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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옹알이 Dec 30. 2021

회사에서의 술은 왜 맛이 없을까요.

[퇴사일기#22] 직장인과 회식과 술의 상관관계

 연말이 되며 2022년 다이어리를 샀습니다. 전에 쓰던 다이어리를 정리하기 위해 펼쳤더니 2021년을 시작할 때 호기롭게 작성한 5가지의 목표가 보였습니다.

거의 대부분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이럴 거면 뭐하러 썼나 싶게 부끄러워지는 순간입니다.


 지나치게 정갈한 글씨로 쓰인 목표를 눈으로 흘기며 애써 외면하려 노력하지만, 양심이 콕콕 찔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많은 목표들 중에 추리고 추려서 5개를 뽑은 것일텐데 하나도 지키지 못하다니. 내년에는 딱 하나의 목표만 설정하여 확실히 지켜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가장 이루고 싶은 것이 뭔지 곰곰이 생각하다가 '술'을 택했습니다. 나이도 먹고 곧 새로운 가족이 생길수도 있는데 이대로 망나니처럼 술을 마실 수는 없습니다.


 2021년의 목표 2번 항목에는 '술은 일주일에 1회만 마신다'라고 쓰여있었습니다. 문장을 소리내어 읽으며 정말 아주 잠깐만 떠올려봐도 이 항목이 지켜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됩니다.


 저는 술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2022년의 목표로 '올바른 음주 생활 정착'을 선택했습니다. 직장을 다니지 않아서 지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아무리 지독한 애주가여도 회사에서 먹는 술은 맛이 없었습니다. 기분이 그런게 아니라 진짜 맛이 없습니다. 퇴사와 동시에 이제는 맛없는 술을 안 마셔도 된다는 해방감에 기뻤던 술쟁이입니다.







 회사에서의 술은 왜 맛이 없을까요. 나이 많은 사람들이랑 마셔서, 라고 생각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집안 어른들과 자주 술을 마셨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둘도 없는 술친구가 바로 저였습니다. 술은 상대에 따라 맛이 있기도, 없기도 한 신비한 음료입니다.


 직장과 알코올의 상관 관계에 대해,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경험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제 남편만 봐도 저와는 사뭇 다른 회식 문화를 가진 직장에 다니고 있습니다.


 남편의 회사는 직원에게 술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술을 못 마시는('안' 아니고 '못') 사람이라 정말 다행이었습니다. 남편은 회식 날에도 반드시 자차를 몰고 귀가합니다.


 저의 경우 절대적이었다고 말하겠습니다. 술을 잘 마시는 것이 절대적으로 유리한 회사였습니다. 경험한 두 군데의 직장이 모두 술을 강요하는 회사였고, 저는 술을 마셔도 얼굴이 빨개지지 않는 사람이라 정말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술을 마실수록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술을 잘 먹는다는 오해를 사곤 했습니다.


 제 경험담을 말해보겠습니다.



1. 술을 강요하는 회식 문화

 첫 직장에서의 회식을 잊을 수 없습니다. 팀원이 25명이 넘는 곳이었는데, 신입이니까 팀원 모두에게 한 잔씩은 꼭 받으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한 사람이 한 잔만 준다는 법도 없었고 술은 무조건 소주였습니다. 그냥 죽으라고 먹이는거죠.


 두 번째 직장에서는 다행히 팀원 수가 적었지만 어째서인지 그 룰은 똑같이 존재했습니다. 분명 다른 회사인데 같은 음주 문화, 이 정도면 국룰인가 의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곳에서도 모든 팀원들에게 술을 받아 먹었습니다.


 앞서 말했지만 저는 술을 마셔도 얼굴색이 변하지 않는 사람이라 자꾸 술을 줬습니다. 그래서인지 회식 때면 늘 블랙아웃을 경험했습니다. 필름이 끊기는 겁니다.


 술을 많이 마셨을 때 몸이 받아주지 못하는 류의 사람들은 화장실에 가서 토하고 술을 받아 마셨습니다. 권력을 가진 윗사람들은 그걸 '정신력'이라고 불렀는데 그 얘길 듣고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더 하얗게 질렸던 기억이 납니다.


 회식 자리에서 위염 때문에 술을 못 마신다고 했다가 알코올이 위를 소독해준다는 말을 듣고 표정관리에 실패했던 날이 떠오릅니다. 라섹 수술 후 술자리를 거절했다가 한동안 욕을 먹었던 기억도 납니다.


 술을 강요하는 윗사람들에게는, 직원이 아프거나 약을 먹거나 수술했거나는 중요치 않습니다. 그냥 자신들이 따르는 술을 거절하는 것이 거슬릴 뿐입니다.


 이런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권하는 술을 단호하게 거절하는데 성공했다면 후폭풍으로 엄청난 욕을 먹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눈 밖에 나는 것은 덤입니다.


 술을 못하는 사람에게 굳이 술을 먹이는 문화는 비단 회사에서 뿐만이 아닙니다. 처음 대학생이 되었을 때도 선배들이 그렇게 술을 먹였습니다.


 저는 화학과였는데, OT때 비커에 소주 반병~한병을 한번에 먹이는 전통이있었습니다. 동기 중 어떤 여자애는 태어나 처음으로 술을(그것도 감당하지 못할 양의 술을) 마시고 괴로워서 울고 불고 119를 불러달라 했던 일도 있었습니다.


 대학교 신입생들에게 행해지는 이런 나쁜 관습은 아마 사회로부터 전해진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제가 졸업한 이후, 이런 강압적인 술자리 문화로 몇몇 큰 사고들이 터지고 뉴스에 보도되고서야 잘못된 일이라는 인식이 조금씩 퍼졌던 것 같습니다.


 술을 강요하는 것은 문화가 아니라 폭력입니다. 이미 죽거나 상해를 입은 사람들은 무슨 죄인가요. 땅콩 알러지가 있는 사람에게 땅콩을 권하지 않는 것은 상식입니다. 상식적으로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것이 죄가 될 수 있나요?



2. 잔 돌리기의 역습

 회식 자리에서 수많은 신입들은, 많은 양의 술 강요와 더불어 나쁜 문화도 이겨내야했습니다. 저는 이직한 회사에서 처음으로 '잔돌리기'를 경험했습니다. 살면서 처음이요.


 코로나의 여파로 위생에 대한 인식이 널리 퍼진 요즘,  아직도 그런 회사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제가 처음 회사에 적응할 때는 '잔돌리기'라는 문화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어냐하면, 상사와 제가 하나의 술잔으로 번갈아 술을 마셔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과거 A형 간염이 유행하고 그 행위의 문제점이 사회 문제로 화두가 된 적이 있었지만, 직장 생활 술자리 문화는 그 정도의 이슈로는 쉬이 변하지 않나봅니다. 어찌나 고지식하고 강직한 문화인지 2019년에도 종종 인터넷 뉴스를 통해 잔돌리기로 인한 간염의 전파 소식을 접했습니다.  


 처음 본 잔돌리기는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위생상으로도 정서상으로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술잔을 같이 쓰면 더 친해지는건가. 본인 술잔이 있는데 어째서 같은 잔을 쓰는거지?


 저보다 직급이 높은 옆자리 상사가 더 높은 관리자와 잔돌리기로 술을 마시는 모습을 보고는 곧 제 차례임을 직감했지만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한낱 사원이었으니까요.


 솔직히 역겨웠습니다. 그 사람이 양치를 했는지, 담배를 피는지, 무슨 병에 걸렸는지 어떠한 확신도 없는 상태에서 같은 잔을 쓰는 것이 싫었습니다. 이 따위 악습이 환영회에서 벌어진 것이 참담할 뿐이었습니다.


 타인과 침을 섞는다는 것은 간염 뿐만 아니라 많은 질병에 노출될 수 있는 위험한 행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이지 않는 압력에 의해 술을 삼키며 몸도 마음도 속도 매우 불편했던 기억이 선명합니다.



3. 술 자리로의 초대 (a.k.a. 충성도 테스트)

 가장 당혹스러웠던 것은 퇴근 전에 '갑자기' 술 약속을 잡는 것이었습니다. 상사가 술 마시고 싶은 날에 갑자기 잡는 술 자리로의 초대가 반가운 직원이 있을까요.


 대부분 퇴근 후의 시간은 자신만의 시간으로 남겨놓는데 그 시간을 침범하는 것은 물론 일종의 충성도 테스트까지 치뤄진다니 너무 괴로운 일이었습니다. 상사가 원할 때, 부를 때 바로 나오지 않는 직원은 그들의 눈 밖에 났습니다. 눈 밖에 나면 여러모로 피곤해지는 것이 직장 생활입니다.


 업무 시간을 넘어, 직원 개개인의 사유 시간까지 영향력을 미치며 자신들의 권력을 과시하는 것만큼은 정말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초대가 반가울 수 없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면서 자신들의 초대에 응하지 않을 때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고 강압적인 태도를 행하는 것은 엄연한 갑질입니다.


 저는 약속이 있다고 했는데 "뭐하는 자식이야?"라는 소릴 들은 경험이 있습니다. 결국 친구와의 약속을 취소하고 술자리에 나갔습니다.


 제 친구와의 약속도 소중한 약속입니다. 당신들이 불러낸다고해서 쉽게 취소할만한 그런 약속이 아니란 말입니다. 직장 안에서도, 직장 밖에서도 직원들의 시간을 마음대로 휘두르는 것은 옳지 못한 행동입니다. 제발 타인의 시간이 소중하다는 개념을 탑재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즐겁게 마시면 정말 맛있는 게 술이고, 정말 좋은 게 술자리입니다. 회사 술자리에서의 강요와 강압을 마치 맥주 거품처럼 조금씩 걷어내다보면 분명 회사에서의 술이 맛있어지는 날이 올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물론 잔돌리기와 같은 불결한 문화는 애초에 배척되야 했던 거고요.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이 사회가 술자리에서의 술 강요를 문제점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일부 대학과 기업은 더이상 술을 강요하는 문화를 답습하지 않습니다. 술을 잘 마시고 술자리에 참석하는 것이 인사고과에 반영되지 않습니다. 술로 발생하는 사회 문제를 직면하면서 생긴 변화입니다.


 직장인과 회식과 술은 더이상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알아가고 있습니다. 점심 회식이나 문화활동 회식 등으로 새로운 회식 문화를 만들기도 하고, 반드시 술이 아니여도 즐겁게 먹고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올바른 인식과 함께 좋은 문화를 만들어간다면 직장인들에게 회식과 술이 꼭 나쁘게만 들리지 않는 날도 오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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