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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졸쪼 Nov 05. 2024

108호 할아버지 2

아니, 그건 절대 조심스러워하는 사람의 걸음걸이가 아니었어. 여유로웠다니까. 말 그대로 어슬렁어슬렁, 팔자걸음으로, 두 손으로는 머리를 가리고. 그러고는 두 사람 옆에 쪼그리고 앉더니 눈을 맞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이렇게, 가만히 쳐다봤어. 이미 눈을 몇 대나 맞아서 피를 흘리고 있는 그 남자를. 머리에는 여전히 손을 얹은 채로.


야, 말리는 게 뭔지 내가 모르냐? 확실하다니까. 그건 구경이고 관찰이었어. 학교 다닐 때 싸우던 애들 말리던 거 생각해 봐. 싸움을 말리려면 양팔을 뻗어서 둘 사이를 멀찍이 떨어뜨려 놓거나, 더 흥분한 애를 뒤로 밀면서 설득하거나, 당하는 쪽을 보호하려고 하거나, 이 셋 중 하나잖아. 그런데 할아버지는 107호 아저씨를 쳐다보지도 않았다니까? 자기 머리 위에 손을 얹고 고개를 이렇게 내밀어서 맞고 있는 남자만 봤어. 가끔 뭐라고 107호 아저씨한테 소리를 치고, 한 팔을 허공에 휘휘 젓기는 했지. 마치 싸움을 말리고 있다는 걸 누군가에게 보여주려는 듯이.


당시에는 108호 할아버지도 겁이 나서 적극적으로 못 말린 게 아닐까 생각했는데 아니야. 몇 번을 생각해 봐도 그건 두려워하는 사람의 제스처가 아니었어. 다른 사람 목소리가 들리니까 그 남자가 도와달라는 듯이 할아버지를 막 쳤단 말이야. 아무리 얼어 있어도 그렇게 피해자에게 맞으면 정신이 번쩍 들어서 신고라도 하지 않겠어? 그런데 할아버지는 휴대전화에는 손도 안 대고 싸움을 말리는 척 그 어설픈 모션만 반복하더라니까? 왜, 게임 속에서 중앙 상점에 가면 가게 주인이 똑같은 말만 반복하잖아. 딱 그거였다고.


근데 어느 순간이 되니까 107호 아저씨가 남자를 놔주더라? 힘에 부쳤는지 제정신이 돌아왔는지 그 남자한테서 내려와서 바닥에 누워버리더라고. 남자는 그제야 바닥을 막 기면서 입에서 흙이랑 쓰레기를 막 뱉었어. 108호 할아버지는 그제야 형을 일으켜 세우면서 107호 아저씨를 막 혼내고. 그러고 나서야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서 전화를 하더라. 그리고 그 남자 등을 막 쓰다듬더니 내가 있는 쪽으로 오기 시작했어. 다시 이마에 손을 얹고, 종종 달려서.


꼼짝도 못 하겠더라. 빨리 집에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나는 그 자리에서 아예 움직일 수가 없었어. 죽기 직전에 인생이 주마등처럼 흐른다고 하잖아. 할아버지 발소리가 가까워 오는데 초 3까지 살면서 내가 잘못한 일들이 막 떠오르더라니까. 그동안 밥 먹기 싫어서 부모님한테 짜증내고, 숙제 다 했다고 거짓말하고 그런 거. 그런데 그 할아버지 발걸음 소리가 완전 가까워졌을 때, 그제야 뭐든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 거야. 근데 우리 집에 들어가기에는 이미 늦었으니까. 그래서 내가 어떻게 했는지 알아? 아예 현관문 쪽으로 더 걸어가서 우리 집 우편함을 보는 척했어. 차라리 이제 막 온 것처럼 행동하자, 뭐 이런 생각이었지. 그게 옳은 판단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이었어.


그렇게 우편함 앞에 서서 할아버지를 기다리는데 그 할아버지,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어. 무슨 노래인지는 모르지만 슬픈 노래는 아니었어. 할아버지는 그 리듬에 맞춰서 움직이고 있었고 할아버지의 걸음이 느리지는 않았으니까. 무슨 트로트 같았는데. 아무튼 할아버지는 노래를 흥얼거리다가 내가 거기에 있으니까 깜짝 놀란 것 같았어. 나는 우편함을 기웃거리다가 그제야 인기척을 느낀 듯 뒤돌아서 최대한 명랑하게 “안녕하세요” 인사했지. 내가 가진 용기와 긍정성을 다 끌어올려서, 아주 천진하게, 축구공을 꽉 끌어안고. 축구공이 어린애의 천진함을 보여주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거든. 할아버지는 나를 잠깐 쳐다보다가 축구하고 오느냐면서, 어서 집에 가서 옷 갈아입으라고 말했어. 평소랑 똑같이 다정한 말투로, 인자하게 웃으면서. 그러다가 우리 둘이 눈이 딱 마주쳤는데, 알겠더라.


들켰구나.


당시 나는 초 3이었지만 더 어렸어도 눈치챘을 거야. 그건 나이가 몇 살이든 모를 수가 없어.


어렸을 때는 107호 아저씨랑 108호 할아버지를 무서워하기만 했는데 어느 순간이 되니까 갑자기 궁금하더라. 왜 108호 할아버지는 싸움을 말릴 것도 아니면서 굳이 둘 사이에 끼어들었을까? 왜 107호 아저씨는 다른 사람들이 껴들면 더 난리를 치면서 108호 할아버지의 말은 잘 들었을까? 최근 든 생각인데, 108호 할아버지가 위험한 사람이었다면? 그런데 뭔가를 저지르기에는 나이도 먹었고, 힘도 없고, 하루하루가 무료했다면? 그래서 107호 아저씨를 막는 척하면서 시간을 끌어주고, 자기는 그 상황을 구경하면서 즐거움을 챙겼다면? 이렇게 생각하면 107호 아저씨가 왜 108호 할아버지에게 덤비지 않았는지도 조금은 이해가 가.


그날 아파트 전체가 난리가 났고 107호 아저씨는 긴급 체포됐어. 우리 집에도 경찰이 찾아왔지. 나한테 뭔가 본 게 없냐고 물었는데 내가 뭘 봤다고 말하면 그 할아버지 귀에도 들어갈 거 아냐. 그래서 나는 우편함만 잠깐 봤고 아무것도 못 봤다고 했어. 그리고 우리 집은 두 달 후에 이사 갔어.


이삿날, 부모님은 108호 할아버지에게 그간 고마웠다고 인사를 드렸어. 할아버지는 나한테 잘가라고 다정하게 인사하고, 가는 길에 먹으라고 집에 있던 고구마깡을 주더라고. 나는 또 내가 가진 모든 긍정성을 짜내서 천진하게 감사하다고 인사했지. 그리고 투 스텝으로 뛰어서 차에 올라탔는데 고구마깡을 든 손에 그새 땀이 맺혀 있더라고. 그날 아무것도 못 봤다는 걸 끝까지, 온 몸으로 보여줘야 했으니까 많이 긴장했겠지.


새 집으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 나는 고구마깡을 까서 차 바닥에 다 쏟아버렸어. 나는 그 고구마깡을 안 먹을 거고, 엄마 아빠가 드시게 두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물론 엄마 아빠한테는 엄청 혼났지. 이삿날인데 엄마 아빠도 얼마나 예민했겠어. 아무튼 그날 이후로 난 고구마깡 안 먹어. 더군다나 이런 1층에서 먹는 고구마깡은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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