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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정 Mar 25. 2020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 2

1편에 이어서


혐오는 혐오로 되받아쳐진다.
 
얼마 전 뉴욕 브루클린에 사는 지인에게서 이런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누군가 자신의 얼굴을 때리고 갔다는 것. 그때는 트럼프의 ‘집콕 명령’이 떨어지기 한창 전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시뻘건 백주 대낮에 사람 많은 브루클린에서 일어난 황당한 일이었다. 그러나 미국 생활 5년 차인 그녀는 자칭 ‘선비의 나라’에서 온 이유가 있다며 아주 지적이고 성숙한 자세로 상황을 대하고 있었다. 한 사람의 개인행동으로 인해 바람직하고 이성적인 이웃들마저 미워하는 우를 범하진 않겠다고 말이다.


그럼에도 아시아인들의 ‘우아한 이해심’을 흔들리게 하는 일부 극심한 시민들은 인종차별의 열기를 최대치로 끌어올리는 중이다. 며칠 전 인스타그램에 한국인 할머니 입에 손 소독제를 들이밀며 “소독해야지~ 컴온” 하면서 비아냥대는 흑인 청년 영상이 올라왔다. 수많은 이들이 사과하라고 요청했지만 그 청년은 담배를 뻐끔대는 사진을 올리며 아랑곳하지 않았다.


LA 폭동사건 같은 과거를 떠올리며 진저리치는 아시아인들은 서로 연대하길 권했지만, 대부분은 무서워 집에 박혀있는 상태다. 연대할 기력조차 없어 보이는 사람들도 있고, ‘무시가 답’이라는 정석의 답을 내 놓기도 하며, 그래서 한국인만 모여사는 곳에 살아야 한다는 소극적 대안을 내놓기도 한다.


‘연대’ 자체가 불가능한 아시아인도 있다. 미국인은 우리를 나라별로 구분하지 않고 ‘아시안’이라고 생각하지만, 일부 동남아시아 인들은 자신에 대해 ‘한국인 아닙니다’라고 강조하기 시작했다. 한국인들 조차 ‘중국인 아니다’라고 말하며 ‘나는 질적으로 다른 사람’임을 표현하려는 이들이 있다. 미국 내 아시아인끼리 연대하던 꽃 시절은 지나고, 선을 긋기 시작한 듯 보였다. 노예시절을 지나온 흑인들이 아시아인을 혐오하는 상황을 보고, 일부 아시아인들은 흑인 혐오로 되받아치고 있는 것이다. 짱깨, 깜둥이, 양놈, 유럽거지 등의 말을 외치며 ‘코로나코리안’ ‘칭챙총’에 상처받은 마음을 분노로 순환 중인 우리는 얼마나 ‘해명’에 성공하고 있는걸까?
 
지금 가장 무서운 건 바이러스인지, 혐오인지 나는 구분할 길이 없다.



조회수와 현실 사이

한인사회는 미국 정부의 방침이나 현지 상황보다 한국 내의 상황에 더 기민하게 반응한다. 바로 옆 동네에서 총기사고가 있었음에도, 저 멀리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작은 사건이 더 크게 회자되는 게 바로 미국 내 한인사회다.


집에는 라면이며 쌀이며 가득 쌓아 두고 이웃들과도 멀쩡히 잘 지내는데도 불구하고, <현재 미국 상황! 재난 그 자체!> 라면서 유튜브 조회수를 꾀하는 이들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저마다 죽기 직전인 듯 공포감을 조성하면서 사람들에게 ‘구독’을 부탁한다. 휴지따위를 사모으는 소식에 온 인생을 바쳐 집중한다.
 
일부 사재기가 있었어도 여전히 미국의 대형마트, 작은 슈퍼마켓, 아시안 마켓, 편의점은 문을 열고 영업 중이다. 지침을 어기고 장사를 하는 가게도 더러 있고, KFC에서는 20불 이하의 패밀리사이즈 세트들을 배달비 없이 제공해 ‘드라이브 스루’에 차들이 줄 서게 만들었다. 퓨전 중식당 판다 익스프레스에서도 20불에 세 가지 요리를 빅 사이즈로 제공해준다고 광고를 해 문 밖까지 줄이 가득한 풍경을 연출했다. 바이러스가 싫어 인종 차별은 해도, 베이징 소고기 볶음과 사천 치킨 볶음은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일부 대형 회사만 유급휴가를 줬을 뿐 대부분은 출근시간을 줄이거나 재택근무를 하고 있다. SNS에는 이참에 공원도 나가고 휴식기를 가져 행복하다는 사람들의 편안한 일상 포스팅이 주를 이뤘다. 유사 언론이 전하는 ‘재난상황’은 어디에 있는 것인지,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가짜 뉴스와 혐오를 부추기는 일부 ‘키보드 워리어’들만 지구 종말의 날에 살고 있는 듯 보였다.



말할 수 없는 비밀


며칠 전 말하기 힘들만한 감정을 느꼈다. 한인교회에서의 단체 문자였는데, 비록 예배를 중단했지만 매일 교회 곳곳을 소독하며 예민하게 신경 쓰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생각 없이 첨부된 사진을 보고 있는데, 나의 눈을 사로잡은 뒷모습이 있었다. 바로 남미계 노동자 아저씨. 매주 교회에서 쓰레기를 치우거나 음식물을 처리하던 아저씨였다.
 
누군가 미국계 회사에서 차별당한 한국 교인의 소식을 전하면서 ‘그럼에도 우리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솔선수범해 잘해줘야 한다’던 말이 떠올랐다. ‘우리는 차별하면 안 됩니다’라며 사랑을 권고하면서도, 중국인들이 매일 밥상을 부러지게 차려 먹어 지구가 경고하는 것이라는 이상한 논리로 마무리 짓던 어느 날의 설교였다. 마지막 즈음 ‘우리 한국인은 담백하고 욕심 없게 먹어서 얼마나 좋냐’는 말이 따라붙었을 때에는 두 귀를 의심할 정도였다. 예배당을 사랑하고 봉사하자면서도, 결국 소독 청소는 남미 노동자 혼자서 처리해야 하는 상황과 묘하게 겹쳤다.


그 남미 노동자 아저씨는 사진 속에서 앞치마를 메고, 모두가 무서워 만지기 싫어하는 것들을, 홀로 총대를 멘 듯 장갑 하나에 의지해 청소하고 있었다.


시위, 병마, 재난상황에 웃는 사람들은

일부 사람들은 여전히 바이러스를 신경 쓰지 않는 느낌이다. 모든 상황을 ‘자본’으로 해석하는 이들이 그 주인공들이다. 혼란스럽기 전에 어떤 주식에 뛰어들어야 했는지, 무슨 사업을 벌여야 했는지, 금을 얼마나 확보했는지, 그럼 다음 바이러스 때를 대비해 어떤 사업적 비책과 재정적 전략을 짜야할지에 초점을 맞춘다. 온 세계가 난리라도, 공을 차고 잔을 부딪치며 '다음 자리‘를 궁리하는 소위 ’윗대가리‘들 말이다.
 
돌이켜보니 홍콩 시위도 마찬가지였다. 무고한 소시민과 작은 가게의 주인들, 떠밀리듯 정의를 외치러 나간 젊은 영혼들, 경찰 밥벌이를 위해 나가야 하는 젊은이들은 저들끼리 싸우느라 피가 터지는데, ‘재력가’와 ‘유명인’들은 산 중턱 고요한 대저택에서 흔들리지 않는 일상을 살고 있었다. 이념이나 정치는 재력가들에게 무의미한 장식품 이었다. 시위가 절정일 시기에 맞춰 유럽여행을 가고, 미리 조치해놓은 ‘자산관리’ 덕에 경제난도 겪지 않았다. 이미 상황을 예견한 외국 기업은 이미 주식을 다 빼고 싱가포르 쪽으로 회사를 옮겼고, 더러는 자국으로 귀국해 좋은 조건에 스카우트되어 커리어를 이어갔다. 오직 홍콩 조그만 섬마을 에버딘에 살고 있는 나의 친구만, 시위로 인해 창문이 깨지고 직업을 잃었다며 울었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정보의 지나친 '주입'이 인간을 망치는 것은 아닐까. 자극적인 콘텐츠는 '언론' 과 ‘여론’의 자리를 꿰차고 있다. 더러는 공식 통계나 지침보다 호사가들의 입놀림에 더욱 휩쓸린다. 무엇이 진짜 ‘종소리’이고 ‘총소리’ 인지 구분하기 힘든 세상이 되었다. 이들은 저마다 ‘세상의 종’을 울린다면서 뉴스를 전하고, 개인 의견을 배설하고, 정의로운 듯 깃발을 흔들지만 그럴수록 세상은 더 혼돈할 뿐이다. 누군가는 총대를 메고 세상을 구원할 자태로 덤벼들지만, 그건 우리가 바라는 ‘종’의 울림이 아니다.

바이러스보다 무서운 건, 마스크보다 급한 건 ‘혜안’을 제시할 사람들이다. 이성적으로 팩트를 전하고, 이슈를 자신의 이익으로 둔갑시키지 않으며, 다음에 또 찾아올 ‘재난’의 대비책을 제시하는 이들이다. 연대의 해결을 꾀하고, 빗장을 잠그지 않는 이들이다.

어쩌면 묵묵히 병동을 지키는 간호사나 의사, 고통받는 소시민에게 작은 빵 하나를 내미는 사람들, 겸손하게 침묵을 지키는 이성주의자들, 섣불리 발언하지 않고 ‘차분히 바라봄’을 택한 사람들, 혐오와 공포심보다 ‘흔들리지 않는 일상’을 유지하는 평범한 인간들이야 말로 종을 울릴 가능성을 지닌 이들이 아닐까. 나는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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