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에 이어서>
새벽녘의 할랄푸드, 폭주족을 피하는 방법
이 동네에서 폭주족이란, 마치 메인 시티에까지 입성하지는 못하지만 동네에서 나름 알아주는 ‘무서운 형’들 같은 존재였다. 마른 체구의 인도인 청년들이 차나 오토바이를 개조해서 골목을 휘젓고 다녔는데, 도무지 무슨 직업을 가진 건지 또 하루종일 왜 그 별것 아닌 골목을 위윙거리며 다니는 건지 알 수는 없었다. 특히 내가 살던 집 골목 앞을 늘 지나가는 하얀 차 한대가 있었는데, 골목 끝에 조용히 서 있다가 사람이나 차가 없는 틈을 기가막히게 캐치해 전속력을 다해 골목을 질주했다. 마치 몇백미터의 골목을 단 5초만에 씽 하고 지나가는 듯 한 속도였는데 그 소리와 바람이 어찌나 큰지 창문이 흔들릴 정도였다.
신기한건 그런 폭주족들 사이에서도 사람들이 잘 걷고, 운전을 하고, 주차를 하며 공생한다는 것이다. 마치 베트남에서 신호등 없이도 저들끼리 무난히 운전을 하고, 무단횡단을 하며 살아가는 것 처럼. 일종의 암묵적인 룰 같은 것이었다. 짜릿하고, 사실 좀 ‘살아있는’ 기분도 느꼈다. 아, 내가 이런 사람들과 더불어 살고 있구나 하는 느낌, 어쩌면 어둑한 뉴욕 골목의 방황하는 청춘 이야기를 담은 영화 한 편을 본듯 한 느낌도 들었다.
맨해튼에 갔다가 새벽에 돌아온 경우, 바로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보거나 저녁 약속이 늦어진 경우였는데 그 때마다 퀸즈에 도착한 나의 출출한 배를 채워준 건 할랄푸드였다. 뉴욕엔 맨해튼의 ‘할랄 가이즈’가 가장 유명하지만, 사실 진짜 맛집은 브루클린과 퀸즈 골목 골목에 있다. 가격 역시 맨해튼보다 저렴하고, 친절함과 많은 양은 덤이다. 24시간 불을 환하게 키고 나를 ‘헬로 뷰리플’이라며 맞아주는 104st 할랄푸드 트럭에서 늘 치킨이나 양고기에 옐로 라이스, 야채, 오버 화이트 소스, 약간의 스파이시 소스를 곁들어 먹었다. 할랄푸드를 사가지고 집으로 가는 길에도 늘 폭주족이 질주하지 않는지 살펴야 했다. 거주한지 한 달이 넘어가자, 나는 제법 어느 골목으로 피해가야 하는지 아는 눈치빠른 ‘이방인 고양이’가 되어 있었다.
미스 아니타, 내겐 가장 유쾌한 70대 친구
퀸즈에 살 때 나에게 집을 렌트해 준 아주머니는 홍콩계 미국인이었는데, 나이가 70인데도 빨간 메니큐어를 바르고 저녁 10시까지 식당 일을 하는 진취적인 여성이었다. 나보다 훨씬 정정한 체력, 큰 목소리, 인도 동네를 호령하는 빅 마마, 아니타 아줌마.
이 동네에서 아니타 아줌마는 유명했다. 유일하다 싶은 '술을 파는 중국음식점’의 유쾌한 매니저였고, 인도인들 틈에서도 당당하게 살아가는 동양인 할머니였다. 그녀의 취미는 네일 아트, 카지노, 맛집 방문, 해외여행 이었다. 일흔이 된 나이에도 잠깐의 ‘지루한 틈’을 참지 못해 식당일을 하고, 주말이면 손자 손녀를 보러 롱 아일랜드로 가는 열정적인 여성이었다.
아니타 아줌마는 반전 투성이었다. 누군가 일흔이 다 된 나이에 식당일을 한다고 하면, 당연히 형편이 어렵겠지 싶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 명의로 된 롱 아일랜드 저택 한채, 그리고 퀸즈 집 한채를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자식들의 꾸준히 용돈도 준다고 하니, 말 그대로 식당일은 ‘집에 있기 좀이 쑤셔서’ 취미로 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10여년 전 남편을 하늘로 떠나 보낸 이후, 마치 이팔청춘처럼 매일 바쁘게 사는 듯 했다.
그녀의 쉬는날이면 늘 친구가 찾아왔다. 두 사람은 신나게 수다를 떨면서 딤섬을 먹으러 갔고, 돌아올땐 새 네일아트를 손톱에 하고 있었다. 그녀는 언젠가 내게 홍콩에서 이민 올 당시의 흑백사진을 보여준 적이 있다. 클래식한 머스탱 차 앞에서 한껏 차려입고 남편과 함께 서 있는 사진은 영화 속 장면 그 자체였다. 무엇보다 그녀는 전 세계를 여행하며 겪은 온갖 즐거운 추억을 쏟아내며 눈을 반짝였다. 참 멋진, 너무나 유쾌한 70살 청춘 아닌가!
퀸즈의 카지노, 미국도 중국도 아닌 어느 ‘외딴 섬’
아니타 아줌마는 매주 두번 정도 퀸즈 카지노를 갈 때마다 인도인들이 운영하는 불법택시 (우버와 같은, 자가용으로 영업하는 택시. 현금만 받는다)를 이용하고는 했는데, 돈을 딴 날이면 팁도 척척 냈다. 어느 춥고 할일 없던 휴일, 아니타 아줌마가 방문을 두드렸다. “제니, 너 오늘 뭐하니?” 할 일 없는 나는 그녀와 버거킹에 가 아침메뉴를 후딱 해치우고는, 그녀가 잡아 탄 불법택시를 타고 카지노로 향했다.
불법 택시를 타는 것은 간단하다. 길을 지나갈 때 마다 택시 운영자들이 ‘딱시! 딱시! 칩칩’ 하면서 호객행위를 하기 때문이다. 그 중 우리는 조금 어수룩해 보이는 인도인 여성의 택시를 탔는데, 인상과는 다르게 커브를 휙휙 돌려 페달을 밟는 과격한 운전자였다. 그녀는 인도 특유의 영어 억양으로 “마담, 오늘은 혼자 아니고 둘이 가네요?” 라고 말했고, 아니타는 “예아~ 이 아이는 내 친척이야~” 라면서 나를 졸지에 가족으로 만들었다.
한 10분정도 달렸을까, 신세계가 펼쳐졌다.
퀸즈의 좁다란 골목들, 더러운 길거리, 빼곡하게 들어선 인도 상점, 울그락 불그락 한 색감의 복잡한 풍경이 단숨에 사라지고, 커다란 카지노 건물이 위엄을 뽐내며 서 있었다. 금테를 두른 듯 한 위용이었다. 카지노의 규모는 상당했다. 공터같이 넉넉한 주차공간에는 맨해튼 차이나타운과 플러싱 차이나타운, 브루클린 차이나타운을 오가는 수 대의 셔틀버스들, 택시, 승용차들이 즐비했다. 버스에서는 수십명의 사람들이 분주하게 내렸다. 대부분 아시안이었다.
카지노에 들어서기 전에 가방 검사를 했다. 아니타 아줌마는 역시나 아주 쾌활하게 농담을 주고받으며 검사에 응했고, 당당하게 들어섰다. 입구에는 이벤트에서 1등을 하면 준다는 빨간색 스포츠카와, 중국식으로 행운을 비는 건지 붉고 금색인 리본이 크게 둘러져 있었다. 타임스퀘어 만한 크리스마스 트리와, 금색을 강조한 인테리어는 과연 중국스러웠다. 간간히 홍콩의 중년스타 '카인마마'가 콘서트를 온다는 홍보 포스터나, 호텔을 짓고 있다는 광고 등이 있었다.
카지노에 입성하자 별천지가 펼쳐졌다. 이 차갑고 황량한 퀸즈 바닥에, 온갖 금색으로 가득하고 요지경 소리가 가득히 나는, 불빛들로 반짝이는 카지노가 있었다. 그 속에는 백인, 아시안, 흑인 할 것 없이 모두 꿈에 부푼듯 혹은 약간 피곤한 듯한 눈빛으로 게임을 하고 있었다.
카지노는 늘 그렇듯 ‘타짜들의 자리’가 있다. 잠시 점심을 먹으러 가거나 화장실을 갈때 종이조각을 기계위에 올려두고 가는데, 그걸 맘대로 치워버리고 게임을 리셋해 버린다면 큰 패싸움이 날 수도 있다. 일종의 암묵적인 룰 같은 것이다.
퀸즈 카지노의 특징은 딜러와 하는 게임이 없다는 것이었다. 모두 기계로 된, 그러니까 슬롯머신 형식의 소액 게임이었다. 나는 20불만 써보자는 작정으로 이곳 저곳을 둘러보고 있는데, 아니타 아줌마는 ‘매’의 눈빛으로 “이 기계가 오늘 터질거야”라면서 어딘가에 앉았다.
아니타 아줌마는 10불로 시작해 20, 30, 50, 100불의 성과를 넘기고 있었다. 나도 그 옆에 끼어들어 게임을 시도했지만 금방 지고 말았다. 그 자리에서 20불을 모두 잃었다. 그녀는 자신의 철칙을 설명했다. 1시간 이상 하지 않기, 100불 이상 쓰지 않기 란다. 꾀 합리적으로 보이는 룰이었다.
소액 게임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또 주욱 늘어서 있는 불법택시 중에 하나를 골라타고 집으로 향했다. 미리 얼마에 갈 것인지 흥정을 해야 하는데, 아니타 아줌마는 ‘큰 손’ 답게 더블의 가격을 불렀고 인도 아저씨는 흔쾌히 우리 둘을 집까지 데려다줬다. 추운 겨울이었다. 크리스마스를 지내지 않는 인도인들 탓에 거리 분위기는 조금 썰렁했다.
인도 축제 ‘디왈리’의 폭죽소리와 발리우드 음악
어느 날 저녁, 전쟁이 난줄 알았다. 시도 때도 없이 터지는 '디왈리 축제’의 폭죽 소리였다. 폭죽만 터트리는게 아니었다. 인도 특유의 전통노래를 계속해서 틀어놨다. 어느 집에서는 마당을 한껏 꾸며놓고 파티를 했다. 초저녁부터 시작된 폭죽 파티는 자정을 넘어서까지 계속 되었다. 10시가 넘어가자 ‘펑’ ‘펑’하는 소리는 그냥 백색소음처럼 들렸다. 원래, 이 세계에 늘 들려오는 소리인 것 처럼.
디왈리 축제는 인도 특유의 전통음악 ‘높은 음’에 익숙해지게 했다. 언어는 모르지만 ‘챰마챰마’라고 하는 구절이 반복되는 노래는 기억난다. 하도 들었더니, 어떤 노래는 멜로디를 기억할 정도가 되었고 어느새 나는 커피숍에 가서 ‘꺼피 원, 꺼피 원, 노 슈가 노 슈가’ 하면서 ‘인글리쉬’를 마구 내뱉고 있었다. 아무리 지나다녀도 한국인은 커녕 동양인조차 쉽게 만날 수 없는 동네에서, 나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인도를 경험하고 있었다. 그것도 미국 최고의 도시, 뉴욕에서 말이다.
내가 퀸즈 104st에서 있었던 시간은, 그 어느 여행지보다 또 해외거주지 보다 독특하고 인상깊었다. 매끄럽게 조성된 부촌도 아니었고, 이렇다 할 만한 볼거리나 유명함은 없었지만 뒤돌아보니 즐거웠다. 매번 신기했고, 긴장했고, 어느샌가 편해졌다. 맥도날드 에서는 돈이 없는 아이들이 감자튀김 하나를 시켜놓고 하루종일 죽 치는 경우가 허다했고, 길거리에 서 있는 인도 아저씨들의 눈빛이 낯설어 움츠려들 때도 있었고, 팝송은 커녕 인도 노래만 듣다가 하루가 다 갔지만, 그들이 터를 잡고 살아가는 미국 뉴욕 퀸즈의 동네에서 나는 ‘이방인’으로서 살아가는 또 다른 공동체를 보았다. 또한, 나 역시 뼈저리게 ‘이방인’ 이라는 사실 역시 매일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