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의 물건
물건이 예쁘기만 해서 어따 써. 쓸모가 있어야지.
라는 말을 많이 듣고 자랐다. 당연히 가치관으로도 자리 잡았다. 쓸모,라는 말은 참으로 실리적이다. 저 두 글자 덕분에 통장 잔고를 지키고, 현실에 발을 붙일 수 있다.
물건을 넘어 모든 것에서 쓸모를 찾게 됐다. 나에게 쓸모 있는 사람만 가려 만나는(?) 성정은 아니란 게 다행이었지만, 반대로 남의 쓸모에 나를 맞춰 살았다. 어느 순간 ‘언젠간 남이 나를 쓸모없다고 여기거나 내가 나를 쓸모없게 느끼는 날이 온다면 내가 나를 제일 먼저 버리겠구나.’ 싶었다. 난 이 두려움을 생각 전환의 기회로 삼지 못했고, 오히려 ‘노력해서 남에게 늘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결론은 번아웃, 도망, 성공적.
자기 눈에 예쁜 물건 사 모으는 게 취미이자 향후 골동품점의 귀여운 할머니가 꿈인 하우스메이트(이하 하메) 덕분에 많은 물건을 보았다.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물건들을 바리바리 사 와서 예쁘다고 자랑하는 하메에게 이건 뭐에 쓰는 물건인지 용도를 꼬치꼬치 물어보고, 생김에 따라 마치 ‘오, 이것 같이 생겼다 ‘는 비유로 물건을 본 소감을 말하곤 했다. 그런 패턴이 반복되던 어느 날, 하메는 역정을 냈다.
“어휴, 넌 그 뭐 같다는 비유 좀 하지 마. 그리고 뭐 물건이 꼭 쓸모가 있어야 해? 그냥 있는 그대로만 봐. 그 자체로 예쁘면 됐지.”
하메의 말을 듣는 순간, 뭔가 머리에 둥- 하는 울림이 있었는데, 나는
“직업병이야. 남에게 뭔가를 글로 쉽게 이해시키려고 하다 보면 묘사와 비유와 은유의 노예가 된다고.”
라고 웃음으로 무마했던 기억이 있다. (정작 하메는 기억도 못 하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에 왼쪽 손목을 건다.)
아마도 둥- 하던 울림의 정체는 하메의 저 말이 물건 너머의 사람, 좁게는 내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도 적용될 수도 있겠다는 걸 순간적으로 깨달았던 것 같다. (정작 하메는 그런 의도로 말한 게 아니라는 것에 오른쪽 손목도 건다. 과연 손목의 운명은)
이상하게도 하메의 그 말이 내내 맴돌아서, 그 후로 물건의 속성을 뜯어보며 쓸모나 닮은 것을 찾지 않고 물건 그 자체를 보려 노력했다. 구체적인 방법을 설명할 순 없지만, 물건을 보며 떠오르는 각종 물음표를 무시하고 시각적으로 느껴지는 형태나 재질, 색감은 물론 주변과의 조화나 공간감 같은, 오로지 감각에 집중해서 받아들이려 노력했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하메에게 공감해 보려고 나도 모르게 시작한 노력이었다. 처음엔 이걸 왜 하고 있나 싶었는데, 희한하게도 물건을 보며 “이건 용도가 뭐지?”보다 ”예쁘다 “라는 말을 먼저 뱉는 순간이 점점 늘었다. 시간이 더 지나니 ‘내 눈에 예쁘다 ‘라는 말이 어떤 느낌인지도 어렴풋이 감이 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이런 게 ‘취향’이라는 건가?’
쓸모만 좇던 무색무취 인간에게 ‘취향 발견’은 너무 하고 싶지만, 그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은, 정해진 공식도 매뉴얼도 없는 정말 난감한 인생 과업이다.
그랬던 일이 나도 모르게 많은 걸 보고, 듣고, 맛보고, 써보는 경험으로 가능해졌다. 무언가의 쓸모를 찾으라는 이성의 명령보다 눈, 코, 입, 손, 발의 감각에 집중하는 경험이 곧 내 취향을 발견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오랜 세월 깊게 뿌리내린 실용의 나무 끝에, ‘쓸모없음의 쓸모’를 주창하는 가치관이 새로 자라났다. 내 취향을 내 취향이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도 생겼다. 새순 같았던 가치관은 여전히 꽤나 파릇하게 잘 자라고 있다.
아마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새로운 가치관을 갖긴 어렵지만, 일단 생기고 나면 소중히 돌보는 일이 꽤나 즐겁다는 걸. 무엇보다, 앞으로도 내가 낯선 가치관 앞에서도 열린 태도를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사람임을 깨닫는 것도 그 즐거움 중 하나라는 걸.
아무튼, 취향이 별 건가.
그저 내 취향과 내 견문 안에서, 내 눈에 예쁜 것은 그 자체로 ’온전한 쓸모‘가 된다.
그럼 됐지 뭐.