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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졸쪼 Sep 09. 2024

나의 팔

“총 안 줍고 뭐 해!”


박 상병이 내 옆에서 소리쳤다. 나는 발밑에 있는 총을 내려다봤다. 발밑에는 총과, 이미 숨이 끊긴 전우와, 누군가의 팔이 한데 뒤엉켜 있었다. 훈련 중이었다면 이런 불호령이 떨어지기도 전에 잽싸게 총을 집었겠지만 눈앞에 펼쳐진 장면이 너무 비현실적이기 때문일까. 나는 느릿느릿 오른팔을 뻗어 총을 주우려 했다. 그런데 아무리 손을 움직여도 총이 잡히지 않았다. 역시 이거 꿈인가? 그때 내 오른 어깻죽지에서 무언가가 투둑 흘러내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어깨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고 그 피가 땅에 나뒹굴고 있는 팔에 떨어졌다. 나는 내 어깨와 발밑에 있는 팔을 번갈아 쳐다봤다.


이거, 내 팔인가?


누군가가 쓰러지며 내 팔을 짓밟았다. 아군 중 한 명이 총알을 맞고 쓰러지며 내 팔을 짓뭉개고 있었다. 사방에서 총알이 날아다니고, 화약과 먼지 냄새가 진동하고, 사람들의 비명이 울려 퍼졌지만 나는 마치 물속에 있는 것처럼 모든 감각이 아득했다. 이게 현실이고, 이 사람은 죽었으며, 여기 짓뭉개진 이 팔이 내 거라고? 순간 내 얼굴이 땅바닥에 처박혔다.


“정신 안 차려?”


박 상병이 내 귀에 대고 소리쳤다. 머리와 어깨 위로 한바탕 총알이 지나가니 박 상병이 내 뒷덜미를 잡고 나를 일으켜 세웠다.


“어서 총 들…….”


박 상병은 내게 소리치다가 말을 흐렸다. 박 상병의 시선이 내 어깻죽지에 꽂혔다.


“너…….”


박 상병은 이미 숨이 끊긴 자의 전투복을 벗겨 내 어깨에 꽉 묶었다. 나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감사합니…….”


눈앞에서 박 상병이 사라졌다. 박 상병은 방금 전투복을 벗긴 전사자 위로 고꾸라졌고 주위에는 금방 피 웅덩이가 생겼다.


“박 상병님!”


나는 왼팔을 뻗어 박 상병을 흔들었다. 하지만 박 상병은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아군 중 절반은 시체가 되었고, 절반은 몸을 낮추어 진군하고 있었다. 그렇게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보니 죽은 자들 아래 깔린 내 팔이 보였다.


여기에 있다가는 나도 이들처럼 죽거나, 죽을 때까지 싸울 것이다. 운이 좋아 살아남는다 해도 오른팔이 없는 채로 살아야 한다.


죽고 싶지 않다.


살아남는다 해도 팔이 없는 채로 살고 싶지는 않다.



팔을 붙여야 해.


나는 바닥에 떨어진 총을 어깨에 둘러멨다. 그리고 시체들 사이에 깔려 있는 내 오른팔을 주워 들고 역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맞은편에서 달려오던 병사들이 내게 소리쳤다.


“뭐야? 어디 가?”


전쟁 따위 내 알 바 아니다. 목숨을 걸고 싸우고 싶지도, 팔을 잃고 싶지도 않다. 이 방향으로 쭉 달리면 야전 기지가 있다. 그 안에 야전 병원이 있으니 빨리 도착하면 팔을 붙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팔을 어깨에 붙인 다음에는 집에 갈 거다. 집에 보내주지 않는대도 어떻게든 집에 갈 거다. 탈영? 영창?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 그래. 내가 탈영을 했는지, 볼모로 잡혀 갔다가 도망쳤는지, 다시 전투에 나갔다가 죽었는지 누가 안다고. 그리고 내 목숨은 내 건데 왜 내게 이래라 저래라인가.


“뭐야? 뭐야?”


뒤에서 달려오던 병사들이 나를 보고 멈칫했다. 내가 역방향으로 달리고 있으니 저 앞에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 따위 내 알 바가 아니다. 나는 아무 설명도 하지 않고 마주 오는 병사들을 있는 밀치며 달렸다. 병사들과 몇 번인가 팔과 어깨를 세게 부딪쳤지만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내 머릿속에는 그저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꺼져! 길 막지 말고 꺼지란 말이야!


얼마나 달렸을까. 평원에는 어느덧 나밖에 남지 않았고 나는 터덜터덜 걷기 시작했다. 전장에서 빠져나올 때는 이곳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압박 때문에 마구 달려도, 누군가와 부딪쳐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막상 혼자가 되니 걷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온종일 먹은 게 없었고, 목이 말랐으며, 오른팔이 없었기 때문에 몸의 균형이 맞지 않았다. 또 왼팔로는 오른팔을 들고 있어야 했으니 이게 꽤 거추장스러웠으며, 게다가 출혈…….


걷는다기보다는 반사적으로 다리를 움직인다는 표현이 맞을 거다. 관자놀이에서 땀이 주르르 흘렀다. 나는 왼팔을 들어 땀을 닦으려 했다. 하지만 왼손으로는 오른팔을 들고 있었기 때문에 손을 마음대로 쓸 수가 없었다. 나는 오른팔을 허벅지 사이에 끼고 땀을 닦았다.


멀다.


얼마나 더 걸어야 할까. 정면으로 내리쬐는 햇살 때문에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게슴츠레 떴다. 눈앞에는 흙밖에 없는 평원만이 펼쳐져 있고, 저 멀리에 흐릿하게 초록색 숲이 보였다. 기억대로라면 저 숲 한가운데에 야전 병원이 있었는데. 오늘 안에 도착할 수 있을까. 이렇게 한참 걸었는데도 아직 여기라면……. 몸에 힘이 풀렸는지 오른팔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안 돼!”


팔을 얼른 주워 들었지만 상처 부위에는 이미 흙이 묻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팔은 아까부터 계속 흙바닥에서 뒹굴었다. 야전 병원에 도착하기 전에 썩어버리는 건 아닐까? 나는 오른팔을 허벅지 사이에 다시 끼우고 왼손으로 흙을 살살 털어냈다. 하지만 상처 부위는 이미 피와 흙먼지가 반죽이 되어 있었다. 이 팔, 정말 붙일 수 있을까?


의학을 하나도 모르는 내가 봐도 희망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내가 영 소용없는 짓을 하는 걸까. 심지어 나는 이제 달리지도 못한다. 아니, 터덜터덜 걷는 것조차 버겁다. 차라리 이 팔을 버리고 내 몸뚱이 하나만 야전 병원에 도착하는 게 더 안전할 수도 있다. 나는 헛된 희망을 품느라 자신을 더 위험한 상황에 몰아넣고 있는 건 아닐까?


나는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아니, 결과는 아직 모른다. 지레 겁먹고 팔을 버릴 수는 없다. 나는 눈을 뜨고 어깨에 멘 총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총 양쪽에 건 멜빵끈을 길게 늘인 후 한쪽 후크를 총에서 떼어냈다. 양손으로 할 때는 몇 초면 충분했는데 왼손으로만 하려니 쉽지 않았다. 아까보다 약간 길어진 멜빵끈 한가운데에 오른팔을 묶고, 후크를 다시 총에 걸었다. 총을 메어보니 등에는 총이, 앞에는 팔이 조기처럼 덜렁 매달린 모양새였다. 나는 몇 걸음 걸으며 오른팔을 좌우로 흔들어 봤다. 좀 헐겁게 묶어서 오른팔이 쑥 빠져버릴 것 같았지만 더 꽉 감아도 될지 확신이 없었다. 더 꽉 감았다가는 신경이 짓눌리지 않을까? 나는 왼손으로 오른팔을 가볍게 잡고 걸어봤다. 아까보다는 훨씬 낫다. 하지만…… 적이 나타난다면?


나는 멜빵끈을 당겨 총을 가슴팍으로 가져와 봤다. 오른팔이 옆구리를 통과하며 떨어질 듯 출렁였고, 왼팔 하나로는 빠르게 사격 자세를 취할 수도 없었다. 이런 식이라면 총을 잡으려고 허둥거리는 사이에 공격을 당할 것이다. 어쩌지? 나는 고장 난 로봇청소기처럼 한 자리에 서서 총을 앞으로 멨다가 뒤로 메기를 반복했다. 이게 나을까? 그럼 오른팔이 등에 있는 건데, 무심결에 팔을 떨구면? 뛰기라도 하면 팔을 떨궜다는 사실조차 모를 수도 있다. 게다가 누가 뒤에서 나를 공격하면 내 팔은 그대로 노출된다.


잠시 후, 나는 팔을 가슴팍 쪽에 매달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렇게 된 이상 이판사판이다. 적군에게 대응하지 못하고 죽는다면 그것도 나의 운명 아니겠는가.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땀이 다시 흘러 눈에 들어갔다. 나는 자유로워진 왼 손등으로 땀을 닦았다. 하지만 왼 손등도 이미 끈적하고 더러웠기 때문에 눈이 더 따가워졌다. 씻고 싶다. 얼굴도, 손도, 오른팔도 한번 씻으면 좋을 텐데. 아니, 씻는 게 문제가 아니다. 오늘따라 햇살이 유독 뜨겁다. 이대로라면 이 팔도 더 빨리 부패할 거다. 나는 오른팔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돌려 어깨를 보았다. 그러고 보니 오른 어깨는 어떤 상황인지 확인조차 하지 못했다.


어깨는 괜찮을까? 이때껏 팔만 걱정했지 어깨가 더 심각할지도 모른다. 어깨 상태가 안 좋아서 팔을 붙일 수 없다고 하면? 그러고 보니 몇 시간 안에 병원에 도착해야만 신경을 살릴 수 있는지도 모른다. 내 오른팔은 이미 딱딱해졌는데 이거 괜찮은 건가? 마사지라도 하면서 가야 하나? 팔을 붙이겠다며 무작정 걷고 있긴 하지만 실제 팔을 붙일 수 있는지 없을지조차 모른다. 이렇게 생각하자 갑자기 헛웃음이 나왔다. 나는 내 몸에 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세상이 평화롭고 누구나 병원에 갈 수 있었을 때에는 돈만 있으면 안전하게 살 수 있었다. 하지만 병원에 갈 수 없는 지금, 내 몸을 모른다는 건 죽음과 맞닿아 있는 일이기도 했다. 심지어 내가 몸의 일부가 이미 죽은 건지 아닌지조차 알 수 없다니. 이게 말이 되는 상황인가?


전쟁 전에는 하고 싶은 게 없다는 이유로 하루를 그냥 흘려보냈다. 대학에도 가기 싫고, 국가고시를 준비하겠다며 온종일 앉아서는 유튜브 영상이나 보고, 스트레스가 쌓인다는 이유로 게임방에 가고, 코인노래방에서 노래를 불렀다. 나는 왜 그 시간들을 그렇게…….


전쟁이 끝나면, 집에 돌아가면 의학을 공부할 거다. 돈도 시간도 많이 필요하겠지만 의학을 공부하면 적어도 내 몸이 썩는 중인지 아닌지, 이 팔을 붙일 수 있을지 아닐지로 불안해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팔만 붙이면…… 집에만 가면…… 다시는 그런 식으로 시간을……. 입안이 끈적하고 뜨거워졌다. 희망. 그때 내가 느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희망이었다.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져 얼굴의 땀을 씻어주었다. 그간 나를 괴롭히던 따가움이 가셨다. 그래, 죽으란 법은 없다. 모든 것은 어떻게든 좋아질 수밖에 없다. 어느덧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힘을 내기 위한 억지웃음이 아니라 모든 것이 잘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오는 순도 100퍼센트의 웃음. 나는 목구멍까지 찰랑이는 환희를 주체하지 못하고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목이 마르고, 배가 고프고, 눈이 따갑고, 몸의 균형조차 잡을 수 없었지만 이대로라면 야전병원에 금방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운이 좋다. 팔이 떨어져 나갔지만 이 팔을 줍지 않았나. 나는 웃으며 가슴팍에 매단 오른팔을 내려다봤다. 오른팔 상처 부위에는 파리가 두 마리 앉아 있었다.


씨발!


다급히 왼팔을 흔들어 파리들을 쫓아냈다. 파리가 유충을 낳으면 그땐 돌이킬 수 없다고 다큐멘터리에서 본 것 같은데. 파리들은 상처 부위에서는 떨어졌지만 내 공격을 피하며 주변을 맴돌았다. 씨발, 꺼져! 꺼지라고! 나는 팔을 크게 흔들면서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하지만 파리를 비롯한 벌레들이 주변에 나타났다가 내 공격을 피해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꺼져! 꺼지라고!”


나는 있는 힘껏 팔을 흔들면서 소리쳤다. 근처에 누가 있을지 모르므로 조용히 걸어야 했지만 벌레들이 끊임없이 나타나니 짜증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사방에 내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나는 그 소리를 듣고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나는 자리에 서서 잠시 숨을 골랐다. 저 멀리에 보이는 숲은 여전히 희미했다. 아직 한참 더 가야 하는데.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 벌레들이 붙지 못하게, 단 한 마리도 붙지 못하게 할 수 있을까? 목구멍까지 찰랑이던 희망이 순식간에 발밑으로 쑥 빠져나갔다. 


아니, 이런 생각 하지 말자. 이런 생각은 내게 도움이 안 된다. 나는 이제 다른 사람이다. 뭔가를 결심했다가 금방 포기해 버리는, 과거의 나와는 이제 다르다. 일단 걷자. 아무 생각 하지 말고 걷자. 그러다 보면 곧 병원에 도착할 것이고, 한숨 자고 일어나면 오른팔은 다시 내 어깨에 붙어 있을 것이다.


나는 왼팔을 사방으로 휘저으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몇 번인가 돌부리에 발이 걸려 오른팔을 떨굴 뻔했고, 날파리떼 사이를 달려 지나가기도 했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 보니 어느덧 눈앞에 개울이 펼쳐졌다.


나는 허겁지겁 개울가에 쪼그려 앉아 목을 축였다. 물이 얼마나 시원한지 목구멍을 타고 위로 흘러 들어가는 걸 느낄 정도였다. 실컷 물을 마신 후에는 얼굴과 목을 씻었다. 아까 눈물이 땀을 씻어주기는 했지만 세수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리고 가슴팍에 매단 오른팔을 빼내 개울에 살살 흔들어 씻었다. 끓인 물이 아니므로 팔을 개울에 넣기 전에 망설였지만 흙과 땀과 먼지가 반죽된 채 두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투명한 개울물에 내 피와 흙먼지가 번지기 시작했다. 그 사이로 팔꿈치에 나 있는 점이 보였다. 관절이 까맣게 되어버린 손가락, 털이 숭숭 나 있는 팔뚝. 내 팔을 이런 식으로 구석구석 관찰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는 오른팔에 묻은 물기를 털며 개울 너머에 있는 숲을 쳐다봤다. 얼마나 다 걸어야 할까? 이송차를 타고도 한참 달렸다. 빨리 걸어도 서너 시간은 걸릴 텐데. 나는 오른팔에 남은 물기를 툭툭 털다가 다시 숲 쪽을 힐끗 쳐다봤다.


사람.


아까까지만 해도 아무도 없었는데 개울 건너편에는 사람이 있었다. 누구지? 나는 주변에 딱 하나 있는 갈대 덤불로 달려 몸을 숨겼다. 나는 덤불 사이로 개울 너머를 쳐다봤다. 군복 색깔이 미세하게 다른 걸로 봐서 상대는 적군인 듯했다. 어떻게 적군이 여기에 있지? 나는 이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전투 중이었고, 우리 군은 전장에서 밀리지도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적군이 여기에 있을까.


나는 오른팔을 꼭 쥐었다. 목적지가 코앞인데……. 저놈을 피해 멀리 돌아가기에는 시간이 없다. 그렇다고 저놈과 정면으로 맞붙으면 내가 불리하다. 왼손만으로는 저놈을 제대로 쏠 자신이 없었고 육탄전은 당연히 피해야 한다. 차라리 여기서 쏴서 죽여버릴까? 나는 바닥을 더듬거리며 내 총을 찾았다. 하지만 내 총은 멜빵끈이 길게 늘어진 채 개울가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파리가 한 마리 나타나 내 오른팔에 앉았다. 꺼지라고! 씨발, 꺼지란 말이야! 나는 신경질적으로 왼팔을 휘둘렀다. 그러고 보니 이 오른팔, 상처 부위가 아까보다 거무죽죽해졌다. ……어쩌지? 뭘 해야 할까?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할까? 빨리 생각해야 한다. 여기서 머뭇거릴수록 팔은 더 부패할 거다. 오른쪽 머리가 지끈거렸다. 나는 손바닥으로 내 머리통을 퍽퍽 때렸다. 정신 차리라고! 하지만 그럴수록 머릿속에는 아무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고 나는 점점 더 패닉에 빠졌다.


“Hey!”


개울 건너편에서 남자가 소리쳤다. 나는 깜짝 놀라 몸을 작게 웅크렸다. 그리고 조심스레 고개를 돌려 덤불 틈새로 개울 건너를 쳐다봤다. 남자는 정확히 내 쪽을 보면서 팔을 흔들고 있었다.


“거기 있는 거 알아! 총 안 쏴!”


상대는 한국말로 소리쳤다. 한국말을 할 줄 알아? 나는 갈대 덤불 틈새로 계속 그를 관찰했다. 그는 갑자기 몸을 덩실거리며 다시 소리쳤다.


“I love K-pop! BTS, Blackpink, NewJeans!”


그는 BTS의 <Butter>를 크게 부르기 시작했다. 나는 갑자기 펼쳐진 이 상황에 어안이 벙벙했다. 하지만 동시에 경계심이 녹기 시작했다. K팝을 사랑하고 한국말까지 할 줄 안다는 건 한국에 호의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겠지. 나는 덤불 사이에서 쭈뼛쭈뼛 고개를 내밀었다. 그는 내게 이리로 오라는 듯 손짓했다. 나는 다급히 총을 주워 그에게 총구를 겨누었다. 왼쪽 겨드랑이에 오른팔과 총을 동시에 끼고 있어 자세가 영 불안정했지만 멜빵끈에 오른팔을 묶을 시간이 없었다. 남자는 다행히 내게 두 손을 들어 보여주었다. 나는 주춤주춤 걸어 발을 개울에 담갔다. 차가운 개울물이 순식간에 전투화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남자의 동태를 살피며 신중하게 개울을 건너고 싶었다. 하지만 몇 걸음 가지 않아 오른팔이 겨드랑이에서 조금씩 빠지기 시작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속도를 내서 철벅철벅 개울을 건넜다. 그리고 땅을 밟자마자 오른팔이 땅에 툭 떨어졌다. 나는 그 팔을 줍지도 못하고 남자의 얼굴을 살폈다. 남자의 얼굴에는 땀인지 물방울인지가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Hey, 괜찮아?”


남자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땅바닥에 떨어진 내 오른팔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남자에게 말했다.


“총 내려놔.”


남자는 두 손을 더 번쩍 들어 보이며 말했다.


“같이?”


남자와 나는 서로의 몸짓을 읽으며 아주 천천히 총을 땅에 내려놨다. 그러자 비로소 평원에 평화가 찾아왔다. 남자는 자신을 ‘제이’라고 소개했고, K-팝을 좋아하며, 브로커에게 속아 파병을 왔다고 했다. 그리고 전쟁이 싫어서 무리에서 이탈했다고 말했다.


“한국인들하고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어. 전쟁? 휘유.”


나는 개울에 다시 오른팔을 씻으며 제이의 이야기를 들었다. 아까 땅에 떨군 바람에 어깨 쪽 살점이 더 너덜거리기 시작했다. 눈물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눈물은 전혀 나지 않았다. 오히려 억지로라도 울어야 하는 건 아닌가 생각할 정도로 마음은 차분했다.


내가 오른팔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으니 제이가 주섬주섬 전투화를 벗고 자기 발을 내밀었다. 제이는 왼발에 발가락이 세 개 없었다. 상처가 완전히 아물지는 않았지만 언뜻 봐도 안정기로 접어든 모양새였다.


“당신도 괜찮아.”


제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제이와 상황이 다르다. 나는 저런 식으로 상처가 아물면 안 된다. 제이가 내 가슴팍에 붙은 이름표를 보고 물었다.


“So, 당신 성함 정찬혁?”


“아니, 김종문.”


나는 어깨를 지혈하려고 전사자의 전투복을 두르고 있었다. 아까 내 눈앞에서 픽 쓰러지던 전우들이 차례로 떠올랐다. 그리고 내가 어깨를 부딪치며 지나쳤던 사람들. 이상하게도 그 사람들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래서 종문, 당신 혼자?”


제이의 질문에 나는 전장에서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어?”


“당신 혼자, 전쟁 싫고, 맞지?”


내가 자기와 같은 상황인지 묻는 것 같았다. 나는 말로 대답하는 대신 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Good!”


제이는 주머니에서 열매들을 꺼내 내게 건넸다. 제이는 어린 시절 숲에서 자랐고 어머니 덕에 먹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할 수 있다고 말했다. 내가 망설이는 것처럼 보였는지 제이는 열매들을 개울에 헹구더니 먼저 그것들을 입에 넣고 씹었다. 나는 그제야 제이처럼 열매를 하나 헹구어 입에 넣었다. 입안에 달콤한 즙이 고였다. 갑자기 허기가 밀려와 나는 제이에게서 열매를 몇 개 더 받아 씻어 입에 넣었다. 그리고 멜빵끈에 오른팔을 묶기 시작했다. 내가 한참 낑낑거리고 있으니 옆에서 제이가 내 오른팔을 묶어주었다. 그동안 나는 입안에 남은 단맛을 천천히 음미했다.


몇 초 후, 제이가 멜빵끈을 내게 건넸다. 나는 멜빵끈을 가슴팍에 메고 이렇게 저렇게 움직여 봤다. 제이는 끈이 조금 긴 것 같다며 길이를 더 짧게 조절해 주었다. 제이의 손길을 거치니 팔도 총도 훨씬 안정적으로 가슴과 등에 매달려 있었다. 제이가 나를 보고 웃었다. 나도 제이를 보며 웃었다.


“고마워.”


“천만에. 종문 내 친구니까.”


나는 개울에서 물을 한 모금 더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가자. 잠깐 쉬어서인가, 단 열매를 조금 먹었기 때문일까, 체력이 조금 회복된 느낌이다. 이대로라면 야전병원까지 빨리 걸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럼 먼저 갈게. 조심하고.”


나는 제이에게 말하고 숲 쪽으로 몸을 돌렸다.


“가? 어디에?


제이가 내게 물었다. ‘야전병원’이라는 말이 반사적으로 나올 뻔했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제이에게 도움을 받긴 했지만 제이는 적군이었고 아군의 야전 기지가 근처에 있다는 사실을 노출할 수는 없었다.


“비밀이야. 너도 빨리 다른 데로 가. 이 근처는 위험하니까.”


제이가 여기에 있다가는 아군에게 붙잡혀 포로가 될지도 모른다. 나는 최대한 돌려 말하고 숲 쪽으로 발을 내디뎠다. 전투화 안에서 물이 찰랑였지만 이것까지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제이가 갑자기 내 앞으로 부랴부랴 달려왔다.


“Wait!”


이제껏 쭉 웃는 표정이었는데, 제이는 정색하며 내 앞을 가로막았다. 나는 제이를 피해 숲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제이는 번번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뭐 하자는 거야?”


나는 멜빵끈을 움켜쥐고 물었다. 여차하면 제이를 밀치고 지나갈 생각이었다. 안 그래도 이 새끼 때문에 팔도 떨구고 시간도 낭비했다. 제이는 내 표정을 보고 다급하게 설명했다.


“Nonononono! 나 알아, 종문 어디 가는지. Field hospital, right?”


어떻게 알았지? 나는 멜빵끈을 당겨 총을 앞으로 가져오려 했다. 제이는 급하게 양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I just wanted to say this forest is dangerous. I saw your people planting landmines here. You can’t go.”


제이는 흥분했는지 말을 다다다 쏘아댔다. 나는 제이의 말을 반밖에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이 숲에 뭐가 있다는 것 같은데, 뭐가 있다는 거지?


“이 숲에 뭐가 있다고?”


제이는 팔을 사방으로 휘두르며 말했다.


“Boom! Landmines! Boom!”


“지뢰? 이 숲에?”


“Landmine, Landmine, Boom.”


제이는 ‘지뢰’가 뭔지 몰랐고 나는 제이가 말하는 단어가 뭔지 몰랐다. 어떻게 해야 하나. 저 안에 뭐가 있는 모양인데 그게 뭔지를 모르니……. 내가 멍하니 숲을 보고 있으니 제이가 말했다.


“나 안전한 길 알아. I'll go with you.”


나는 제이를 쳐다봤다. 같이 가주겠다고? 제이는 다시 아까처럼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내게 양팔을 들어 보인 채 웃으며 말했다.


“You are my friend who hates war.”


제이는 조심조심 내게 다가와 전투화에 찰랑이는 물을 버려주고, 끈을 다시 묶어주었다. 전투화 안은 여전히 축축했지만 물이 찰랑일 때보다는 훨씬 나았다.


수송 차량을 탔을 때는 평범한 숲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걸어보니 길은 상당히 거칠었고 나무들이 울창해 빛도 잘 들어오지 않았다. 게다가 벌레……. 나는 필사적으로 왼팔을 휘저었다. 빛이 잘 들어오지 않아 벌레가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벌레가 있든 없든 계속 팔을 휘저으며 걸을 수밖에 없었다. 제이는 내가 왜 이러는지 눈치채고 내 오른쪽에 서서 벌레들을 쫓아주었다.


“이거 먹을 수 있어.”


제이는 잎사귀에 솜털이 나 있는 풀을 따 내게 건넸다. 그리고 나보다 먼저 그 풀을 입에 넣고 씹었다. 나는 제이를 따라 풀을 씹으며 터덜터덜 걸었다. 그런데 갑자기 제이가 땅바닥을 구르기 시작했다. 지뢰를 밟았나?


“괜찮아?”


나는 반사적으로 제이에게 멀어지며 말했다. 제이는 웃으며 한쪽을 가리켰다.


“넘어졌다.”


제이의 발밑에는 나무뿌리가 땅밖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제이는 손바닥을 탁탁 털고 다시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나는 제이를 따라 열심히 걸었지만 제이처럼 쉽게 앞으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벌레가 너무 많았고, 땅은 질척였으며, 사방에 난 나뭇가지들과 거미줄이 너무 거추장스러웠다. 낮게 뻗어 있는 나뭇가지가 내 진로를 방해했다. 나는 나뭇가지를 쳐내며 나직하게 욕을 했다.


“괜찮아?”


제이가 나를 보고 물었다. 나는 갑자기 머쓱해져서 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괜히 말을 덧붙였다.


“넌 참 잘 걷네. 어렸을 때 숲에서 살아서 그런가.”


“옛날에는 숲 싫었어. 벌레, 넘어지고, 재미없어서.”


제이는 웃으며 얘기했다. 잠시 후, 제이는 약간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는 숲 좋아해서 나 항상 데려갔지만 나는 빨리 어른 돼서 도시가 가고 싶었어. 콘서트를 가고, 큰 건물을 보고.”


제이는 나를 툭 쳤다.


“그런데 종문, 알아?”


“뭘?”


제이는 나를 보며 말했다.


“전쟁 나니까 콘서트랑 큰 건물가 다 없고 나 어머니랑 숲 덕에 살았어.”


제이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아까 내가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던 것처럼 제이도 비슷한 순간을 경험했을까. 지금까지의 내가 모두 무너지고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순간.


나는 제이에게 물었다.


“전쟁이 끝나면 뭘 하고 싶어?”


“글쎄.”


제이는 입을 열려다가 다물었다. 그리고 또 입을 열려다가 다물었다. 잠시 후, 제이는 울먹이며 말했다.


“밥 어머니랑 먹고…….”


제이는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내 목소리도 떨릴 것 같아 입을 벌리지 못했다. 잠시 후, 제이는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어머니랑 산 가고 싶어. BTS, 블랙핑크, 뉴진스 좋아했지만 어머니랑 산이 날 살렸다고, 어머니 고맙다고.”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나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았다. 나는 제이 몰래 숨을 한번 오래 내뱉고 말했다. 


“꼭 살아 돌아가야겠네.”


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이의 얼굴에는 어쩐지 비장함이 감돌았다.


“종문은? 뭐 해, 전쟁 끝나면?”


잠시 후, 제이는 마음이 진정되었는지 평소의 목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의사가 될 거야. 다쳤을 때 나을 수 있는지 아닌지 불안해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불안해하지 않게 해주고 싶어. 나는 이 말을 하고 싶었지만 전장에서 도망친 내가 해도 되는 말인지 몰라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제이는 내가 더는 말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확인하고 말했다.


“I'm walking with future doctor.”


우리는 마주 보고 웃었다.


한동안 숲을 걸었다. 제이는 “여기 밟아”, “거기는 안 돼” 하면서 내가 걷는 길을 세세하게 봐주었다. 길을 설명하지 않을 때는 땀을 뻘뻘 흘리며 벌레들을 쫓아주었다. 나는 땀을 닦는 제이의 옆얼굴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내가 야전 기지에 들어가면 제이는 어쩔 생각일까. 제이는 나보다 길도 잘 찾고 부상 정도도 심하지 않지만 그래도 이곳은 타국이다. 브로커에게 속아서 전쟁터에 팔려 온 만큼 현지의 정보를 전혀 모르고, 돈도 없고, 비행기를 탈 수도 없을 거다. 몰래 배를 타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러려면 아주아주 한참 걸어야 하는데 어느 쪽으로 걸어야 할지 방향도 모를 거다. 내가 도우면……. 아니, 그럴 시간이 없다. 제이는…… 아마 집으로 가지 못하겠지.


“종문?”


“어?”


“괜찮아? 약간 쉬고 가?”


무표정으로 생각에 빠져 있으니 제이가 물었다.


“아냐. 얼마나 더 가야 해?”


“글쎄.”


제이는 팔을 휘저어 벌레를 쫓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팔을 휘젓지 않았다. 나는 급히 왼팔을 들어 올려 이리저리 힘껏 휘저었다. 그 반동으로 오른팔이 바닥에 떨어졌다.


“아!”


나는 재빨리 오른팔을 주워 들었다. 남 생각은 하지 말자. 남을 걱정할 상황이 아니다. 이렇게 남을 걱정할 거였으면 아까 박 상병님이나, 내 눈앞에서 죽어간 전우들을 걱정하는 게 더 맞지 않나. 하지만 나는 이미 그곳에서 벗어났고 돌아갈 생각도 없다.


나는 오른팔을 살살 털며 숨을 골랐다. 내 생각만 하자. 이건 잘못된 생각이 아니다. 이건 인간의 본능……. 그때, 내 오른팔 너머로 익숙한 풀이 보였다. 아까 제이가 먹으라고 준 풀. 잎에 솜털이 숭숭 난…….


“우리 아까 여기 지나지 않았어?”


나는 제이에게 물었다.


“뭐?”


“이 풀, 우리가 아까 따서 먹었잖아. 아까 지나온 길 같은데.”


제이는 내가 가리킨 곳을 보더니 사방을 한참 둘러봤다.


“이 풀 이 숲에 많아. 이 길 맞아.”


그런가? 나도 반사적으로 주변을 돌아봤다. 사실 숲은 나무와 풀이 전부이기 때문에 어딜 가도 비슷한 풍경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제이는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나도 제이를 따라 발을 움직였다. 하지만 나는 세 걸음도 가지 못하고 땅바닥을 굴렀다.


“악!”


오른팔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오른 어깨를 땅에 박으며 고꾸라졌다.


“종문, 괜찮아?”


나는 오른 어깨를 움켜쥐고 신음했다. 어깨가 타들어가는 것 같다. 아까 아군과 부딪쳤을 때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맨살이 으깨지는 건 이런 기분이구나. 나는 한참 동안 주저앉아 신음했다. 제이는 내게 말도 걸지 못하고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리고 드디어 정신이 돌아왔을 때, 나는 내가 무엇에 걸려 넘어졌는지 확인했다. 나무뿌리. 아까 제이가 걸려 넘어진 그 나무뿌리가 이번에는 내 발밑에 있었다.


“너도 아까 여기서 넘어졌잖아?”


제이의 표정이 굳었다. 그리고 제이를 보는 내 표정이 굳었다. 제이는 나보고 잠시 이곳에 있으라고 하더니 주변을 걷기 시작했다. 나는 제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팔에 묻은 흙을 털고, 이마와 목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우리는 어디쯤 있는 걸까. 숲속을 헤매기 시작했다면 빠져나가는 것 또한 장담할 수 없다. 방금 이마의 땀을 닦았는데 다시 땀이 한 줄 주르르 흘렀다. 나무들이 만들어 준 그늘 때문에 공기는 선선했지만 습도가 높아서 가만히 서 있어도 몸이 끈적였다. 


“미안. 이쪽이야.”


제이는 웃으면서 내 쪽으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확실해?”


“나 믿어. 확실해.”


제이의 강한 말투를 들으니 나는 다시 희망에 부풀었다. 그래.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나는 갑자기 마음이 급해져 서둘러 걷기 시작했다. 제이도 내 마음을 안다는 듯 내 속도에 맞추어 걸었다. 하지만 나는 제이보다 더 빨리 걷고 싶었다.


“종문, 천천히. 위험해.”


우리 사이에 간격이 꽤 벌어졌고 뒤에서 제이가 소리쳤다. 하지만 나는 속도를 늦추고 싶지 않았다. 나는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이대로 쭉 가?”


“어. 쭉.”


제이가 뒤에서 소리쳤다.


미끄러운 낙엽들을 밟아 넘어질 뻔하고, 거미줄이 얼굴에 붙어 팔을 휘젓고, 이리저리 나 있는 나뭇가지에 몇 번이나 얼굴을 긁혔다. 그렇게 한참 걷다 보니 저 멀리에서 드디어 빛이 보였다. 나는 빛을 향해 달렸다. 그래, 희망을 버리지 않기를 잘했다. 이제, 이제 팔을 붙일 수 있다. 오른팔을 붙이면 이제 집에…….


개울.


눈앞에는 아까 제이를 만났던 그 개울이 흐르고 있었다. 야전 기지 앞에 개울이 하나 더 있었나? 나는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봤다. 개울 근처는 온통 평원이었고, 건너편에는 아까 내가 숨어 있던, 말라버린 갈대 뭉치가 있었다.


“미안, 길을 잃었다.”


나는 뒤돌아 제이를 봤다. 제이는 웃고 있었다. 기쁨. 저 표정은 분명히 기쁨이었다.


나는 허겁지겁 총을 가슴팍으로 가져오려 했다. 하지만 너무 흥분해서인지 팔이 덜덜 떨려 총을 앞으로 가져올 수가 없었다. 제이가 천천히 다가왔다.


“오지 마!”


나는 제이를 향해 소리쳤다. 하지만 제이는 동요하지 않고 내게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팔이 하나뿐이었고, 총조차 제대로 잡지 못하고 있었다. 제이는 나를 두려워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씨발. 나는 사격은 포기하고 멜빵끈을 벗어 총을 휘두르려 했다. 하지만 한 팔로는 멜빵끈을 벗는 것도 쉽지 않았다. 나는 제이가 내게 다가올 때까지 아무 위협도 하지 못했다. 제이는 내가 무엇도 할 수 없도록 내 멜빵끈을 꽉 쥐었다.


“종문, Calm down. I won't shoot you.”


제이는 낮은 목소리로, 다정하게 말했다. 하지만 이건 분명히 협박이었다. 쫄면 안 된다. 쫄면 그땐 정말 끝나는 거다. 나는 목구멍에 힘을 꽉 주고 말했다.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내 마음과 다르게 목에서 쇳소리가 났다. 제이는 내 목소리를 듣고 웃음을 터뜨렸다.


“뭐가?”


제이는 웃으면서 물었다. 나는 약이 오른 나머지 목구멍이 간지럽도록 소리쳤다. 


“지금 뭐 하는 거냐고!”


제이는 귀가 아팠는지 미간을 찌푸리고 반대 손으로 귓구멍을 긁었다. 그러더니 눈썹 끝을 내리며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미안. 어쩔 수 없어.”


“숲에 지뢰고 뭐고 한 거 다 거짓말이었지? 목적이 뭐야? 이렇게까지 한 목적이 뭐냐고!”


제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No, 종문. 나 진실한 사람! Everything I’ve said so far is true. Landmines in that forest? True. Jay loves K-pop? BTS, Blackpink, NewJeans? True, too!”


제이는 자기가 생각해도 괜찮은 유머였다는 듯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웃었다. 제이는 귀를 파던 손으로 내 오른쪽 어깨를 꽉 쥐었다. 나는 다시 목구멍이 간지럽도록 소리를 질렀다. 이렇게 소리라도 지르지 않으면 상처 부위가 다시 타들어가는 고통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제이는 내 어깨를 점차 더 세게 움켜쥐며 말했다.


“Listen carefully. 종문, 나 집에 가고 싶어. 집에 가려면 가끔 한국인 필요해. You’re perfect. Korean, hate war, a deserter, and alone. Wow.”


나는 왼팔을 사방으로 휘저어 제이를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내게는 힘이 없었고 제이는 꿈쩍하지 않았다. 제이는 내 어깨를 움켜쥐며 자신과 함께 가자고 했다. 하지만 나는 계속 소리만 지를 뿐 끝내 제이가 원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제이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거 때문이야?”


드디어 제이는 내 오른 어깨를 놔주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귓가에 총성이 울렸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몸에는 아무 감각이 없었다. 제이가 움켜쥐었던 오른 어깻죽지가 여전히 화끈거릴 뿐. 하지만 아까도 그랬다. 팔이 떨어져 나갔을 때도 막상 아무 느낌이 없었다. 떨어져 나간 팔을 보고 나서야 어깻죽지가 아파왔을 뿐이다.


나는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내 몸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또 볼 자신이 없었다. 배? 가슴? 아니면 다리일까? 정신이 혼미해서인지 제이가 근처에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 없었다. 나는 한동안 그대로 서 있다가 결국 눈을 떴다. 눈앞에는 여전히 제이가 있었고 내 몸 어디에도 상처는 없었다. 나는 제이에게 물었다.


“뭐 한 거야?”


제이는 미소를 지으며 턱으로 땅을 가리켰다. 내 발밑에는 손가락 두 개가 떨어져 나가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오른팔에서 고여 있던 피가 땅바닥으로 뚝뚝 흘렀다. 


“이 개새끼야!”


나는 가진 모든 힘을 쥐어짜 소리를 질렀다.


“이 씨발 새끼, 너 죽여버릴 거야!”


아까는 총을 가슴팍에 가져오는 것조차 할 수 없었는데. 나는 순식간에 멜빵을 벗고 아무렇게나 총을 잡았다. 그리고 제이를 향해 총을 마구 휘둘렀다. 그 바람에 내 오른팔이 바닥에 떨어졌다.


“Oops.”


제이는 내 공격들을 간단히 피해냈고 나는 이 상황이 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


왜! 왜 내 마음대로 되는 건 하나도 없을까. 전쟁도, 희망을 놓지 않는 것도, 팔을 줍는 것도 이제 지긋지긋하다. 저 새끼를 죽일 수만 있다면, 지금 저 새끼를 내 손으로 죽일 수만 있다면 내 팔 따위! 하지만 제이는 내 공격들을 아주 간단히 피해버렸다.


“종문, 나 너 잘해줬잖아. 너 왜 너만 살려고 해?”


제이는 내 머리에 총구르 겨누고 말했다. 나는 헉헉거리며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제이는 땅에 떨어진 내 오른팔을 발로 툭툭 차더니 상처 부위를 집요하게 짓밟기 시작했다.


“It's over. Come with me, my friend.”


나는 눈동자를 굴려 땅바닥을 쳐다봤다. 손가락은 땅바닥을 뒹굴고, 팔 주위에는 피가 흐르고, 상처 부위는 짓뭉개졌다. 제이는 내 손에서 총을 살살 빼내려 했다. 나는 제이의 몸이 말하는 대로 천천히 손에서 힘을 뺐다.


“Good boy.”


모든 게 끝났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나는 한편으로 편안하다고 생각했다. 이제 다 끝났다. 팔을 붙일 수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는 불안함, 제이와 싸워서 이겨야만 한다는 중압감, 상처를 치유해도 다시 전장에 내몰릴 거라는 상상. 이것들과 다 안녕이다. 그래도 이번에는 나는 하는 데까지 해봤다. 이번에는 운이 좋지 않았을 뿐, 이보다 더 최선을 다할 수는 없을 것이다. 머릿속이 차갑게 식었다.


제이도 사실 좋은 놈일지 모른다. 내가 얘를 도우면 얘도 나를…….


“Fuck! What are you doing!”


제이는 자신의 어깨를 붙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바닥에는 제이의 오른팔와 총이 나뒹굴었고 제이의 어깨에서는 펌프질하듯 피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장거리 사격은 불가능하지만 총구가 상대의 몸에 가까이 있다면, 심지어 상대가 내 총을 잡아주고 있다면 한 팔뿐이어도 맞출 수 있다. 제이가 내 손에서 총을 빼내려 할 때, 찰나지만 내 총구가 제이의 어깨에 닿았다.


“Fuck! Are you fucking kidding me?”


제이는 고래고래 욕을 내질렀지만 나는 동요하지 않았다. 나는 제이가 떨어뜨린 총을 개울로 차버리고, 내 팔을 들고 숲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숲 밖에서는 갓 해가 지기 시작했지만 숲에는 더 일찍 밤이 찾아온다. 이 숲에 지뢰가 있다고 했는데 지뢰를 밟아버리지는 않을까? 그렇다 해도 어쩔 수 없다. 이미 시간을 너무 허비했고, 지뢰를 밟는다면 그게 내 운명일 거다. 그리고 한낮에 이 숲을 걷는다 해도 지뢰가 있는지 없는지 나는 확인할 수 없다. 이젠 도박이다. 죽으면 여기서 끝. 살아남는다면 내가 아직 죽을 때가 아니란 뜻이겠지. 하지만 지금껏 나는 살아남았다. 이렇게까지 해서 살아남았는데, 여기서 실패할 리가 없다.


얼마나 걸었을까. 넘어지고, 뒹굴고, 긁히고……. 나는 한껏 엉망이 된 몸으로 숲을 벗어났다. 그리고 평야를 한참 걸으니 드디어 내가 기억하던 야전 기지가 나왔다. 이제, 이제 모든 걸 원래대로 돌려놓을 수 있다. 나는 안전하고, 어깨도 치료받을 거다. 그리고 언젠가는 집에 돌아갈 거다.


어떻게 야전기지 안으로 들어갔는지 모르겠다. 갑자기 긴장이 풀려서인지 눈앞이 뿌옇고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병균에 감염돼서 정신이 희미해진 것일지도 모른다.


“전투 중 팔이…….”


군의관을 만나자마자 갑자기 눈물이 터져 나왔다. 나는 꺽꺽거리며 군의관에게 내 상황을 말하려 했다. 하지만 터져 나오는 눈물 때문에 제대로 말할 수가 없었다. 아니, 우느라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다. 김종문 이 개새끼야, 빨리 말해. 빨리 말하라고! 나는 속으로 자신에게 욕을 퍼부으며 눈물을 가라앉혔다.


“전투 중 팔이…… 끅, 팔이…… 끅, 끅……, 빨리 붙여주십시오.”


나는 눈물을 가라앉히고 간신히 말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군의관은 내 어깨에 묶어놓은 전투복을 찢어 버리고 상처를 보기 시작했다. 전투복은 피를 잔뜩 머금고 있었기 때문에 어깨에서 아주 무거운 무언가가 떨어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군의관은 내 어깨를 먼저 살피고 내게서 오른팔을 받았다.


“제 팔, 붙일 수 있습니까?”


나는 왼손으로 눈물을 닦으며 물었다. 군의관이 내 팔과 나를 번갈아 쳐다봤다.


“이 팔을 붙여 달라는 건가?”


“네, 그렇습니다.”


나는 눈이 따끔거려 눈을 깜빡이며 군의관을 봤다. 이미 늦은 건가? 아니면 이 팔을 붙일 자신이 없는 건가? 군의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동안 나와 팔을 번갈아 봤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이건 다른 사람의 팔인 것 같은데.”


뭐? 나는 군의관에게서 팔을 빼앗았다. 그럴 리가 없다. 상처 부위가 좀 뭉개지긴 했겠지만 여기 팔꿈치에 점이…….


팔꿈치에는 점이 없었다.


“어?”


살점이 떨어져 나가서 점도 떨어져 나갔나? 나는 팔을 샅샅이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제이가 내 손가락을 쐈지만 이 팔에는 손가락이 다섯 개 다 붙어 있었다. 이게 무슨…… 그럼 내 팔은 어디에 있지? 나는 들고 있던 팔을 바닥에 내팽개치고 오른팔을 찾기 시작했다. 의자 뒤와 총 근처, 멜빵 주변을 뒤졌지만 어디에도 내 오른팔은 없었다. 혹시 개울에서 내가 차버린 게…….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디 가나?”


“팔을 가져와야 합니다. 저기 개울 쪽에 분명히 있을 겁니다.”


“한밤중에 팔을 어떻게 찾으려고! 그리고 어깨 지금 바로 봉합해야 해. 다행히 늦지는 않았다고!”


늦지는 않았다고……. 씨발.


나는 출구 쪽으로 나가려 했다. 하지만 군의관이 나를 붙잡았다.


“죽고 싶어? 더 늦으면 팔이 문제가 아니라 목숨이 날아간다고!”


“제 팔! 팔이 있어야 합니다!”


나는 이렇게 소리치다가 목구멍이 터져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목구멍이 터질 리도 없고, 이게 다 소용없는 몸부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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