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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가비 Mar 27. 2023

희망과 사랑처럼 기차를 기다려

사랑스런 추억 by 윤동주

올해는 벚꽃이 예년보다 일찍 피었습니다.


집 근처 하천엔 물길을 따라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어요. 하천의 수면 위로 햇살이 반짝거리고, 오리들은 한가롭게 헤엄을 칩니다. 개나리와 산수유는 산책로를 따라 노랗게 피었고, 매화는 벌써 꽃잎을 떨어뜨립니다. 이런 계절에 윤동주는 <사랑스런 추억>을 쓰지 않았을까요?


그 시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봄이 오던 아침, 서울 어느 조그만 정차장에서 

    희망과 사랑처럼 기차를 기다려 


그렇게 시작한 시는 이렇게 끝맺습니다.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 


시 전문은 맨 아래 실었습니다.

이 시는 젊음과 추억에 관한 시입니다. 주된 정서는 그리움입니다.

우리에게 윤동주는 영원한 청년으로 기억되는데, 왜 젊은이가 젊음을 그리워하는 걸까요? 시를 한번 들여다봅시다.


화자는 누군가 또는 무언가를 기다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오지 않습니다.

그 모습은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를 떠올리게 합니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끝까지 고도를 기다리지만, 고도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마치 그들은 고도가 나타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애써 부인한 채, 또는 모르는 척하고 있는 것만 같죠.

그런데 그 '고도'가 대체 무엇이냐? 하는 의견에 대해선 해석이 분분합니다. 답답한 걸 못 참는 사람들에겐 속 터질 노릇이지요. 하지만, 다행히도 <사랑스런 추억>에서 화자가 무엇을 기다리는지는 조금 더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화자는 기차를 기다린다고 하는데, 사실은 기차를 보면서 떠오르는 옛날을 추억하고 있는 겁니다. 

옛날이 그리운 화자는 자꾸만 과거를 회상하고 싶어서 정거장에 나갑니다. 기차를 보면서 또 추억에 잠기죠.

화자는 옛날이 너무나 그립습니다.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지만요.

그래서 더 애가 탑니다. 담배 연기만큼 갈급한 마음이고, 시선은 공연히 비둘기 떼에 머뭅니다. 

화자는 봄, 희망, 연인을 기다리듯 옛날을 그리워하지만, 그 마음은 '고도'가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같습니다. 봄의 계절은 몇 번이고 다시 돌아오지만, 지나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으니까요. 지나가 버린 시간은 지나가 버린 기차처럼 되돌릴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는 아련하죠.

그렇다고 화자가 절망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추억을 회상할 때마다, 추억이 오늘을 다시 살게 되니까요. 마치 내가 그 시절을 기다리듯, 그 시절의 나도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화자는 "옛 거리에 남은 나를 희망과 사랑처럼 그리워"하는 것일지며,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라고 말할 수 있는 걸지도 모릅니다.


나이가 들면 추억으로 산다고 합니다.

그리고, 비로소 꽃이 예쁜 줄 알면 나이가 든 거라고 말합니다.

어제오늘 꽃 사진을 찍는 사람들 모습이 많이 보여요. 고작 꽃나무 한 그루인데, 그 앞에 잔뜩 몰려든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사진을 찍기에 바쁩니다. 휴대폰을 든 사람도 있고, 커다란 카메라를 든 사람도 있어요. 언뜻 보기엔 꽃에 무심할 것 같은 아저씨도 휴대폰을 꺼내 들더니, 잘 안 보인다고 머리를 뒤로 쭉 빼고 사진을 찍습니다. 미간에 힘을 주고 초점을 맞추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사람들이 참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애틋해지죠. 애틋하다는 감정은 가슴에 피어오르는 뭉근한 열기를 동반합니다. 그 감정은 연분홍 꽃잎처럼 보드랍고 안에 물기를 머금고 있어요.


앞으로 살아갈 날들 중에서 오늘이 제일 젊으니까, 오늘의 젊음이 꽃 사진과 함께 오래 남아있겠죠.


나의 꿈은 귀여운 할머니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매 진지한 꿈이지만, 다른 데 가서 말하면 엉뚱한 소리나 농담으로 들릴까 봐 잘 말하지 않아요. 그런데 귀여운 할머니가 대체 어떤 할머니냐고요?

꽃이 예쁜 줄 알고, 사람이 귀한 줄 알고, 음식을 먹으면서 맛있다고 감탄할 줄 알고, 사랑스런 추억을 가슴속 앨범에 소중히 간직한 사람이요. 그러나 어제보단 오늘 바로 지금이 제일 중요한 어린아이처럼 살아야 해요. 앨범은 가끔만 꺼내보고, 오늘의 행복에 몰입하는 그런 할머니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내가 천진난만한 할머니가 되었을 때, 회상할 젊음은 바로 오늘이겠죠. 그리고 오늘은 언젠가 만나게 될 그 할머니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윤동주의 시 중에서 정말 좋아하는 시 <사랑스런 추억>을 덧붙이고 글을 마무리할게요.





사랑스런 추억


                                윤동주    


봄이 오던 아침, 서울 어느 조그만 정차장에서 

희망과 사랑처럼 기차를 기다려 


나는 플랫폼에 간신(艱辛)한 그림자를 떨어뜨리고, 

담배를 피웠다. 


내 그림자는 담배연기 그림자를 날리고 

비둘기 한 떼가 부끄러울 것도 없이 

나래 속을 속, 속, 햇빛에 비춰, 날았다.


기차는 아무 새로운 소식도 없이 

나를 멀리 실어다 주어, 


봄은 다 가고 - 동경(東京) 교외 어느 조용한 하숙방에서, 

옛 거리에 남은 나를 희망과 사랑처럼 그리워한다.


오늘도 기차는 몇 번이나 무의미하게 지나가고,

오늘도 나는 누구를 기다려 정차장 가까운 언덕에서 서성거릴 게다.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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