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후 회사에서 친하게 지냈던 지인과 만난 자리에서 그녀는 제게 물었습니다. 혹시 A 과장의 연락을 받았냐고.
이어서 아주 조심스러운 태도로 "혹시 그 과장 차단했니...?"라고 묻는 그녀에게 저는 차단한 적도, 연락을 받은 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진짜 연락을 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알고보니 전(前) 직장에서는 제가 퇴사한 후로도 계속 제 얘기가 나왔답니다. A 과장은 제가 연락을 받지 않는다고, 뭐하고 사는지 모르겠는 말을 지인 앞에서 했다는데 지인은 제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서 저한테 확인 차 물어봤다고 합니다.
퇴사한 지 반 년도 더 지난 시점에서 그런 얘기를 전해 들었을 때 제 머릿 속에는 두 가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첫 번째로 제게 연락을 하지 않았으면서 왜 '연락을 안 받았다'고 말하는지에 대한 의문, 두 번째로 퇴사자와 굳이 연락을 이어나가고 싶어하는 것에 대한 의문이 일었습니다.
의문1) 연락을 받지 않는다?
첫 번째 의문에 대해서 제 나름대로 해석해보자면, 이미 퇴사한 사람에 대해서 아직까지도 본인이 윗 사람이라 생각하는 태도에서 나오는 말이라 추측됩니다.
제가 입사한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 원래 제 자리에 있던 분에 대해서도 A 과장은 똑같이 표현 했습니다.
"걔가 퇴사하더니 연락을 안 받더라."
그 당시에 저는 제 전임자가 진짜 A 과장의 연락을 무시한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퇴사하고 겪어보니, 그 과장의 '연락을 받지 않는다'는 '본인에게 연락을 먼저 하지 않는다'라는 의미였습니다.
이미 퇴사를 했고, 퇴사함과 동시에 직장에서의 상하관계가 무의미해졌음에도 불구하고 퇴사자가 윗 사람인 자신에게 때되면 먼저 연락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사람 입장에서는 아랫 직원이 해야할 도리를 하지 않았고 불만이 생겼겠지요. 전형적인 윗 사람의 태도였습니다.
사실 회사에서 얽힌 인연이고, 직장 생활의 직급으로 생긴 상하 관계입니다. 회사를 나오고서는 윗 사람, 아랫 사람 없이 똑같이 평등한 성인의 입장에서 대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연락을 계속 이어나가고 싶은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위든 아래든 연락을 해서 관계를 지속하면 됩니다. 먼저 연락하는 것에 대해 도리가 있는 것이 아니지요.
게다가 '퇴사하고 연락을 안 받는다'는 말은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마치 퇴사한 사람이 일부러 연락을 피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정작 퇴사자인 저는 연락을 받은 적도, 피한 적도 없었습니다.
이미 회사를 떠난 마당에 아직도 본인이 '윗 사람'의 위치에 있어서 마치 '아랫 사람'인 제가 도리를 안 했다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갖고 헛소문을 퍼뜨린 것은 분명 화가 날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냥 무시하기로 했습니다.
저는 그 사람과 관계를 지속할 의지가 없었으니까요.
의문2) 회사에서 만난 평생 인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 듯 어느 집단에서 지낼 때 적당한 페르소나를 장착하고 생활합니다. 모두와 잘 지낸다면 정말 베스트겠지만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모두가 존중 받는 건 기적에 가까운 일입니다. 다들 적당히 지내는 방법을 알고 적당히 자신을 내비치거나 숨기면서 살아갑니다.
특히 상하관계나 직급이 뚜렷한 직장 생활에서 가면을 벗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더더욱 쉬운 일이 아닙니다. 상사의 제안에 거절하는 것 자체를 곱게 바라보지 못하는 우리나라 사회에서 다들 한 두겹의 가면은 쓰기 마련입니다.
싫은데도 승낙하거나 불편한데도 웃어야 하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것을 '사회생활'이라 칭하면서 버텨냅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퇴사를 앞두고 회사 사람들에게 그 동안 감사했다는 인사를 돌 때 '밥이나 한번 먹자'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괜찮습니다. 다신 보지 말아요'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적당히 그러겠다고 대답하며 넘겼습니다.
그리고 두 번의 직장에서 경험한 '강압적인 친밀감 형성'도 제게는 썩 맞지 않았습니다. 직장에서는 점심시간에 꼭 무리를 지어 밥을 먹어야 했습니다.
사실 저는 주위 시선에 크게 예민한 편이 아니라 평소에도 혼밥을 잘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회사에서 혼자 밥 먹으러 갔다가(혹은 혼자 밥을 먹지 않았다가) 상사의 눈 밖에 난 경험이 있습니다.
놀랍게도 이런 경험이 저 혼자만의 경험이 아니었습니다. 주위 친구들에게 얘기해보니 대부분의 회사에서 꼭 무리지어 식사하는 것을 강요하더랍니다. 그렇지 못할 경우 상사가 하급 직원을 불러내어 '직장 생활 잘 하자'라고 충고하는 일까지 생기더랍니다. 마치 유치원에서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자'라고 말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강제적 공동 생활에 대한 의무를 짊어지며 자신의 취향이나 성격에 맞지 않는 사람들과도 적당히 지내는 것이 직장 생활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또한 '사회생활'의 일부라 생각하며 맞지 않아도 수긍하고 지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을 겁니다.
회사라는 공통 소속이 없어진 상태에서 '관계를 지속한다는 것'은 서로의 의지가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한 쪽에서만 일방적으로 지속하길 원하고, 다른 한 쪽이 거절하는 것에 대해 잘잘못을 따질 필요도 없는 일입니다. 그냥 어쩔 수 없는 일일 뿐, 그걸 유치원 선생님한테 이를 수도 없는 노릇인데 뭐하러 열을 내겠습니까.
다행히 퇴사한 이후 불편한 사람들에게 밥 먹자는 연락이 오진 않았습니다. 어쩌면 있었을 수도 있는데 이미 차단해버린 상태라 제가 몰랐을 수도 있고요. (참고로 A 과장은 차단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계속 인연을 지속하고 싶다면 적어도 제 성격과 취향에 맞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소속과 계급장 다 떼고 마주 앉았을 때 대화가 되는 사람을 계속 보고 싶을까요, 일방적으로 맞춰주고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사람을 계속 보고 싶을까요?
물론 회사에서도 마음이 맞는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저도 두 번의 직장을 경험하며 몇몇 사람과의 소중한 인연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모든 관계는 쌍방향입니다. 어느 한 쪽이 마음이 없으면 지속되기 어려운 것이 현실입니다. 계속 이어나가고 싶은 인연이라면 그런 마음이 있는 쪽에서 적극적으로 연락을 취하는 것이 맞지만 상대가 받아줄지 아닐지는 미지수입니다. 상대가 받아주지 않는다고 떼쓰는 것은 아이들이 하는 짓입니다.
그걸로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내서 험담을 하는 것은 유치원 선생님한테 '쟤가 나랑 안 놀아줘요!'라며 이르는 짓과 비슷한 수준, 혹은 그 이하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신을 거부하는 상대를 비난하기 전에 본인이 상대에게 어떻게 행동했었는지 곰곰이 되짚어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