으면 더 이상 닦는 일도 의미가 없다. 유리창의 청결을 통해서 내면의 청정으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런거린다”는 정지용의 ‘유리창’이 세속적 슬픔의 객관적 상관물이라면 구재기의 ‘유리창‘은 탈속적 무위(無爲)의 달관을 보여준다.
돌 속엔 온쉽표가 들어 있습니다
물소리를 읽을 순 있지만
졸졸 흐르는 소리를 따라 부르지는 않습니다
고저음 불가로 움직이지 않는 돌
오선지를 오르내리며 음표들은 구르거나 매달리며
모양이나 무게를 여리게 또는 최저로 놀기도 하지만
(중략)
-<온쉼표>일부 (김인숙)
‘돌’이란 무정물을 통해서 밖으로 표출되지 않은 다양한 감정(음표)을 읽어내는 투시의 안목을 지녔다. 관조와 상상력의 위력이다. 돌은 자체로 ‘온쉼표‘지만 들을 수 있고 음표를 통해 자신의 음악을 창조하는 능력을 지녔다. 하지만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므로 돌은 한 번도/ 조율된 적이 없는 완벽한 악기입니다” 본성의 침묵이 만들어낸 ‘완벽한 악기’인 ‘돌‘은 세상을 향한 무언의 경책도 담고 있다. 혼탁한 말과 소리로 가득 찬 인간세상은 역설적으로 돌의 침묵을 배워야할지 모른다.
곳곳에 검버섯은 피어나고
기억도 안개처럼 흐릿해져간다
이제는 떠날 때 내려놓아야 할 때
눈을 감고 추억을 더듬거리며 빗장을 잠근다
우주가 조용해져 간다
-<폐가> 일부 (권영하)
수명을 다한 ‘폐가‘를 통해 삶의 무상을 그렸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낡아가고
멈추고 허물어져 수명을 다한다. 인생도 그러하다. 생겨난 것은 예외가 없다. 존재하는 것은 인연에 따라 잠시 모습을 드러낼 뿐, 불변의 실체가 없음을 드러낸다.
‘빗장을 잠그고’ 마침내 “우주가 조용해져간다“는 존재의 소멸(니르바나)이다. 대상을 성찰하여 집착과 욕망의 불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보여준다.
축축한 색을 칠하면
사람들이 살아날 것 같은데//
물기를 가진 것들은 빠르게 말라가고
빈 곳마다 사람을 그리고 또 그렸다//
옆집에 사는 남자는//
선글라스를 끼고 그림을 그린대 //
그가 그린 그림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을까// (중략)
-<내가 그린 그림> 일부 (차유오)
그림을 그리는 행위를 통해 인간의 심리변화를 유추하는 심리주의 계열의 작품,
주제나 기법에 있어 다분히 실험적이다. 대상의 외면묘사나 해설중심의 많은 시들에 비해 화자의 행위를 통해 내면심리를 포착한다. 화자와 ‘옆집 남자’(의문의)의 대비를 통해 오늘의 위태로운 휴먼에 대한 회의와 의문을 제기한다.
다음으로 23년 ‘신춘문예(지방신문) 당선시인 신작 특집’이 관심을 모은다. 기획특집이란 집중조명을 통해 역량을 제대로 평가받게 하려는 의도일 것이다.
깨어보면 유년을 지나있고
내다보면 희끗한 고개가 졸고 있다
태어나 지나쳐왔다는 건
무수히 나를 내려주었다는 것이다
(중략)
이번 생의 경유를 마쳤다는 듯
저녁놀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있다
-<인생버스>일부 (권용유, 경남신문)
마을버스에 빗대어 삶의 질곡을 돌아보는 성찰이 돋보인다. ‘-깨어보면’ ‘내다 보년-’은 시간의 경과로 유년, 노년기가 빠르게 지나간다. 만나고 떠나보내는 굴곡의 반복을 통해 ‘이번 생’의 운행이 마감되는 삶의 무상과 허무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죽은 동물을 특정 짓듯
뼈는 그 존재를 부르는 철자법이자 변증법이다
형태를 쫓겨나 부르는 최초의 가계가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으므로.
국가이고 국경인 아주 작은 대륙이
뼈다
-<뼈에도 풍습이 있다>일부 (노수옥, 광남일보)
‘뼈‘를 통해 존재의 변증법을 제시한다. 뼈는 부존재(否存在)가 아닌 흔적이다 때문에 그의 유추를 통해 생명성 공간성 시간성과 함께 DNA에 저장된 가계의 역사를 함축하고 있다. ’뼈‘라는 특이한 소재로 존재의 의미를 캐려는 발상이 이채롭다.
몇몇 실험작을 제외하고 아직 타성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한 일상의 ‘유희’도 보인다. 신인의 특권은 도전과 실험정신이다 시는 낯익은 것에서 낯선 세계를 경험하게 하는 것(재창조)임을 기억해야할 이다.
다음으로 ‘디카 시‘에서는 이미지와 함께 단시의 묘미를 음미하게 해준다.
<짙은 그늘 거두면서/ 그루터기 남기셨네요/ 그 넓은 품이 그리울 때는/
당신의 한생이 잘려나간 곳에/ 작은 새되어 둥지를 틉니다> (어머니의 품, 차윤옥)
이미지와 시의 조화, 비유 함축이 절묘하다. 생을 다하고 그루터기만 남은 고목, “당신의 한생이 잘려나간 곳에/ 작은 새되어 둥지를 틉니다”처럼 생사를 초월한 사모곡은 뭉클한 감동을 준다. <마지막 발길 돌려놓고/ 바람마다 문에 열리는 무대 위에서// 기다리던 절정의 시간/ 눈 먼 이별이 올 때/ 바람 허리에 기대어 춤을 추어요> (모델, 백덕순) 자연은 무대이고 존재하는 것은 다 주인공이요 모델이다. 그를 위한 단 한 번의 절정, 다음은 사라짐이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 그 아름다운 떠남을 위하여-단시를 넘어선 넓고 깊은 이치를 담고 있다.
이 밖에도 ‘신작 시’ 부문에 봄날 생명의 깨어남을 통해 절망과 희망의 양면성을 노래한 <3월 어느 날> (김두자)이나 ‘시간이 멈춘 기억의 바다’를 노래한 <비 오는 한림해안에서>(금동원), 겨울이 시작되는 입동 무렵에 시간을 초월하여 마음속 꽃을 피우는 <노란 민들레꽃> 등은 탄탄한 서정의 맥을 잇고 “그는 언제나 그늘막을 늘그막이라 부른다”로 시작되는 이혜선의 <그늘막 도하기>는 느긋한 인생후막의 여유와 달관을, “미술관 라움에 가면/ 수를 다한 암거미가 산다”의 <미술관 사는 엄마> (임솔내)는 유별난 자식사랑의 모성을 암거미에 빗대어 그로데스크하게 그려 다양하고 입체적인 서정의 지평을 넓히고 있다.
시의 들판은 계절에 따라 저마다 풍성하고 향기롭다. 그 중에서도 갖추어야할 것, 버려야할 것, 절제해야 할 것을 제대로 아는 꽃은 그의 향기로 깊은 감동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