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1월 20일에 나간 뮤지컬 '스핏파이어 그릴' 배우 인터뷰 기사입니다.
(서울=열린뉴스통신) 위수정 기자 = “각자의 부재를 가진 세 사람이 서로의 집이 되어줍니다.”
20년 만에 돌아온 뮤지컬 ‘스핏파이어 그릴’(연출 허연정, 제작 엠피엔컴퍼니)이 추운 겨울 따뜻한 위로를 전한다. 동명의 영화를 뮤지컬로 각색한 ‘스핏 파이어 그릴’은 2001년 오프브로드웨이 공연 당시 드라마 리그 어워드, 드라마 데스크 어워드 등 최우수 작품상을 비롯 최우수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르는 등 평단의 극찬을 받은 작품이다.
뮤지컬 ‘스핏파이어 그릴’은 5년간의 복역을 마치고 출소한 ‘퍼씨’가 위스콘신주의 작은 마을인 길리앗에 가면서부터 시작된다. 마을 보안관인 ‘조’의 도움으로 길리앗의 유일한 레스토랑인 ‘스핏파이어 그릴’에서 일하게 된 ‘퍼씨’는 비밀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스핏파이어 그릴’의 주인 ‘한나’, 남편의 그늘 속에서 살아온 ‘셸비’와 함께 상처를 극복하며 길리앗의 마을 사람들과 함께 성장해나가는 이야기다.
‘퍼씨’ 역의 배우 나하나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출신으로 2016년 뮤지컬 ‘도리안 그레이’로 데뷔해 ‘빨래’, ‘광화문 연가’, ‘시라노’, ‘빅 피쉬’, ‘리지’, ‘위키드’ 등 굵직한 작품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최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나하나는 뮤지컬 ‘스핏파이어 그릴’을 올리고 한 달가량 지난 지금을 “정말 희한한 체험이다. 실제로 한나 선생님들과 셸비 언니들이랑 연기하다 보면 어느 순간 진짜로 마음이 좋아진다. 공연 중에도 치유 받는 느낌이 나는데 마지막에 ‘천국의 빛깔’을 부를 때는 캐릭터가 한 단계 성장했다고 인물로서 느끼는 게 신기하다”고 설명했다. 이어 “삶을 살다가 지난 시간을 돌이켜 보면 ‘이런 일을 겪어서 좀 더 나아졌네?’라고 인지할 때가 있는데, '셸비'와 둘이 노래를 부를 때보다 마지막에 제가 많이 달라졌다고 극에서 인지한다. 그래서 공연이 끝나고 나오면 엄청 마음이 좋고 개운하고 후련하다. 실제 생활도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을 느낀다. ‘스핏파이어 그릴’은 배우로서 뭘 보여줘야겠다고 힘이 들어가는 부분이 딱히 필요 없는 극이라 잘 따라가면 된다”며 미소 지었다.
다음은 나하나와 일문일답이다.
Q. 대본으로 만났을 때 ‘퍼씨’와 공연을 올리며 마주하고 있는 ‘퍼씨’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을 거 같다.
"‘퍼씨’는 닫혀 있던 사람 같다. 우리가 기가 세다고 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무언가를 때려 부숴서 그러는 게 아니라 소통하지 않고 관계 갖지 않으려고 할 때 다가가기 어려우니까 세다고 느끼는 것 같은데, ‘퍼씨’는 관계에 닫혀 있어서 세다고 느낀 것 같다. 초반에는 표현 방식을 세게 했다면 지금은 더 닫혀 있는 인물로 접근을 하고, 트라우마가 터치되면 그것을 과감히 드러내기보다 어쩔 수 없이 반응이 튀어나오는 거다. 어떤 대상에 대한 공격은 아니지만, 밖에서 보면 공격으로 볼 것 같다고 느낄 수 있다. ‘퍼씨’한테는 레드 버튼이 눌리는 순간이기 때문에 수위 조절을 잘하는 게 핵심이다. ‘퍼씨’로 인해서 마을 사람이 변해가는 과정이 보였으면 좋겠지만, 그렇다고 ‘퍼씨’가 처음부터 너무 열려있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자기 모습이 드러나고 공개됐을 때 두려움도 있을 거고, 사람들의 편견을 수없이 받아온 사람으로 불안감과 신체적인 문제도 분명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가족에게 폭력을 겪은 사람이 아무렇지 않은 척 최대한 감추고 살아가지만, 어느 순간 남자나 아이에 관한 상처나 모르는 사람이 공격적인 터치를 할 때, 대본상으로도 제어가 안 되는 폭력에 대한 트라우마가 신체적인 반응으로 나온다고 생각했다. ‘퍼씨’가 처음부터 너무 열려 있으면 변해가는 과정을 세밀하게 따라가기 어렵기 때문에 연출님의 큰 목표 안에서 세밀하게 조정해 나가는 과정이다."
Q. '스핏파이어 그릴‘이 20년 만에 재연으로 돌아왔지만, 작품이 낡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왜 이 작품이 20년 만에 돌아왔을까 궁금했는데, 공연을 보니 굉장히 따뜻한 미국 어느 시골 마을의 이야기이더라. 배우로서 작품을 봤을 때는 어땠나.
"저는 시대의 느낌이 고요하게 나타나는 작품을 좋아한다. 오히려 이 시대에 맞게 각색하거나 세련되게 만드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영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가 개봉하자마자 보고 왔는데 시대에 맞게 변형하지 않고 그대로 담아내서 좋았고, 그걸 엿보는 게 재미라고 생각한다. 그 시대에 만들어진 작품과 그 시대에 필요했던 논쟁, 사람들의 고민을 다뤄서 시대상이 완전히 녹아있는 작품을 다른 시대에서 만날 때는 시간 여행을 하는 것 같은 향수를 느낄 수 있고, 내가 살아보지 못한 시대의 인간의 삶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다. 그래서 낡은 느낌의 작품을 되게 좋아하고, ‘스핏파이어 그릴’의 투박함도 좋아한다. 어떻게 보면 이게 유니크함이다. 음악 장르도 보면 요즘 유행하는 레트로한 음악을 지금 젊은 친구들은 세련됐다고 느끼듯이, 그 시대의 고유성이 드러나서 이 시대의 사람들이 유니크하게 느끼는 것 같다. 그리고 그걸 완전히 흠뻑 담아내야 촌스럽지 않은 것 같다. ‘스핏파이어 그릴’도 오래된 작품이지만, 음악만 들어도 그때 미국의 정서와 지방의 느낌이 든다. 대본도 자극적인 이야기나 전개가 아니지만 잔잔한 인간의 삶의 이야기로 흘러가는 게 마음에 들었다."
Q. ‘퍼씨’가 길리앗의 단풍 사진을 보고 찾아가듯, 하나 배우도 한국의 단풍 사진을 보고 장소를 찾아간다고 하던데, 단풍에 매료된 이유는 무엇인가. 해외 사진을 보고 가고 싶었던 곳은 있나.
"‘꽃보다 할배’에서 오스트리아에 있는 샤프베르크 산을 가고 싶다. 스위스도 가보고 싶고, 영국과 뉴욕은 많이 가봤지만 또 가고 싶다. 그리고 단풍국(캐나다)도 가고 싶고, 일본의 교토도 단풍이 유명해서 가보고 싶다. 저는 실제로 단풍놀이를 다녀서 종묘를 일 년에 한두 번은 다녀온다. ‘퍼씨’와 공통점으로 자연으로 많이 치유 받고 회복 받는다. 저는 단풍이 잎이 지기 전에 찬란하게 자기 색을 딱 입는 게 좋다. 세월을 견뎠을 때 나오는 자기 색깔이지 않나."
Q. 그럼 본인은 마지막에 어떤 색깔을 지니고 있을 것 같나.
"진짜 어렵다.(웃음) 궁금하기고 하다. 어제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를 보면서 확실히 느낀 건데 제 인생에서 지배적인 게 있다면 뮤지컬이라는 장르를 진짜 많이 좋아한다. 뮤지컬이 말하는 방식을 사랑하고, 뮤지컬의 언어를 사랑하고, 극장 예술을 사랑한다. 이게 저의 색깔인 것 같고, 외부적인 다른 요소가 저를 방해해도 이걸 좋아해서 버티는 것 같다."
Q. 100달러와 함께 사연을 응모하면 길리앗의 유일한 식당인 스핏파이어 그릴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콘테스트가 열리는데, 만약 하나 배우가 사연을 쓴다면 어떤 이야기를 쓰고 싶나.
"응모 안 할 것 같다.(웃음) 식당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의 사연들이 절실하고 그들은 희망을 찾고 새 출발 하려고 한다. 저는 제 삶에서 새로운 희망을 찾거나 다시 출발을 할 만한 일이 아직 없다. 제가 뮤지컬이 스핏파이어 그릴 식당 같은 것이기 때문에 뮤지컬을 계속하는 이상 다른 스핏파이어 그릴을 위한 응모를 할 것 같지 않다."
Q. ‘퍼씨’를 통해 배운 점이 있나.
"관객 중에 ‘퍼씨’는 맨날 화만 내고 마을 사람에게 딱히 뭘 해주는 게 없는데, ‘퍼씨’로 인해서 무엇이 변화했나,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 거다. 그런데 ‘퍼씨’를 잘 보면 이야기를 잘 들어준다. ‘셸비’의 기나긴 ‘일라이’ 이야기도 들어주고 ‘조’가 마을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도 잘 들어준다. ‘퍼씨’가 마을 사람들의 이방인이라서 할 수 있는 이야기를 경청하고 들어주는데, 누군가가 가까운 사람에게 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할 때 잘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와 격려가 되는 것 같다. 그래서 ‘퍼씨’가 뭘 주거나 케어해주는 것도 아니지만 ‘퍼씨’에게 마음을 열고 의지하는 것 같다. 말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굳이 캐묻지 않거나, 드러내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고 느끼면 사람간의 적정한 선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저도 ‘퍼씨’를 통해서 이야기를 잘 들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Q. ‘스핏파이어 그릴’ 프레스콜 기자 간담회 때 ‘스핏파이어 그릴’이 집 같다고 말을 하지 않았나. 그때 집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하면서 생각이 변했다고 하던데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하다.
"집이란 게 단순히 공간이나 혈연관계를 의미하는 것만 그치지 않고, 사람이 마음에 안정과 평안을 얻을 수 있는 다른 대상과 함께 있는 공간이 집인 것 같다. 영화 ‘어느 가족’도 혈연관계로 맺어지지 않았지만, 이 사람들이 진짜 가족 같다고 느껴지는데 ‘스핏파이어 그릴’도 모두 결함이 있는 사람이다. ‘퍼씨’는 말할 것도 없고, ‘한나’도 치명적인 균형, ‘셸비’는 ‘케일럽’을 위해 희생하고 감춰왔던 사람으로 결함이 있다. 각자의 집이라고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던 부재를 ‘스핏파이어 그릴’ 안에서 ‘한나’, ‘퍼씨’, ‘셸비’가 서로의 집이 되어주면서 또 다른 의미로 부를 수 있는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생긴 것 같다. ‘한나’가 ‘퍼씨’와 ‘셸비’에게 레스토랑을 주면서 "몸과 마음이 쉴 수 있는 작은 집"이라고 말한다. 아들 ‘일라이’에게 "이제 그만 돌아와 집으로"라고 하는 것도 집의 형상이 아니라 가족으로서 회복을 의미하는 것 같다. 집은 가족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모이는 공간, 몸과 마음이 진정으로 쉴 수 있는 공간인 것 같다."
Q. 올해 막 데뷔 6년 차에 접어들었다. 직장 생활에서도 5년을 일한 거면 웬만큼 버텼다고 할 수 있는데 기분이 어떤가.
"‘5년이나 나를 써주셨다고? 정말 감사하다!’는 생각을 한다. 저를 써주실 때까지 해야지, 라는 마음이 든다. 배우를 믿고 써주는 건 엄청난 믿음과, 다수의 대단한 믿음이라고 본다. 작품에서 저를 필요한 만큼은 해야 하니까 그런 책임감을 가지고 항상 해왔다. 이런 믿음이 언제 사라질지 모르니 저를 믿어주실 때까지 열심히 해야겠다."
Q. 아직 ‘스핏파이어 그릴’을 예매하지 않은 분들에게 작품을 홍보하자면.
"얼마 전에 ‘살바도르 달리’ 전시회를 보러 가서 피카소의 명언을 봤다. “예술이 영혼의 먼지를 털어내는 일”이라고 하는데 ‘스핏파이어 그릴’이 그런 작품 같다. 영혼의 먼지를 탈탈 털어내고 양분을 주는 작품이다. 인간애가 흘러넘친다. 극 중에서 식당의 음식은 맛이 없지만, 영적으로 채워지는 배부른 작품 같다. 힘들고 팍팍한 상황에서 한 번쯤 극장으로 오셔서 영혼의 먼지를 털어내는 시간을 가지면 살아갈 때 큰 힘이 되지 않을까 싶다. 저희도 더 열심히 준비하고 있겠다."
한편, 뮤지컬 ‘스핏파이어 그릴’은 유주혜, 이예은, 나하나, 임선애, 유보영, 방진의, 정명은, 이주순, 최재웅, 최수형, 임강성, 이일진, 민채원, 허채윤, 성우진이 무대에 오르며, 2월 27일까지 서경대학교 공연예술센터 스콘 1관에서 공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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